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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18 ARTIST&PEOPLE

기억을 박제하다

  • 2018-09-05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김수연 작가의 작품을 훑었다. 앨범 사진, 새, 식물, 열기구, 행성, 춘화 등 카멜레온 같은 작업을 보고 중견 작가겠거니 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났을 때 적잖이 놀란 게 사실이다. 젊은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소화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한 번, 방대한 작업 과정에 또 한 번.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길 바라는 김수연 작가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김수연은 국민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회화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갤러리2, 갤러리현대 윈도우갤러리, 베를린 안도 파인 아트(Aando Fine Art)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교예술실험센터, 금호미술관, 소쇼룸,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총 다섯 곳의 국내외 레지던시 생활을 경험하며 동시대 가장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Snow Bunting.27, 캔버스에 유채, Ø50cm, 2014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생명이 있는 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도 한순간 불타오른 뒤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모든 건 상실의 순간을 맞닥뜨리고 모든 이는 부재를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사진을 찍는다. 김수연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유한하고 부재하는 것들이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며 작업에 임한다. 잠깐의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되길, 눈으로 볼 수 없는 허구가 그림을 통해 사실이 되길 희망하는 그녀는 찰나의 존재를 캔버스에 담아 영원한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그렇다. 김수연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캔버스에 기억을 박제한다.

얼마 전 구호와의 컬래버레이션 전시가 끝났어요. 준비하느라 많이 바빴을 텐데 휴식은 좀 취했나요?
여전히 바빠요. 내년 초까지 전시 일정으로 캘린더가 꽉 차 있어요. 우선 8월 30일, 갤러리2에서 오픈하는 개인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부산시립미술관 <보태니카>전에도 참가해요. 11월에는 종근당예술지상 단체전과 신생 공간 원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전시를, 내년 1월에는 지금 입주해 있는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보고 전시가 있습니다. 여러 일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쉬지 않고 작업에 임하고 있죠.

초기에는 ‘상실’이나 ‘부재’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뤘습니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어요. 주 고객은 영정 사진을 찍으러 오는 노인이었죠. 명절이나 방학 때마다 사진관에서 일을 돕곤 했는데 다음 방학에 가면 영정 사진은 남아 있지만 사진의 주인공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어요. 사람이 죽으면 남는 건 결국 사진 한 장뿐이라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사진’과 ‘물질’에 집착했고 상실과 부재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초기 시리즈인 ‘앨범 사진’, ‘버드(Bird)’가 특히 이런 철학에 기반한 작품입니다.






Marshaller, 혼합 매체, 42×25×18cm, 2017

요즘은 다른 시리즈를 하고 있지 않나요?
근래 작업은 ‘책’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다르죠. 계기가 있는데, 우연히 집에서 1970년대에 출판한 백과사전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 담긴 과학, 유령, 인체의 신비 같은 에피소드는 40년이 지난 지금 허구로 판명된 것이 많아요.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당시 사람들은 진지하게 믿었다는 점에 끌렸어요. 그래서 그중 가장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골라서 작품화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에어스트립(Airstrip)’과 ‘토성(Saturn)’이죠? 각각 열기구와 행성 이야기를 담아서 그런지 과학을 연상시켜요. 백과사전에는 과학적 지식만 있는 게 아닌데, 이 시리즈는 유독 과학 이미지가 많이 보입니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건가요?
평소 과학을 좋아한 건 아니지만 의아하다고 생각해왔어요. 일반적으로 과학은 굉장히 객관적이며 믿어도 되는 ‘사실’이라 여기지만 저는 되레 ‘미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에 가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기계로 찍은 행성 사진이 과연 진짜일까?’ 같은 의문을 계속 품어왔죠.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확신하는 과학자의 태도에서도 아이러니를 느꼈고요. 검증된 지식의 산물이라 여기는 과학에도 허황된 이야기와 유희성이 있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Saturn, 캔버스에 유채, 40.9×53cm, 2015

유희적 이야기를 좋아하나 봐요?
그렇습니다. 최신작인 ‘춘화(Spring Painting)’ 프로젝트도 비슷한 맥락을 공유해요.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에 입주했을 때 대만 레지던시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당시 대만에서 일본 춘화 화집을 발견했죠. 사실 춘화는 화가가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니라 상상에 의존해 그린 게 많잖아요. 보지 못한 걸 꾸며내서 그려야 하는 그들의 모습이 가여우면서도 귀여웠죠. 게다가 리서치를 해보니 일본에서 춘화 화가는 ‘심리적 상상의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앞선 시리즈의 과학자처럼 경험하지 못한 걸 상상에 의존해 그리는 그들의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그래서 제 그림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특히 춘화 중에서도 사랑의 감정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손과 발을 차용했고, 그 옆에는 그리스 로마 신들의 조각을 배치했어요.

초기 시리즈인 ‘앨범 사진’부터 ‘춘화’까지, 시리즈마다 시각적 차이가 큽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담긴 내용은 다 한 뿌리에서 나온 거예요. ‘부재하지만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죠. 한 예로 제 프로젝트 중 ‘버드’를 들 수 있는데, 새 한 마리를 만들기 위해 개체가 다른 새 40~50마리의 이미지를 조합합니다. 실존하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었으면 하는 기념비적 새를 만드는 거죠. ‘춘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의 사랑을 상징하는 춘화와 영원한 존재인 그리스 로마 신을 한 화면에 섞어 인간의 유한한 사랑을 무한한 사랑으로 각인시키죠.






1 Balloon 5,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2016
2 The Soft Step, 캔버스에 유채, 162.2×130cm, 2017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자 입체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평면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쳐요. 이런 복잡한 프로세스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는 종이를 마주할 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껴요. 게다가 간단한 종이 에스키스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죠. 그렇다고 캔버스에 곧바로 그릴 수 있는 타입도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찾은 방식이 ‘페이퍼 드로잉(paper drawing)’입니다. 쉽게 말하면 종이로 만든 조각 작품이자 입체 에스키스예요.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실현할 적합한 재료를 구입해 입체물로 만들죠. 굉장히 즉흥적으로 제작해요. 마치 전화 통화를 할 때 낙서하듯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할까요. 제가 조소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종이와 달리 입체를 부담 없이 제작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페인팅을 시작합니다.

모든 과정을 손수 한다고 들었어요. 작업 과정에서 수공예적 면모가 보이기도 해요.
솔직히 말하면 기계치예요.(웃음) 제가 기계를 잘 다룬다 해도 사용하지 않을 거지만요. 직접 종이를 구기고 붓 터치를 해야 창작자의 마음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건 나만 할 수 있다’는 작가적 마인드라기보단 물질에 집착하는 제 성향에서 비롯된 습관에 가깝습니다. 한데 요즘은 새로운 과정을 실험하고 있어요.






갤러리현대 윈도우갤러리에서 선보인 ‘Greenhouse 1·2·3’.

더 이상 페이퍼 드로잉을 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당분간은요. 이번 갤러리2 개인전을 준비하며 온전히 회화에만 집중해보고 싶었어요. 페인터로서 물리적으로 큰 그림을 그려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큰 화면에 제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작품 하나를 제작하는 데 많은 단계를 거쳐요. 준비 과정의 그 긴 호흡을 페인팅에만 투자하면 어떻게 될까 호기심도 생겼죠. 그래서 페이퍼 드로잉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서 페인팅에 투자하려고 해요. 하지만 완벽히 상상만으로 그리긴 힘들어서 제가 집착하는 존재인 사진을 참고합니다. 처음 시도해보는 작업이에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갤러리2 개인전에서 확인할 수 있겠죠?

갤러리2에서 열리는 개인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춘화’ 시리즈를 발전시킨 신작을 전시합니다. 전시 타이틀도 같아요. 풀어쓰면 ‘봄의 그림자’이자 ‘봄꽃’이죠. 제목처럼 이번 신작에는 꽃이 가득해요. 꽃은 암술과 수술이 만들어낸 가장 화려한 사랑의 결정체죠. 그 모습이 오래 지속되길 희망하며 그림으로 박제한 거예요. 또한 페이퍼 드로잉을 거치지 않고 큰 캔버스를 활용하는 등 작업 과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요. 한창 작업 중이라 미리 보여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이전 작품에선 볼 수 없던 또 다른 미감을 담아내려 연구하고 있습니다.






Airstrip, 캔버스에 유채, 193.9×130.3cm, 2016

금호미술관 레지던시,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를 거쳐 지금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습니다. 해외 레지던시 두 곳의 생활도 경험했죠. 총 다섯 곳의 레지던시를 거치면서 여러 예술가와 교류했을 것 같아요. 레지던시 생활과 작가들 간의 교류가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되던가요?
네. 가능하다면 레지던시에서 오래 작업하고 싶어요. 작가들과 소통하며 배우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죠. 가령 같은 주제로 작업하거나 생각하는 게 비슷할지라도 작가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요. 그런 부분에서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며 많이 배웁니다. 또 저보다 연배가 높은 선배 작가를 보며 본보기 삼죠. 레지던시 생활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목표를 설정할 수 있어서 만족해요.

새로 구상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예전에는 한 프로젝트 작업이 끝나면 곧바로 새로운 소재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춘화’ 시리즈를 좀 더 발전시키려 합니다. 타인의 그림을 제 작품 영역으로 끌어오면 좀 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모습은 기존 ‘춘화’와는 또 다르겠죠?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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