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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6

인연, 유연, 연연

인연의 가치를 반추하는 문화 예술 콘텐츠.

김환기, ‘론도’, 193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인스타그램 돋보기를 터치할 때마다 종종 마주하는 포스팅이 있다. ‘모르면 인간관계로 고생하는 몇 가지 사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방법’, ‘인생 살면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사람’ 등등. 아마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래,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조금 전까지 ‘인연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애원해도 떠나게 돼 있다. 인간관계에 너무 애쓰지 말자’라는 말에 강한 긍정을 표했건만, 다른 포스팅에선 이런 유형의 사람을 만나야 내 삶이 평안해진다고 하니까.
인연에 매달리지 말라면서 곧바로 인연에 매달리라니. 궁금하다. 여러분은 인연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몇몇 포스팅처럼 계산적이고 극단적으로 인연을 맺고 끊는 것이 정녕 가능한지. 로맨스만 하더라도, 총 맞은 것처럼 가슴 아프고 목이 메어 “다시는 사랑 안 해”를 외쳤으나, 이내 “너와 함께라면 행복한 나”라고 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니던가. 그러니 사람들 사이에 맺는 관계(인연因緣)를 어떠한 연유에서 기인(유연有緣)한다 믿고, 소중하고 부드럽고 연하게(유연柔軟), 애틋함(연연戀戀)을 갖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래야 헤어짐도 덜 지독할 테고. 다시 말해, must와 should로 접근하는 것을 지양하자는 의미다.
최근 인연의 가치를 돌아볼 수 있는 전시와 영화, 책이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끈다. 먼저,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한 점 하늘_김환기>. 한국적 추상의 개념과 형식을 구축한 김환기의 40년 여정을 톺아보는 자리지만, 무엇보다 누군가를 그리워한 작가의 마음이 공명을 일으키는 전시다. 1964년 뉴욕에 진출한 김환기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 얼마나 섭섭했고, 외로움에 젖어 있을까. 기쁨보다도 서글픈 마음이 더하다. (…) 앞으로는 이러한 애끓는 고비가 없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행복하기를 빌자.” 아버지 김환기의 다정함과 애절함에 한참 숨을 가다듬다가 문득 문정희 시인의 ‘아들에게’가 떠올랐다.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아버지·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는데, 자식으로서 부모의 외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더불어 김환기의 점화 작품, 그 신호탄을 쏘아 올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에선 지음(知音)을 향한 그리움이 물씬 풍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가짜 부고를 들은 김환기가 그의 시 ‘저녁에’를 주제로 그린 작품으로, 당시 일화와 시, 그림을 동시에 가슴속에 그리면, 김환기의 말마따나 인간의 사랑이 이토록 서럽도록 충만함을 체감하게 된다.





위쪽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아래쪽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 중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만남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혹자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언급한 것이 의아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여느 가족물과 견줘도 손색없을 만큼 인류애적 성격이 짙다. 영화는 가모라를 잃고 상심에 빠진 피터 퀼이 위기에 처한 로켓을 지키려 가디언즈 팀과 재결합하는 내용을 뼈대로 삼는다. 은하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제는 다름 아닌 우정. 그중 어린 시절 감옥에서 고난을 겪은 로켓의 “언젠가 하늘을 나는 멋진 기계를 만들어 친구들과 떠날 거야. 라일라, 티프스, 플로어 그리고 나 로켓까지”라는 대사에선 유년 시절 친구의 소중함을, 오합지졸이던 가디언즈 팀이 원 팀이 되는 모습에선 서로 의지하고 아픔을 토닥여주는 관계의 따스함을 깨닫는다. 한편, <스즈메의 문단속>은 우연히 재난을 부르는 문을 연 주인공 스즈메가 청년 소타와 일본 각지에서 발생하는 재난을 막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일종의 로드 무비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연약한 인간이 재난과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거리를 던지는 데 의의가 있다. 다소 교과서적이지만, 스즈메와 소타의 여정을 묘사한 이 영화는 사람이 있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더욱이 영화는 관심과 애정에 따라 홀쭉해지거나 통통해지는 고양이 다이진을 비중 있게 다루는데, 다이진 에피소드를 보노라면 불현듯 오늘날 머리로 따지는 불가근불가원이 연상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얼룩과 아픈 기억을 지우는 마음 세탁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아낸 윤정은 작가의 장편소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과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 지은의 세탁소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한 사람, 부와 명예를 가졌으나 본인을 돈 버는 기계로 대하는 가족에게 환멸을 느낀 인플루언서 같은. 사실 지은 역시 원망과 자책에 빠져 살던 사람이나, 손님과 대화하면서 자신을 치유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된 셈.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중반부에는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며 스스로 열어 보이는 이들은 꽤 용감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속이 곪아 있다. 곪아 있는지도, 아픈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결국, 작가는 사람에게 상처받지만, 위로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전하고 싶었나 보다. 인연에 애틋한 마음을 품는다면, 내 인생이 엉킨 실타래가 됐을 때 그 인연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다는 참된 이치를. 그래서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진한 감동을 주고받는다면 충분히 괜찮은 삶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김환기, ‘항아리’, 1956.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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