뽐내지 않는 바텐더, 임병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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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1

뽐내지 않는 바텐더, 임병진

월드 클래스 바텐더 임병진이 바 '뽐'을 통해 또 한번 파격에 도전한다.





월넛을 기본으로 다양한 식물을 배치해 보타니컬 분위기가 물씬 나는 뽐.

임병진은 늘 궤도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었다. 격식을 갖춘 재퍼니즈 클래식 바가 유행할 때도 캐주얼 바를 지향하며 ‘마이너스’라는 이름의 바를 한남동에 오픈했다. 마이너스가 궤도에 오른 뒤에는 바 신의 중심지 한남동을 훌쩍 벗어나 서촌으로 갔다. 서촌 골목에 한옥을 고친 바 ‘참(Cham)’을 만들고 동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에서 조용히 위로를 건넸다. 2011년 처음 참가한 월드 클래스 코리아 대회에서 파이널에 올라 단숨에 바 신을 흔들고, 2013년·2014년 연속 2위에 오른 뒤 2015년, 마침내 코리아 파이널 최종 우승을 거머쥔 임병진. 단 몇 줄로 요약된 이력이 그 사람을 대변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너머에 생략된 피, 땀, 눈물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수시로 뜨고 지는 바텐더와 바 신에서 블리스, 스피크이지 몰타르, 마이너스, 참 등 여러 업장을 거치며 오랜 시간 차분히 실력을 검증해온 임병진의 행보에 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이유다. “실력을 뽐내기 위해 과시하는 순간부터 미숙한 바텐더가 돼요. 좀 더 멋진 바텐더가 되고 싶다면 실력을 감추세요.” 언젠가 바텐더를 꿈꾸는 이에게 이렇게 조언한 임병진은 확실히 감출수록 드러나는 실력파 바텐더다.

“저, 아무래도 청개구리 기질이 좀 있나 봐요.(웃음)” 오랜만에 만난 임병진은 그동안 에디터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먼저 꺼냈다. 그는 ‘2020년 아시아 베스트 50’에 든 바 참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참이었다. 바 참에서 걸어서 2분 거리인 곳에 가오픈 중인 바 ‘뽐(Pomme)’이 그 실험실이다. “말 그대로 사과라는 뜻이에요. 아침에 먹는 사과처럼, 낮부터 편하게 들를 수 있는 바를 만들고 싶었어요. 오늘 바에 가야지, 마음먹지 않고도 지나가다 편하게 들를 수 있는 바요.” 낮 2시부터 새벽 2시. 기묘한 시간표를 지닌 이곳에선 밤에 먹는 사과, 낮에 마시는 칵테일 같은 이질적 단어의 조합이 가능해진다.

천장부터 테이블, 의자, 하물며 창틀까지 고급스러운 월넛으로 마감한 뽐 내부는 포근한 노란색 조명이 더해져 따뜻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다.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창문 앞에는 작은 정원처럼 레몬밤, 금귤, 무화과, 타임, 제라늄이 기분 좋은 향을 뿜어낸다. 바와 마주한 벽에는 은은한 민화 같은 벽지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대각선 맞은편에는 흰 벽에 식물 세밀화 액자가 규칙적으로 걸려 있다. 헐거운 관찰만으로도 이곳은 그동안 알던 바와는 다르다. 바에 앉으면 시선을 붙드는 독특한 천장 디자인은 일정하게 쓰러진 도미노처럼 물결치는데, 그 위에 물감처럼 흩뿌린 조명이 역동적으로 보여 신비롭다. 천장을 한참 쳐다보다 찬찬히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또 하나 눈에 띄는 것. 백바(backbar)에 놓인 술의 라인업이다. “뽐은 열매, 허브 등을 모티브로 한 술을 주로 다뤄요. 사과로 만든 증류주 칼바도스를 비롯해 코냑, 진, 포트 와인, 셰리 와인 등 과일과 허브로 만든 술이 대부분이죠.” 뽐의 시그너처 칵테일 ‘뽐스 컵(Pomme’s Cup)’이 에디터 앞에 놓였다. “제임스 핌스라는 사람이 만든 ‘핌스 컵’을 모티브로 변주한 칵테일이에요. 칼바도스를 기주로 한 새로운 칵테일입니다.” 코끝을 스치는 민트잎, 여름 바람처럼 기분 좋게 불어오는 오이와 라임 향,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후추 향이 주는 마지막 한 방이 있는 칵테일. 누리지 못한 지난 계절이 못내 아쉬워 이 한 잔에 여름을 붙잡아둔 것 같아 잠시 설렘을 느꼈다.





뽐의 시그너처 중 하나인 뽐스 컵을 메이킹하고 있는 임병진.





임병진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글렌피딕 익스페리멘탈 시리즈와 파이어 앤 케인으로 만든 칵테일.

임병진은 곧장 글렌피딕을 이용한 칵테일 준비에 착수했다. “뽐에서 몇 안 되는 위스키 라인업 가운데 글렌피딕은 비교적 다양한 편이에요. 글렌피딕은 제게 특별한 브랜드니까요.” 2017년, 글렌피딕이 주관한 제1회 월드 모스트 익스페리멘탈 바텐더(WMEB) 대회에서 임병진은 글렌피딕 12년·15년·18년을 몸에 뿌리는 향수와 칵테일에 가미하는 식용 향수로 만들어 1위를 차지했다. 지금은 바텐더와 조향사의 협업이 흔한 편이지만 당시에는 단연 파격이었다. “WMEB 대회는 글렌피딕이 단순히 대중적인 싱글 몰트 브랜드라는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됐어요. 당시 글렌피딕 증류소를 방문해 밤낮으로 글렌피딕을 마셨는데,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요즘도 아침저녁으로 종종 글렌피딕을 마셔요.(웃음) 마시기 쉽고 질리지 않는 상쾌함은 가히 독보적이죠. 글렌피딕 익스페리멘탈 시리즈 역시 제겐 특별해요. 프로젝트 XX, IPA, 파이어 앤 케인 세 가지 중 특히 전 세계 20명의 위스키 전문가가 각각 선택한 오크통 원액을 조합해 만든 프로젝트 XX에는 증류소에서 만나 가까워진 글렌피딕 앰배서더도 참여했거든요. 이번에 뽐에서는 스모키한 향을 담은 파이어 앤 케인을 이용해 에버딘 앵거스(스코틀랜드 소의 한 종류이자 클래식 칵테일 이름)를 재해석했어요. 스카치위스키, 꿀, 허니 위스키, 우유, 카카오닙스, 라임을 섞어 ‘클레리파이드(clarified)’ 기법으로 내리는데, 우유가 산을 만나면 결합하는 특정 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한 거예요. 유분이 색을 모두 머금어 투명한 액체로 나온다는 점이 신기하죠.” 액체가 다 걸러져 나오는 몇 분 동안 임병진은 정성스럽게 얼음 정중앙에 구멍을 뚫어 카카오닙스를 채우는 밑 작업에 몰두했다. 섬세하면서도 스피디한 메이킹으로 정평이 난 그이지만 이곳에서만은 속도를 늦추고 한 잔 한 잔에 공을 들이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칵테일은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맛들이 충돌하며 전혀 새로운 풍미를 만들어냈다. 상식에의 도전, 글렌피딕이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임병진이 삶을 대하는 자세가 이 칵테일에 응축된 것은 아닐까, 잠시 감탄하며 여운을 즐겼다.

뽐은 단순히 새로운 바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의 발로가 될 것이다. “팜 투 바(Farm to Bar)를 시도해보려고 꿈꾸고 있어요. 단순히 농장의 작물을 가져와 사용하는 일방적 방식이 아닌, 산지와 진정한 의미의 협업을 하는 거죠. 어제도 충주에 가서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나고 왔어요. 아직은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겠지만요. 내년 2월부터는 전남 등지를 돌며 찻잎을 따고 그 후엔 다른 지역으로 옮겨 두어 달 지내면서 생산적인 휴가를 보낼 생각이에요.(웃음)”

이제 막 문을 열어 손님이라곤 나뿐인 공간에 잠시 앉아 앞으로 이곳을 채울 사람들의 풍경을 마음으로 그려보았다. 밤낮없이, 경계 없이, 편견 없이 칵테일 하나를 매개로 그저 즐겁게 채워질 풍경. 그 옛날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시인 이상과 윤동주, 화가 박노수가 자유롭게 드나들던 시절의 서촌 풍경이 21세기에 재현되는 엉뚱한 한낮의 꿈을 꾸는데, 마침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coise Hardy)의 샹송 ‘Tous les garcons et les filles(영화 <몽상가들> ost)’가 흘러나왔다.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이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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