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읽고 시간을 깨우다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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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6

감각을 읽고 시간을 깨우다

그저 그림 그리기가 좋았고 조각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를 꿈꾼 소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됐고, 40여 년을 지난 지금 자신 안에 켜켜이 쌓인 아티스트의 감성을 옷과 함께 조합했다. 디자이너 한혜자에게 영감이란 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다.

샤넬, 이브 생 로랑, 디올 등 패션사에는 영원한 아이콘이 존재한다. 이들은 런웨이뿐 아니라 활발한 전시 활동을 통해 창조적 아이디어를 전 세계인과 공유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부여해왔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떤가. 서울은 첨단 패션 도시로 각광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 디자이너의 인생과 작품을 돌아볼 만한 전시는 흔치 않을뿐더러, 아이콘의 존재도 미미한 실정이다. 패션 디자이너 한혜자의 존재감이 독보적으로 빛을 발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1972년 이딸리아나를 시작으로 지금껏 패션업계에서 40년이 넘도록 한자리를 지켜왔고, 지금도 70대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니 그 존재감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서울디자인재단이 그녀를 주목, 한국 패션 역사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상을 반추해볼 수 있는 전시를 주최했다. 2017년 S/S 서울패션위크 패션 문화 이벤트의 일환으로 마련한 <명예 디자이너 아카이브 전시>가 바로 그것이다. 디자이너 한혜자의 열정과 철학을 집대성한 전시 은 10월 17일부터 11월 9일까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배움터 디자인둘레길에서 열린다. 패션을 옷이라는 테두리로 한정하지 않고 ‘아티스트 한혜자’의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지난 10월 초 전시 준비로 분주한 그녀를 청담동 작업실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2009년 S/S 시즌 쇤베르크의 오페라 <달에 취한 피에로>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달에 취한 피에로’ 앞에 선 디자이너 한혜자

패션 위크 기간 중 대중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2012년 SFAA가 마지막인 것 같은데, 새롭게 작품을 선보이는 기분이 어떠세요? 4~5년 정도 쇼를 하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쇼가 아니라 전시죠. 쇼를 하는 데 힘이 부쳐서요.(웃음) 아이디어, 창작에 대해 쉼 없이 고민하기가. 그래서 이럴땐 무조건 쥐어짜서 만들어내기보다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컬렉션을 선보이는 대신 여행을 했어요. 여기저기 세상 곳곳을 다 돌아다닌 것 같아요.
디자이너, 창작에 대한 고통을 느끼는 이들은 여행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를 통해 영감도 많이 받던데 어떠셨어요? 아프리카, 인도처럼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원시적인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곳에 갔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날 것의 생생함 있잖아요. 심장이 둥! 둥! 뛴다고 할까.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얼굴을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세상에 나올 엄두를 못 내고 한참을 집에만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담벼락 사이로 스며든 한 줄기 빛에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을 보게 됐는데, 그 기억이 제겐 정말 특별해요. 그걸 보면서 자연과 생명에 대한 특별한 영감을 받았고, 세상에 다시 나갈 용기도 얻었죠. 그 후부터 돌, 이끼, 흙, 나무, 바람 등 자연을 그저 보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게 참 좋아요.
전시도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떤 방식으로 그걸 표현했나요? 브라운, 그린, 옐로, 버건디 레드 등 야생에서 볼 수 있는 컬러를 쓰고 아침이슬의 반짝임을 나타내기 위해 크리스털, 비즈도 사용했어요. ‘거칠거칠한’, ‘하늘하늘한’, ‘구깃구깃한’, ‘오래되어 녹이 슨’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텍스처가 오감 중 촉각을 설명하죠. 또 이번 전시는 아카이브 전시잖아요. 그간 선보인 작품을 모아 놓고 보니 문득 ‘내가 이걸 어떻게 했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신선한 게 많더라고요. 난 그저 당시의 상황에 따라 열심히 작업했을 뿐인데, 세월이 지나니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내가 만든 옷인데도 느낌이 사뭇 달랐죠. 그래서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퇴색과 퇴적’이라는 테마에 집중했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시 설명에서 설치미술과 ‘Art to Wear’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요. 그러고 보니 늘 일반적 런웨이 형식이 아니라 퍼포먼스를 가미한 패션쇼를 선보이셨어요. 이번 전시에도 그런 볼거리가 있을까요? 늘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옷의 디자인을 시작한 지점 그리고 조형미와 예술적 감성이 하모니를 이루길 원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소재를 조합하고 변형하는 것을 좋아했죠. 리어카에 옷을 걸기도 하고, 유리잔을 달아 드레스를 만들기도 하고. 오늘 아침에도 아코디언 연주자와 회의를 했어요. 현장에서 실제 음악가가 공연도 펼칠 예정입니다. 대단할 거예요.(웃음)
기대되네요. 그런데 디자이너로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하신 것 같아요. 뉴욕, 파리에도 진출했고 이렇게 전시도 하고. 그럼에도 아직 못다 이룬 꿈이 있을까요? 이제는 꿈보다 그때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정말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해 작업 했는데도. 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계획 중인 일이 있네요. 해외 유명 패션 하우스가 디자이너 없이도 브랜드를 이어가듯 ‘HANEZA’를 이어갈 후계자를 찾는 것. 우리나라 최초로 오랜 시간 그 이름이 이어지는 패션 하우스로 남고 싶습니다.


3점의 설치미술 작품, 영감의 원천인 소품들, 패션이라는 범주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이상의 조형미와 예술적 감성을 담아낸 아트투웨어(Art-to-Wear) 등 디자이너 한혜자의 열정과 철학이 담긴 80여 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기간 10월 17일(월요일)~11월 9일(수요일)
장소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디자인둘레길(B2F)




1 ‘Time, Burnt-out 그을린 시간’, 1996, 광주비엔날레, 늘 새로운 소재에 관심을 기울여온 한혜자가 아크릴을 불에 그슬려 만든 드레스. 잡히지 않는 ‘시간’과 그 회한을 담아내며 패션의 영역을 확장했다. 2 ‘Cantabile 노래하듯이’, 1995, Art-to-Wear Show, 패션의 영역을 확장한 또 하나의 작품. 투명 아크릴 위에 와인잔들을 낚싯줄로 엮어 세상에 하나뿐인 드레스를 만들었다. 걸을 때마다 유리가 움직이며 영롱한 빛과 소리를 느낄 수 있는 드레스




3 ‘Kindred Spirits 유사한 영혼들’, 1988,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 의상전>에 출품한 작품. 마닐라삼을 꼬아 만든 자연의 소재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색한 무게감 있는 작품이다. 4 ‘In Silence 묵묵히’, 2016,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한혜자가 묵묵히 걸어온 패션 인생에 함께해온 물건들을 한데 모은 작품. 가위, 미싱, 단추, 보디 등 옷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모으고 광목을 찢어 감싸는 연출로 하나의 설치미술을 완성했다.


에디터 서재희(jay@noblesse.com)
사진 노기오(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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