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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1

미디어 아티스트 양아치의 기술사회에 던지는 질문

네트워크로 얽힌 기술 중심의 사회의 완전함에 의문을 던지는 작가, 양아치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전시 에서 양아치 작가를 만났다.

양아치
본명은 조성진이지만, 2002년 ‘양아치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아트하우스에서 개인전을 연 이후 꾸준히 ‘양아치’란 이름으로 미디어 아트에 천착해왔다. 2010년 제11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받은 후 백남준아트센터,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르코미술관 등 굵직한 국내 미술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선보였다. 2018년에는 현대자동차가 주관하는 ‘ZER01NE’ 프로젝트 1기 참여 작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파티마 성모마리아, 1,000개의 눈, 사물, 나무에 채색, 광물, 115×33×35cm, 2020

2000년대 초반 인터넷과 네트워크 그리고 디지털 기반의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동시에 한국 예술계는 ‘세계화’와 ‘탈매체화’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웹, 네트워크,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를 재료로 작가 양아치 역시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며 탐구해왔다.
2015년부터 이어온 ‘스크린 스크린 스크린’ 프로젝트와 2017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연 전시 , 그리고 지금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등 ‘은하계(galaxy)’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업처럼 작가는 몇 가지 주제와 프로젝트에 천착해 오랜 시간 그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팽창해왔다. 2018년 현대자동차에서 주관하는 ‘ZER01NE’ 프로젝트 1기 참여 작가로 이름을 올리면서 기술과 예술의 접점을 찾는 데 더욱 집중했고, 현재는 ‘ZER01NE’의 ‘알룸나이’로서 활동하며 작가, 엔지니어, 스타트업 관련자와 깊이 있는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룩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작가 양아치는 묻는다. 우리가 꿈꾸는 기술 중심의 사회가 과연 끝없이 펼쳐진 흐드러진 꽃밭일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전시를 여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저뿐 아니라 다들 팬데믹 때문에 지금까지 일상이라 여겨온 것을 되돌아봐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개인적으로 모든 걸 일시 정지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장소가 생긴 것도 감사하고요.

작품을 보면 ‘스크린 스크린 스크린’이나 ‘은하계’와 같이 한 가지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일명 ‘현재진행형’인 프로젝트가 많은 것 같아요. 오랜 시간 한 가지 주제의 프로젝트를 이끌어오면서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요?
제 작품과 전시를 가만히 보면 근본적 주제나 내용은 같아요. 감시, 네트워크 같은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형 어법이 변하다 보니 사람들은 달라졌다고 느끼는 듯해요. 예를 들어 처음엔 웹을 기반으로 작업했는데, 이제는 조형물도 많이 사용하고 청각적 부분도 추가했으니 달라 보일 수밖에요. 작가로서 제 역할은 하나의 대주제 이곳저곳에 문을 열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의 이야기라 해도 동쪽 문을 열면 그곳에 펼쳐진 내용을 보는 거고, 반대쪽 문을 열면 또 다른 내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죠. 그럼에도 결국은 다 같은 얘기라는 겁니다.

작가님 작품의 기저에는 ‘기술’이 깔려 있죠. 사실 언뜻 예술과 기술은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작업에 기술이라는 화두를 가져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예술과 기술, 예술과 윤리 등 그 경계를 가르는 이분법, 혹은 다분법적 접근 방식은 지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서로 다른 성격의 장르를 같은 선상에 놓고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술은 사실 한 지점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하고, 이로써 비슷한 사고를 하게 하는 등 일원화된 세계를 구축하죠. 우리 사회가 완벽한 감시 체제를 향해 가고 있어요. 근데 이게 과연 괜찮은 걸까요? 기술이 통제하는 사회 말이에요. 우리는 이를 억지로라도 뜯어보고 검증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기술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사람의 감성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예술의 결합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할 수밖에요.

이번 전시는 또 한 번 ‘은하계’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요. 왜 이 주제를 다시 가져오신 거죠?
그렇게 하려고 애초부터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공통으로 묶이더군요. 은하계가 말 그대로 ‘계’, 즉 별과 행성의 집합체잖아요. 그리고 질량과 중력에 의해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죠. 전시에서 사물과 비사물이 연결되기도 하니까 네트워크나 인터넷도 ‘연결’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 모습이 은하계와 닮아서 이번 전시 주제로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사르트르, 외사시, 10개의 눈, 사물, 황동 주물, 자석, 광물, 15×12×17cm, 2020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꼽는다면요?
시작점은 아이 머리 형상의 ‘사르트르, 외사시, 10개의 눈, 사물’이었어요. 저에게 아이는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에 있는 존재예요. 우리는 아이를 볼 때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을 투영하거나, 이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미래를 그려보곤 하잖아요. 거기서 현재 모습 그대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아이는 원하든 원치 않든 현재 우리보다 많은 눈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인터넷이나 네트워크 등 다양한 기술에 이미 노출됐기 때문이죠. 동시대에 살지만, 그들이 인식하는 체계와 우리가 인식하는 체계는 너무 달라요. 전시장 곳곳에 아이의 머리뿐 아니라 그것을 변형한 형상이 있어요. 그 또한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아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겁니다.

수정과 자석 구슬이 달린 손 모양은 무엇인가요?
사실 전시장 2층에 있는 마리아상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에요. 마리아의 손동작이죠. 우리는 종교학, 도상학같이 해석이나 번역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주로 뭔가 보라고 할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하죠. 저는 손을 어떤 대상을 보는 또 하나의 대표적 기관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 눈에 수정체가 있듯이 이를 손에 붙였고, 연결을 나타내기 위해 자석 구슬을 달았습니다.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어요. 보통 우리는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아름답다고 표현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손으로 죽는다면 참 슬플 것 같아요. 제게 아름다운 손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손이에요. 종교적 차원을 떠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 그게 참으로 사람다운 거잖아요.

개인적으로 크리스털 돋보기를 또 하나의 눈처럼 사용, 작품을 왜곡해 보는 관람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프랑스에서는 ‘디스포지티프(dispositif)’라고 부르는 ‘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요즘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확장현실(XR) 등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는 디지털적 통로가 많은데 이를 보기 위해선 꼭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사실 멍하니 있다가 다른 차원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처럼 단순한 건데,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려면 꼭 맞춤 기어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불편하더라고요. 당장에라도 문방구에서 파는 잠망경 2개를 겹쳐 보면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어요.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왜 어렵게 꼬아서 생각할까요? 우리 스스로 기술을 어떤 범주 안에 가두는 건 아닐까요? 이에 대해 개방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또 하나의 눈으로 ‘기본적’ 도구인 크리스털 돋보기를 사용한 거죠.





개인전 에서 작가의 신작을 감상할 수 있다. 약 10개월 동안 고민한 작가의 사유가 담겼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단채널 영상 10분 56초, 가변 크기, 2020

전시 전반에 걸쳐 기술과 초연결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도 인간적 면모, 사람다운 것에 초점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할 때 중점을 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필름 사진을 많이 찍는 거였는데, 디지털 사진과 다르게 필름 사진은 내 생각과 카메라의 물질성이 일치하지 않으면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요. 차원이 엇나간다고 느껴진달까요. 그런데 제게는 이런 엇나간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이 중요했어요. 두 번째 중점을 둔 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고백하자면 우울증을 앓고 있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인왕산의 기도터를 많이 찾았죠. 북한산의 기도터도 찾고요. 전국 곳곳에 신기한 곳이 많아요. 장소가 아름다운 걸 떠나서 그곳에 두 차원이 있는 것 같아요. 분명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곳인데, 영적 경험을 하는 기분이거든요. 저에겐 그런 장소가 위로이기도 하고, 자신을 자극하고 감각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죠.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전시 전반에 투영됐다고 보면 됩니다.

사실 종교나 기술이나 가시적인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믿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근법의 개념은 이미 깨졌어요. 벌써 10개 이상의 눈으로 디지털 차원을 볼 수 있잖아요. 네트워크로 연결된 눈이 많아진 만큼 상식처럼 알고 있던 원근법의 개념도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서 말한 해석과 번역의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정해진 원근법의 개념 안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것 같아요. “이건 내가 이렇게 만든 거니까 이렇게 보는 게 맞아”라고 작가가 제시하면, 관람객은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관계없이 그렇게 보면서 속아주는 거죠.

어떤 작가는 작품이나 전시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저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은 현대미술 감상에서 설명이 필수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사실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이해가 잘안 되죠? 아무래도 작가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죠. 어떤 작가는 그래서 가끔 설명을 포기하기도 하고요. 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전시장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오해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오해해도 그만이에요. 정확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오해한 부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전시가 재밌게 느껴지겠죠. 그런데 이게 과연 무엇인지 오해하지 않으려 애쓰고 고민하다 보니 작품 감상이 괴롭고, 현대미술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생각과 작가의 생각에 접점이 있다면 물론 가장 좋겠지만, 전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사진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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