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루이지애나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CITY NOW
  • 2023-11-15

오, 루이지애나

누군가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기는 미술관은 과연 얼마나 될까.

[No Tomorrow], 2022.
Commissioner of Sigurður Gísli Pálmason; Based on Commission of Iceland Dance Company Photo by Louisiana-Poul Buchard / Brøndum & Co. ©Ragnar Kjartansson

기억의 서랍을 열어 이따금 꺼내보는, 오래 아끼고 싶은 추억의 미술관이 하나 있다. 단 한 곳의 미술관, 오직 하나의 전시를 위해 겁 없이 낯선 도시를 향하던 시절에 발견한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북쪽 도시 프레덴스보르의 해안가 마을 훔레베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미리 첨언하면 미술관 하나가 도시 전체를 부양한다거나 쇠락한 도시를 재생시켰다는 의미는 아니다. 훔레베크는 여전히 인구가 채 1만 명이 되지 않는 소박하고 평화로운 동네다. 훔레베크 기차역에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20분 남짓 걷다 보면 미술관 입구에 당도한다. 압도적 건축물이나 으스대는 간판은 없다. 활짝 열린 대문 옆으로 단정한 안내판이 목적지에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처럼 수수한 첫인상에 세계적 명성의 원천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우선 컬렉션의 규모와 수준, 양질의 전시 등 기본 미덕을 두루 갖췄다. 여기에 공간과 환경이 남다른 매력을 더한다. 창립자 크누드 W. 옌센(Knud W. Jensen)은 1870년대에 지은 오래된 빌라를 토대로 미술관을 세우며 ‘주변 자연과의 조화’에 역점을 두었고, 1958년 개관 이래 총 일곱 번에 걸쳐 공간을 확장했다. 그 결과 풍경과 미술관은 서로에게 완벽하게 속했고, 이는 관람객에게 몸과 정신이 온전히 공간에 속하는 귀한 경험으로 이어진다.

전시장 전경.
Photo by Louisiana-Poul Buchard / Brøndum & Co.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1945년대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시대와 장르를 망라한 4000여 점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이름에 포함된 ‘모던(modern)’은 시기상 ‘근대’에 가깝지만, 꾸준히 컬렉션을 확장하며 진정한 의미의 ‘현대’미술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기관의 특징이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는 컬렉션은 연대기적 흐름을 따르기보다는 특정 미술 사조, 일군의 작가 등 나름의 테마를 솎아낼 수 있는 구성 방식을 취한다. 유럽의 누보레알리슴, 앤디 워홀(Andy Warhol)과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이 중심에 있는 미국 팝아트,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와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를 필두로 한 1980년대 독일 회화, 1990년대 이후 비디오 아트 같은 주제에 따라 관련 작품을 모으는 식이다. 이는 컬렉션 연구를 토대로 기획하는 전시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컬렉션 중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작품은 상설전을 통해 공개한다.
형상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고민한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가 만든 연약한 인간들이 비로소 영원한 안녕을 찾은 듯 보이는 ‘자코메티 갤러리’가 대표적이다. 미술관의 북쪽 윙(The North Wing)과 남쪽 윙(The South Wing)에서는 각각 덴마크의 전위적 화가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의 전 생애에 걸친 그림과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의 몽환적 설치 작품 〈Gleaming Lights of the Souls〉가 관람객을 반긴다.





[Epic Waste of Love and Understanding], 2023 Courtesy of the Artist, Luhring Augustine, New York, and i8 Gallery, Reykjavik, Photo by Louisiana-Poul Buchard/Brøndum & Co. ©Ragnar Kjartansson

기획전은 그동안 데이나 슈츠(Dana Schutz), 앨릭스 다 코트(Alex da Corte), 미카 로텐베르그(Mika Rottenberg), 아서 자파(Arthur Jafa) 등 눈여겨봐야 할 동시대 미술가의 전시를 꾸준히 선보였다. 6월 9일부터 10월 22일까지는 라그나르 캬르탄손(Ragnar Kjartansson)의 개인전 《Epic Waste of Love and Understanding》이 열린다. 아이슬란드 출신 작가 라그나르 캬르탄손은 회화, 조각,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지극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특히 감독, 배우, 음악가 등으로 참여한 퍼포먼스와 음악, 영화 요소를 포함한 공간 설치 작업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미술관 입구에 ‘사랑과 이해의 막대한 낭비’라는 전시 제목을 경구처럼 새긴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언뜻 대리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합판을 이어 붙이고 그럴듯하게 칠한 작품이 마치 그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다. 연극을 한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성장한 캬르탄손에게 진실성(authenticity)이란 언제나 의문의 대상이며, 예술 세계는 클리셰로 가득하다. 그리고 예술가로서 기꺼이 이런 의문과 관찰을 활용한다. 작가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발표한 초기작을 비롯해 대표작과 신작까지 한자리에 모은 이번 전시는 스칸디나비아 대륙에서 열리는 최초의 회고전이기도 하다.





[Scandinavian Pain], 2006–2012. Photo by Louisiana-Poul Buchard/Brøndum & Co. ©Ragnar Kjartansson

각 작품은 주제 면에서 실존적 고통, 남성성에 대한 미묘한 성찰, 덴마크 식민지였던 작가의 고향 아이슬란드 사이에 얽힌 지정학적 역사를 아우른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표현 방식은 자기 인식, 성공과 실패, 멜랑콜리, 부조리, 희망, 진부함 등 서구 문화가 함의하는 요소를 향한 특유의 건조한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을 드러낸다.전시장에서 빠져나와 미술관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다 보면 시원한 창밖으로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대형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밖으로 나갈 차례다.
많은 이가 미술관의 백미로 꼽는 ‘조각 공원(Sculpture Park)’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가르는 외레순해협을 내려다보며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헨리 무어(Henry Moore), 호안 미로(Joan Miró) 같은 대가의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면 현재에 머무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체험할 수 있다.
물론 더 넓고, 더 예리하고, 더 젊고, 더 강렬한 미술관도 많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이 그립다. 떠나는 순간에도 앞으로 내내 그곳을 그리워할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거듭 뒤돌아보며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 낯선 언어가 적힌 이정표, 낮게 깔린 바다 내음 전부를 공들여 마음에 담아야 했다. 이곳을 찾는 누구든 미술관 하나 덕분에 낯선 도시가 소중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에디터 백아영
이가진(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제공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