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비밀 공간, 수장고가 열린다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SPECIAL
  • 2023-01-30

박물관의 비밀 공간, 수장고가 열린다

대중에게 수장고를 공개하는 박물관들.

V&A 도자 연구 갤러리. © Victoria and Albert Museum

수장고는 관람객에게 미지의 영역이지만 박물관 직원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장소다. 애초에 보안에 중점을 두고 설계한 곳인 데다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할 때도 대부분 직원이 다니는 루트와 전혀 겹치지 않아 평소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꼈다.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하고 도난을 방지하고자 두꺼운 벽으로 둘러싼 수장고는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으며 수장고 담당 학예사와 보안 담당 직원 등 최소 두 명과 미리 약속하고 동행해야 문이 열리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그렇게 비공개 영역에 자리한 수장고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박물관이 늘어나고 있다. 박물관의 패러다임이 ‘소유’에서 ‘공유’로, ‘수집’에서 ‘활용’으로 변하면서 소장품과 수장고도 접근 가능한 콘텐츠로 인식하는 것. 보관과 보존을 우선시하던 수장고에 전시와 연구 기능을 결합한 소위 ‘개방형 수장고’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이는 1976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박물관(Museum of Anthropology, MoA)이 처음 시도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V&A)처럼 소장품 일부만 ‘보이는 수장고(visible storage)’로 공개하거나, LA에 있는 더 브로드(The Broad)처럼 수장고 자체에 유리창을 설치해 내부 공간을 살짝 엿보게 하거나, 바젤의 샤우라거(Schaulager)나 로테르담의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ngen)처럼 아예 ‘수장형 박물관’을 만들어 건축물 자체가 수장고 역할을 하게 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21년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등이 거대한 개방형 수장고로 개관했다.





열린 수장고에서 작품의 뒷면을 바라보는 사람들. @Photo by Lotte Stekelenburg
아래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의 수장고. @Photo by Lotte Stekelenburg

단순한 ‘창고 개방’이 아닌 ‘박물관 시스템’ 공유
LA에 이미 지점을 냈거나 2023년까지 오픈을 앞둔 갤러리가 족히 열 곳이 넘는다. 뉴욕의 대표 갤러리 중 하나인 숀 켈리(Sean Kelly)가 지난 9월 930m2에 달하는 새로운 공간에서 이드리스 칸(Idris Kahn)의 신작 전시로 할리우드 거리에 깃발을 꽂았다. 1991년에 오픈한 이후 뉴욕에서만 두 차례 이동하며 덩치를 키운 숀 켈리가 다음 행선지로 LA를 선택한 것. 국제적 행보를 더욱 공고히 하고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둔 여러 작가, 기관과 적극적으로 협업하고자 하는 의지다. 숀 켈리가 자리 잡은 지역은 배리어스 스몰 파이어스(Various Small Fires), 콘 갤러리(Kohn Gallery), 노나카-힐(Nonaka-Hill), 리젠 프로젝츠(Regen Projects) 같은 LA의 톱티어 갤러리가 오랫동안 지역 미술을 이끈 캘리포니아 미술 시장의 중심지다.
서울에도 지점을 낸 페이스(Pace)는 LA의 터줏대감 격인 갤러리 케인 그리핀(Kayne Griffin)을 흡수하며 지난 4월 서부에서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뎠다. 5년 전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전시로 협업한 이후 여러 프로그램을 함께한 두 갤러리는 특히 ‘캘리포니아 미니멀리즘’으로 불리는 ‘빛과 공간 운동(Light and Space Movement)’의 명맥을 잇는 작가를 수차례 선보였다. 둘 사이 깊은 유대를 생각하면 페이스 갤러리의 성공적 안착은 물론 제임스 터렐이 디자인을 맡은 케인 그리핀의 상징적 공간에 둥지를 튼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블럼 앤 포(Blum & Poe), 데이비드 코댄스키 갤러리(David Kordansky Gallery), LA 루브르(LA Louver), 나이트 갤러리(Night Gallery) 같은 로컬 갤러리와 협업하며 캘리포니아의 정서를 한껏 머금은 작가를 소개하겠다고 예고했다.





바젤의 샤우라거 내부. @Photo by Tom Bisig © Paul Chan
아래 샤우라거의 도서관. @Photo by Tom Bisig

작품의 뒷면을 보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은 대부분 관람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정면으로 설치한다. 게다가 보호막 없이 노출되는 작품의 파손 위험을 줄이고자 관람객 사이 적정 거리를 고려해 가까이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개방형 수장고는 다르다. 전시 목적보다는 효율적인 보관과 보존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한 공간이기에 항온·항습 시스템을 갖춘 유리장이나 수납형 랙에 작품을 설치, 가까이에서 작품의 뒷면이나 밑면까지 볼 수 있다.
올해 거대한 개방형 수장고 형태로 개관한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 역시 히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렘브란트(Rembrandt) 같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주요 작품 앞·뒷면을 다 공개한다. 일반 전시처럼 큐레이터가 제시하는 상세한 맥락과 정보는 없을지 몰라도 각 작품에 담긴 역사를 관람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다.
브뤼헐(Brueghel)의 ‘바벨탑’(c.1568) 뒷면에 찍힌 커다란 흰색 스탬프는 과거 이 작품이 스페인 왕비 엘리사베타 파르네세(Elisabetta Farnese, 1692~1766)의 소장품이었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는 쉽게 볼 수 없는 정보다.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 © www.vangoghmuseum.nl
아래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의 개방형 수장고 전경.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 이규열

소통하는 수장고, 디지털 스토리지
일반인이 보이는 수장고, 수장고형 박물관, 연구 센터 등 다양한 이름이 붙은 공간에서 방대한 소장품을 접할 기회가 늘었지만 박물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장품 정보를 디지털화해 또 하나의 수장고, 즉 디지털 스토리지를 오픈한다. 지난 8월 국제박물관협의회(ICOM)가 발표한 ‘새로운 박물관의 정의’에 따른 키워드 ’지식 공유’와 ‘공동체의 참여’에 걸맞은 모델로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과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 등을 들 수 있다.
브루클린 미술관은 홈페이지의 컬렉션 메뉴에서 방대한 소장품 정보를 제공한다. 단순한 홈페이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선 소장품의 정면, 측면, 윗면의 이미지는 물론 각종 디테일 컷 등 객관적이고 상세한 시각 정보를 전달하며, 각 소장품과 유사한 재료, 컬러의 같은 시대 다른 자료를 엮어 지속적 탐구를 유도한다. 기본 정보는 물론 애플리케이션에서 대중의 질문을 받아 그 답변을 공개하며 그야말로 소통형 박물관의 롤모델 역할을 한다. 나아가 홈페이지가 디지털 수장고 기능을 하면서 단순한 안내 기능을 넘어 지식 생산의 구심점으로 작동한다.
반 고흐 미술관도 흥미롭다. 소장품 정보와 관련 기록을 촘촘히 엮어 공개하고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작품과 작가 이야기를 주제별 콘텐츠로 만들어 홈페이지의 ‘Art & Stories’ 메뉴에서 제공한다. 팬데믹 이후 새로운 콘텐츠를 채워 2020년 7월에 다시 문을 연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는 연간 약 425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으며 우수 웹사이트에 수여하는 웨비상(Webby Awards) 2개 부문을 수상하는 등 미술관 홈페이지로서는 드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박물관이 수장고와 소장품 정보를 공개하는 데에는 사실 위험도 따른다. 항온, 항습, 진동, 조도, 해충 관리는 물론 도난과 파손 위험뿐 아니라 박물관 고유의 시스템을 공개하는 데 비효율적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제한된 인력과 예산 안에서 수장고를 열어젖히는 것은 어쩌면 모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박물관이 더욱 다양한 형태로 관람객과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온·오프라인 양방향으로 발전적 효과를 끌어내기를 기대한다.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조아라(큐레이터)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