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예술 도시, 뮌헨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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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2

총체적 예술 도시, 뮌헨

문화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전하는 뮌헨의 가치. 분리파와 바그너를 통해 이야기하는 복잡 미묘한 역사를 따라가보자.

위쪽 렌바흐하우스.
아래쪽 빌라 슈투크 내부에 전시된 그림들.

새로운 예술의 탄생
상품화된 지 오래인,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그가 속한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반면 빈 분리파 탄생에 영향을 미친 ‘뮌헨 분리파’는 그에 비해 덜 알려진 듯하다. 분리파는 말 그대로 무엇에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뜻으로, 예술이 늘 기존 유파에 대한 반발로 전개되어왔음은 의심할 여지 없다. 프랑스 인상파, 러시아 이동파처럼 뮌헨 분리파도 스승에게 배운 것과 다른 예술을 추구하려는 반발에서 비롯된 것. 그럼 뮌헨 분리파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1세는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동경한 대단한 예술 애호가였다. 그는 회화관 피나코테크와 고고학 박물관 글립토테크를 세우고 님펜부르크궁전과 호엔슈반가우성을 그 분위기에 걸맞은 그림과 유물로 채웠다. 다만 예술 못지않게 여성 편력이 있던 국왕은 스캔들로 양위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고, 손자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른다. 루트비히 2세는 할아버지가 탐닉한 미의 세계를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갔다. 그는 프랑스 베르사유와 트리아농궁전을 본뜬 헤렌힘제와 린더호프, 또 뒷날 디즈니성의 모티브가 된 노인슈반슈타인성을 지은 주인공이다. 이렇게 19세기 비텔스바흐 왕가가 닦아놓은 뮌헨의 터전에서 활동한 화가가 바로 프란츠 폰 렌바흐다. 그의 위상은 ‘화가들의 군주’라는 별칭으로 대변할 수 있다. 렌바흐의 제자 중 가장 두각을 보인 인물은 프란츠 폰 슈투크다. 그는 렌바흐와 교류하며 빈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화가 한스 마카르트와 함께 연구를 위해 이집트로 떠났다. 마카르트의 제자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다. 그리고 이내 클림트를 중심으로 빈 분리파가 창설되고, 다음 해 베를린에도 이 운동이 퍼져나갔다. 이 도시들의 분리파 양식을 합쳐 유겐트슈틸(Jugendstil)이라 부르니, 프랑스어 아르누보(Art Nouveau)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새로운 예술’의 내력을 설명하기가 이토록 복잡하다.
1924년, 뮌헨시는 렌바흐가 지은 피렌체 빌라풍 건물을 사서 렌바흐하우스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대표 전시품은 청기사파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의 그림이다. 청기사파는 뮌헨 분리파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로, 슈투크의 제자들이 주축을 이뤘다. 한편 스승 렌바흐와 달리 슈투크는 1898년 고전주의 양식의 빌라를 짓고 내부는 유겐트슈틸풍으로 꾸몄다. 신화와 상징으로 채운 그림, 현대적 영웅을 숭배하는 장식이 촘촘하다. 빌라 슈투크는 뮌헨을 좌우로 나누는 이자르강 동쪽에 위치한다. 렌바흐하우스가 비텔스바흐 왕가의 터전에 있다면, 빌라 슈투크는 섭정공 거리(Prinzregentenstraße)를 지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섭정공이란 루트비히 1세의 둘째 아들이자 루트비히 2세의 작은아버지로, 조카가 죽은 뒤 그의 동생 오토를 대신해 국정을 돌본, 수양대군쯤 되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바로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 루트비히 3세다. 근처에 있는 섭정공 극장 역시 비텔스바흐 왕가의 극장과 경쟁해온 뮌헨의 중요 음악당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정치나 예술이나 매한가지였던 것이 아닐는지. 아마 렌바흐가 지금의 빌라 슈투크를 봤다면 못마땅해서 눈을 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렌바흐하우스는 스승 슈투크를 거부한 제자들인 청기사파에게 방을 내줬으니 말이다. 점점 구상으로부터 멀어져 추상에 도달하는 칸딘스키의 그림과 이 박물관의 명함 격인 프란츠 마르크의 ‘호랑이’ 앞에 관람객이 몰려 있다. 그런데 문득 옆방에서 나의 귀를 자극하는 음악이 들렸다. 청기사파와 음악적 공감대를 보여주는 아널드 쇤베르크의 현악사중주 2번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여러 예술을 하나로 묶는 총체 예술의 본보기가 아닐까. 이 곡의 마지막 악장에는 소프라노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슈테판 게오르게가 쓴 시 ‘황홀경’을 노래한다. ‘나는 다른 행성의 대기를 느낀다’는 가사처럼 이 공간에는 미술관의 여느 방과 다른 공기가 감도는 듯했다.





위쪽 유겐트슈틸풍으로 꾸민 빌라 슈투크.
아래쪽 슈투크의 '낙원의 수호자'.

음악으로 통합한 반목
2018년, 뮌헨의 한 음악회에서 그런 공기에 완전히 휩싸인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와 키릴 페트렌코(현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가 지휘하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쇤베르크의 바이올린협주곡(1936)을 협연할 때였다. 최초로 주어진 열두 개 음을 전후좌우로 비튼다는 면에서 이 협주곡은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맥을 같이하는 듯했다. 여운이 이어지던 휴식 시간,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코파친스카야에게 사인을 청했다. 그녀는 흔쾌히 멋진 필적을 남기고는 후반부 프로그램 브람스 교향곡 2번을 들으러 무대가 아닌 객석으로 들어갔다. 사실 브람스 교향곡은 먼저 들은 노래의 주인 쇤베르크보다 반세기 전에 나온 것으로, 완전히 다른 결의 공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렌바흐는 후배들이 창설한 분리파에 가입하길 완고히 거부했고, 비슷하게 슈투크의 수업을 듣던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는 “이건 아니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그리고 쇤베르크는 칸딘스키와 초기에 뜻을 같이하던 인물이었으나 슈투크의 미술을 숭배하던 히틀러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런 복잡한 반목이, 공연 후반부를 청중과 함께 들으려는 협연자 코파친스카야의 세련된 콘서트 매너 덕에 종합적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5년 뒤 나는 같은 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았다. 종종 현대음악의 뿌리로 꼽히는 문제작이다. 13세기 중세 음유시에 바그너가 직접 쓴 대본의 내용은 이렇다.





프란츠 마르크의 '호랑이'.

1865년 바그너의 뮌헨 초연 무대는 시종일관 청중을 압도했다. 당시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자 음악계 거장 프란츠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불륜을 저질렀음을 알고도 초연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아마도 왕은 스스로를 트리스탄이라 여겼을 것이다. 바그너에게 몰두하느라 국고를 탕진하고 은둔하던 루트비히 2세는 뮌헨 남쪽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생전에 그는 오스트리아 황후가 된 엘리자베트(일명 Sissi)를 사모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루트비히 1세의 조카이자 루트비히 2세와는 오촌 사이.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루트비히 2세는 황제의 조카이기도 했다. 이졸데의 마지막 노래 ‘사랑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영욕이 극장 안에 녹아 흘렀다. 장장 5시간 넘는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니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졌고, 여전히 지붕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펄럭였다.





위쪽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W.Hoesl
아래왼쪽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아래오른쪽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W.Hoesl

1막 콘월 기사 트리스탄은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를 숙부 마르케 왕의 신부로 호위 중이다. 이졸데는 앞서 트리스탄의 칼에 약혼자를 잃었기에 그의 호위를 치욕으로 여겨 독을 나눠 마시고 함께 죽으려 한다. 그러나 시녀가 독약 대신 건넨 사랑의 묘약 탓에 두 사람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른다.

2막 마르케 왕과 결혼한 후에도 이졸데는 트리스탄과 밀회를 즐긴다. 사냥 나간 왕 몰래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은 끝없는 밤을 찬양한다. 그러다 결국 발각되고, 왕의 심복 멜로트는 트리스탄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3막 영지에서 죽어가던 트리스탄은 이졸데가 도착하자 이내 숨을 거둔다. 모든 것이 사랑의 묘약 탓임을 알고 마르케 왕은 용서하러 왔지만, 이졸데도 트리스탄을 따라 생을 마감한다.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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