[N pick] 꺼지지 않는 빛의 연대기




하늘이 높아서인지, 공기가 맑은 덕인지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는 유난히도 시야가 탁 트여 보였다. 한국과 다를 바 없는 골목길인데 무엇이 다른 걸까. 위를 올려다보니 길 중앙을 가로지르며 와이어에 매달린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이라면 가로등이 우뚝 솟아 있을 자리에 시선을 방해하는 기둥이 없는 덕분에 도시의 경관은 더욱 선명하고 간결해졌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지는 은은한 빛이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조명의 왕국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1 60주년 기념 행사에 모인 세계 각국의 프레스.   2 PH 5 60주년 스페셜 에디션.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스리 데이즈 오브 디자인(3 Days of Design) 축제 기간에 루이스 폴센의 쇼룸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로 붐볐다. 루이스 폴센을 대표하는 시그너처 조명 PH 아티초크와 PH 5, PH 스노볼이 탄생 6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축하하기 위해서다. 덴마크에서 두 집 건너 하나씩 사용한다는 루이스 폴센의 램프는 이제 전 세계가 공감하는 디자인적 가치를 지닌 조명으로 자리 잡았다. 1878년 루드비 R. 폴센(Ludvig R. Poulsen)이 설립한 루이스 폴센은 본래 조명 회사가 아닌 와인 수입사였다. 조카 루이스 폴센(Louis Poulsen)이 회사를 물려받았고 기계와 설비를 다루는 회사로 운영하다가 1924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폴 헤닝센(Poul Henningsen)과의 협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조명 회사의 가도를 달린다. 그가 PH 시리즈를 선보인 1920년대 당시 조명은 전구 자체를 노출하는 것과 반구형의 갓을 씌워 빛이 직접 눈에 닿는 것을 막아주는 2가지 스타일뿐이었다. 1879년 에디슨이 상품화한 전기등은 가스등과 석유등에 비해 연기도, 냄새도 없이 모든 면에서 우월했지만 빛이 지나치게 강렬했다. 이에 폴 헤닝센은 전기등에 가스등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하고 따뜻한 빛,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빛을 담고자 했다. 과학적 디자인을 바탕으로 빛의 반사와 확산을 조절해 빛이 퍼지는 모양을 디자인한 PH 시리즈는 파리 장식예술세계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으며 단번에 주목받았다. 1958년 폴 헤닝센은 이를 더욱 발전시킨 PH 아티초크와 PH 5, PH 스노볼을 디자인했고 이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뜨겁게 사랑받는 루이스 폴센의 대표 모델이 됐다. PH 5는 접시, 볼, 컵이 포개진 형태로 어떤 각도에서도 눈부신 전구가 보이지 않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을 아래로 분산시키며 공간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PH 아티초크는 뉴욕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많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나의 목적은 조명을 더 명확하고 더 경제적이고 더 아름답게 하려고 과학적으로 일하는 것이다.” 폴 헤닝센의 모토는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의 AJ 램프,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의 판텔라(Panthella), 오키 사토(Oki Sato)의 NJP램프, 오이빈드 슬라토(Øivind Slaatto)의 파테라(Patera), 디자인 스튜디오 감프라테시(GamFratesi)의 YUH 램프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루이스 폴센의 라인업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3 72개의 메탈 플레이트를 손으로 달아 완성하는 PH 아티초크.   4 PH 5 조립을 시연 중인 장인.

이번 행사를 기념해 코펜하겐 플래그십 스토어에 루이스 폴센 팩토리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와 PH 5와 PH 아티초크, PH 스노볼을 조립하는 과정을 재현했다. 얇고 예민한 메탈 셰이드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균형을 맞추고 단단한 철사로 셰이드를 연결하는 PH 5 시리즈, 72개의 메탈 플레이트를 하나씩 손으로 달아야 하는 PH 아티초크 등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놀라운 점은 한 사람이 하나의 램프를 시작부터 끝까지 만들고 책임지며 제품 검수까지 꼼꼼하게 진행한다는 것. 자연스레 제품 하나하나에 애착을 갖게 하고 장인정신이 발현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탄생 60주년을 맞아 트렌디한 소재와 컬러로 재해석한 스페셜 에디션도 선보였다. 은은한 대지의 색을 품은 황동 소재의 PH 아티초크, 구리 소재 셰이드와 화이트 티어가 우아한 매치를 이룬 PH 5와 PH 5 미니가 바로 그것. “1958년은 덴마크를 넘어 전 세계 건축 디자인 역사에 놀라운 한 해였습니다. 폴 헤닝센이 선보인 3가지 조명은 빛의 모양을 디자인하는 그의 철학을 반영하며 여러 세대의 조명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페셜 에디션을 통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그의 디자인을 선보이게 되어 영광입니다.” 디자인 디렉터 라스무스 마크홀트(Rasmus Markholt)가 말했다. 인간에게 어둠과 빛이 모두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빛과 어둠의 균형을 찾으려 한 폴 헤닝센의 열정은 루이스 폴센 조명철학의 토대가 되어 남았다. 코펜하겐을 떠나 공항으로 향하는 길. 와이어에 달린 펜던트 조명을 다시 한번 올려다봤다. 빛이 떨어지는 모양이 꼭 나를 향해 비추는 듯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폴 헤닝센이 다져놓은 헤리티지와 디자인 철학을 지켜나가는 것이 루이스 폴센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_라스무스 마크홀트

루이스 폴센의 디자인 디렉터로서 목표는 무엇인가? 1999년 루이스 폴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조명 브랜드 라이트 이어스를 창립했다가 2014년 다시 복귀했다. 간헐적으로 신제품을 선보인 이전과 달리 당시 오너가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신진 디자이너와 협업을 추진하고 신제품도 대거 출시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디자인 기회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폴 헤닝센을 비롯해 디자인의 고전을 완성한 거장들이 다져놓은 루이스 폴센의 헤리티지와 디자인 철학을 지켜가는 것이 가장 큰 임무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와의 협업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 새로운 디자이너의 DNA를 통해 루이스 폴센은 진화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그간 협업한 브랜드와 제품이 루이스 폴센과 어울리는지를 먼저 고려한다. 디자이너의 비전과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루이스 폴센이 추구하는 분위기, 깊은 내면을 구현하기 위해 엔지니어를 투입하는데 정말 많은 미팅을 거친다. 오이빈드 슬라토와의 파테라 작업을 예로 들면 18개월 동안 100개가 넘는 샘플을 만들었다. 제품 탄생의 이면에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숨어 있다.
덴마크 디자인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심플함과 타임리스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60년 전 제품을 어제 디자인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유행을 타지 않는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결함이 없는 완벽한 퀄리티는 기본이다.
한국 시장에서 루이스 폴센의 인기를 실감하는가? 한국에서 루이스 폴센의 인기 덕에 공식 진출도 고려 중이다. 한국의 디자인을 살펴보면 덴마크와 디자인에 대한 인식과 통찰력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향후 한국만을 위한 리미티드 에디션을 제작할 계획도 있다.

 

에디터 정순영(jsy@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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