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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08

새 술은 새 부대에

전 세계 현대미술을 견인할 주요 미술관의 새 얼굴.

1 런던 현대미술연구소는 볼프강 틸만스를 새 단장으로 임명했다. ICA 역사상 아티스트가 단장에 오른 건 최초다.
2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아 거스키와 함께 선 볼프강 틸만스(오른쪽).

9월 30일, 영국 런던의 현대미술연구소(ICA) 단장에 현대미술 작가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미술계의 큰 이슈였다. 세계적 학자와 예술가의 전시회, 공연, 강연 등이 이뤄지는 ICA 역사상 아티스트가 단장으로 임명된 건 처음이었기 때문. 이 임명은 동시대 미술에서 현대미술 작가가 기획자와 행정가로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또 한번 보여준 대표적 인사(人事)가 됐다.
ICA는 왜 독일 출신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를 단장에 임명한 걸까? 사진작가이자 비영국인 최초로 터너상(2000년)을 수상한 볼프강 틸만스는 영국의 컬트 문화를 다루며 얼굴을 알린 작가다. 소수자의 삶, 인종차별 등 민감한 사회 이슈부터 동시대 사진의 리얼리즘을 미학적으로 세련되게 보여준 그의 사진은 상업과 예술 분야 할 것 없이 전방위로 큰 인기를 얻으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2006년부터 베를린에서 ‘Between Bridges’라는 비영리 독립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데 동시대를 아우르는 포퓰리즘, 가짜 뉴스에 대한 현황 등 대중적 쟁점을 사진과 출판물로 재정리하며 기획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처럼 작가로서 색깔이 분명하면서도 대중 친화적인 데다 기획 능력까지 겸비한 볼프강 틸만스를 ICA가 마다할 리 없었다.
특히 최근 미술계에서는 ICA가 테이트 모던과 V&A, 로열아카데미(RA) 등 영국의 주요 미술 기관과 역할을 뚜렷이 분리하고 ICA만의 차별점이 있어야 한다는 평이 돌던 상황.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임근준은 “ICA는 설립 이래 영국 팝아트 형성에 기여하는 등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나름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의 모습은 실망스러웠죠. 운영을 맡을 단장에 현대미술 작가인 볼프강 틸만스를 앉힌 것은 다소 파격적 조치로, 작가 중심으로 이사회를 운영하던 과거의 ICA로 회귀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ICA의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2020년 봄을 제외하곤 ICA의 전시 일정이 확정되지 않은 점은 운영의 불안정함을 나타내지만, 그래도 볼프강 틸만스가 테이트 모던 트러스티 멤버로 활동하며 미술관이라는 조직 내부 운영 상황을 지척에서 바라본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ICA 이사회가 “이 시대는 예술가들이 이끄는 시기”라며 힘을 실어준 부분은 신임 단장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 런던 디자인 뮤지엄의 새 수장이 된 팀 말로.
4 2023년 런던 동부에 개관을 앞둔 V&A 이스트는 스미스소니언 국립 아프리카 미술관 디렉터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를 초대 관장으로 임명했다.
5 런던 디자인 뮤지엄 내부 전경.

미술관의 복잡한 고민
이 밖에도 런던에서는 두 기관장의 이동이 눈에 띈다. 지난 10월, 런던 디자인 뮤지엄 CEO이자 디렉터에 임명된 팀 말로와 2023년 개관을 앞둔 V&A 이스트의 초대 관장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Design Museum)의 새로운 수장이 된 팀 말로(Tim Marlow)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로열아카데미 디렉터로 활동하며 비평적 시선으로 굵직한 전시를 선보였고, 새로운 관람층을 미술관으로 이끈 인물이다. 추상표현주의, 모네와 마티스의 인상파 시절 모더니즘과 정원에 초점을 둔 기획, 달리와 뒤샹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와 1900년대 초반 러시아 미술 그리고 많은 관람객과 이슈를 불러일으킨 안토니 곰리의 전시 등 모더니즘 미술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사를 재정리하기도 했다. 많은 미술인이 미술사에서 팀 말로의 모범적 연구자로서 태도를 인정하는 것도 이러한 면모 덕분. 추성아 독립 큐레이터는 “디자인 뮤지엄이 팀 말로를 수장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이 기관이 앞으로 전시에 밀도와 무게를 두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특히 그래픽과 디자인에 대한 정리와 연구가 탄탄한 기획 전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큽니다. 시노그래픽적 측면에서도 다소 단조로운 상설 전시 공간 기획이 기존 범주를 넘어 획기적으로 변할 듯싶고요”라며 정석을 지키는 전시 기획이 중심이던 로열아카데미에서의 경험이 디자인 뮤지엄에 긍정적 변화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했다.
요즘 핫 플레이스가 된 런던 동부에 오픈할 V&A 이스트(V&A East)는 2023년 개관을 앞둔 곳으로 새로운 컬렉션과 리서치 센터를 표방하는 기관이다. 이스트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젊은 층이 참여하는 협업 프로젝트, 지역 프로그램, 지역 문화, 커뮤니티 중심의 공공성 확보가 목표인 이곳의 초대 관장엔 현재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 아프리카 미술관(Smithsonian’s National Museum of African Art) 디렉터인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Gus Casely-Hayford)가 낙점됐다. 미술관장이자 문화사학자, 작가, 큐레이터,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그의 임명은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이 업계의 평. V&A와 스미스소니언 인스티튜션 사이에 파트너십이 있기도 하거니와 V&A 이스트의 설립 취지가 V&A의 소장품과 오브제를 이스트에서 공개, 대중에게 컬렉션에 대한 이해를 돕고 리서치와 아카이빙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니, 이러한 맥락이 잘 형성된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디렉터인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가 V&A 이스트를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미술 저널리스트 박민경은 여기에 한 가지 의견을 덧붙인다. “이번 임명은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의 비전과 추진력, 영국에서의 인지도도 영향이 있겠지만 글로벌 트렌드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구겐하임 미술관에선 미술사에 묻힌 여성 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전시가 성황리에 진행되며 여러 기록을 갱신했어요. 관람객 수 60만 명, 전시 도록 3만 부 판매, 멤버십 30% 증가, 미술관 아트 숍 매출 40% 증가 등 역대 기록이죠. 이는 ‘역사 속에 묻힌(숨은) 여성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어요. 최근 미술계 흐름이 여성 작가 재발굴, 흑인 및 다른 문화권 작가 재평가라고 할 만큼 아트 페어와 비엔날레, 미술관.갤러리 전시 등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기존 주류의 시각과 프레임에 식상해진 미술 기관이 신선한 공기를 주입하는 방식이랄까요. 이런 시류에 맞춰 아프리카 역사를 전공하고 아프리카 지역 미술과 관련해 경험이 많은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가 V&A 이스트에서 보여줄 글로벌한 시각이 궁금합니다.”




6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은 1년 반 가까이 관장이 공석이었다.
7 레인 볼프스 관장이 지난 6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독일 본의 분데스쿤슈탈레.
8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을 새롭게 이끌 레인 볼프스 관장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대가 크다.

1년 반 정도 관장이 공석이던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에는 네덜란드 출신 레인 볼프스(Rein Wolfs) 관장이 새로 부임했다. 그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은 19세기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다양한 장르의 기획을 선보였다. 하지만 전임 관장인 독일인 베아트릭스 루프(2014~2017)가 관장으로서 역량이 부족하기도 했고, 네덜란드 미술계가 외국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로 돌아서며 관장 선출에 대해 지역의 반발이 거셌던 것이 사실. 거기에 베아트릭스 루프가 부유층의 아트 컬렉션을 비공개적으로 자문하며 돈을 번다는 것을 네덜란드의 한 일간지가 폭로하면서 결국 관장직에서 물러났다. 공석이던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관장에 레인 볼프스가 임명된 건 이런 의미에서 보수화의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레인 볼프스는 독일 본에서 6년간 분데스쿤슈탈레(Bundeskunsthalle)를 운영하며 칼 라거펠트 최초의 회고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개인전 등 컨템퍼러리 아트를 상징하는 전시를 성공시키며 적자를 면치 못하던 미술관을 독일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맞이하는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는 이번 관장의 인사 결정 요소로 넓고 방대한 미술 지식, 풍부한 행정 경험, 국제적 네트워킹, 작가와의 돈독한 인간관계, 예술에 대한 비전과 주변인의 아이디어 수용과 같은 능력을 중시했다고 들었는데, 이 기준에 레인 볼프스가 적임자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아트 저널리스트 박민경의 말이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여러 주요 기관장으로 일하며 경험한 행정적 특성과 미술사에 대한 폭넓고 깊은 지식, 국제적 감각 그리고 암스테르담 근방에서 태어나고 자라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대해 각별한 애정까지 넘친다니,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의 재도약을 흥미롭게 기다려보면 될 듯하다.




9 모리 아트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이자 부관장인 가타오카 마미가 관장으로 승진했다.
10 섬세한 리더십으로 정평 난 오사카 에리코가 이끌 일본 국립신미술관.
11 모리 아트 미술관에서는 현재 < Al, Robotics, Cities, Life-How Humanity Will Live Tomorrow >전이 한창이다. 사진 속 작품은 에코로직 스튜디오의 ‘H.O.R.T.U.S. XL Astaxanthin.g’(2019).

일본 미술계를 집중시킨 여성 파워
일본 도쿄에 소재한 국립신미술관과 모리 아트 미술관에서는 두 여성이 관장에 임명되며 여성 기관장이 귀한 일본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10월 일본 국립신미술관(NACT) 관장에 임명된 여성은 오사카 에리코(Erico Osaka). 많은 미술 기관에서 국제적 현대미술 전시회를 큐레이팅하고 모리 아트 미술관(2007~2009)에서 예술감독으로 근무한 뒤 2009년부터 요코하마 미술관장으로 재직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등에 큐레이터와 임원진으로 참여하며 글로벌 감각을 인정받았다.
“오사카 에리코는 섬세한 리더십의 소유자예요. 국제적 감각에 맞게 미술관 관람객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죠.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고령자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무는 것) 외에도 다양한 계층의 관람객이 미술관을 찾도록 애쓰고, 실제로 그걸 수치화해 관리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관람객 수에만 집착하는 미술관장의 행보와 확연히 다르죠.” 사회적 약자의 미술관 참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 국립신미술관을 운영할 때도 보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 임근준 평론가의 생각이다.
롯폰기에 위치한 모리 아트 미술관(Mori Art Museum)도 2019년을 끝으로 은퇴하는 후미오 난조 관장 후임으로 수석 큐레이터이자 부관장인 가타오카 마미(Mami Kataoka)를 관장으로 임명했다. 가타오카 마미는 2003년부터 모리 아트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아이웨이웨이, 이불, 시오타 지하루, NS 하르샤 등의 개인전을 기획, 아시아 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개 기획자 출신 관장은 큐레이터에게 권한을 주면서도 세부적 범위까지 개입하려는 특성이 강하다. 게다가 가타오카 마미의 경우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은 미술관에서 승진했으니 누구보다 내부 시스템을 잘 알 터. 일본인 특유의 조심스러운 성정 대신 일할 때 밀어붙이는 스타일로 유명한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큐레이터에게 기획 권한을 줄지 궁금하다는 의견이 다수다. 하지만 전임 관장인 후미오 난조는 한 외지와의 인터뷰에서 “가타오카 마미는 일본에서 몇 안 되는 여성 미술관장이자 일본에서 가장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 중 한 명으로 모리 아트 미술관을 다음 단계로 안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우리도 그녀의 부임 후 모리 아트 미술관이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데 앞으로 얼마만큼 동아시아 중심의 시각을 나타내는 전시를 보여줄지 관심을 갖고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일본 미술계는 현재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부터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2025년까지 아시아 현대 미술 신에서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입장이다. 국립신미술관과 모리 아트 미술관은 산토리 미술관과 함께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을 형성하고 있다. 국가적 행사를 앞둔 일본에서, 이 두 여성 관장이 미술계의 기대에 부합하는 전시 프로그램 등에 역점을 둔다면 일본 미술계에도, 전 세계 아트 팬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도움말 박민경(미술 저널리스트), 임근준(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추성아(독립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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