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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1

예술 앞 무장해제

2020년 1월 말까지, 랜덤 인터내셔널이 부산과 인천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들의 작품은 경험해보지 않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

경이로움 그 자체인 ‘Rain Room’(2012).

현대미술을 어떻게 감상하면 되냐는 질문에 “작품을 보고 즐기면 그만”이라고 답해온 내 말이 무색하게 언제부턴가 전시 감상이 일처럼 느껴졌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작가는 왜 여기에 파란 물감을 칠했지?’, ‘작품 제목이 독특한데, 영감을 받은 문학작품이 있나?’ 등 무엇 하나라도 알아내고 분석하려는 내 태도에 지쳐 다 관람하지 못하고 미술관을 나온 적도 더러 있다. 에디터라는 직함을 달고 난 뒤에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더 바삐 움직였다. 기자 간담회, 오프닝, 아티스트 토크, 포럼 등 찾는 행사가 많아질수록 머릿속에 쌓이는 지식은 늘었지만 감상에 있어 또 다른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 작품 어때요?”라는 물음에 “좋다”라는 단순한 답변이 아닌,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을 멋지게 뱉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런 감상 태도가 나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얻은 것도 많다. 하지만 학구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긴장감을 해소하려 찾은 곳도 미술관이다. (엄밀히 따지면 박물관이지만) 그중 유독 편안했던 곳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전 회화를 좋아하는 취향 덕에 작가의 기교가 한껏 들어간 그림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종종 옛 그림이 한가득 걸려 있는 전시실에 들어가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숨을 들이쉬고,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숨을 크게 내뱉으며 동시에 잡념을 날리곤 했다. 나에게 예술이란 숨을 돌리게 해주는 존재다. 이 기분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다시금 상기하게 된 계기는 유명 미술관의 회화실 방문이 아닌, 랜덤 인터내셔널 (Random International)의 ‘레인 룸(Rain Room)’(2012)이었다.




1 관람객을 향해 거울 판넬이 움직이는 ‘Audience’(2008).
2 약 200개의 거울 조각으로 완성한 ‘Fragments’(2016). 거울 조각은 사람에 반응해 제각기 다른 각도로 움직인다.
3 생명체를 빛의 덩어리로 재현하는 ‘Our Future Selves’(2019)는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공간에 맞춰 재구성했다.

독일 출신 하네스 코흐(Hannes Koch)와 플로리안 오르트크라스(Florian Ortkrass)가 2005년에 결성한 랜덤 인터내셔널은 급속도로 디지털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기술, 인간, 예술의 관계를 인터랙션 아트로 탐구한다. 이들의 대표작 ‘레인 룸’은 등장과 동시에 “인간이 비를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여러 외신에 소개됐는데, 그 당시 기사들을 한참 동안 들여봤던 기억이 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지만 머리 위에서 빗방울이 멈추기에 관람객의 몸은 젖지 않는다”라는 부연 설명을 재차 읽었음에도 아리송했다. 투명 막이 생겨 물을 튕겨내는 원리일까? 그렇다면 사람과 빗방울 사이에는 몇 센티미터의 여유 공간이 있는 걸까? 예술 작품은 실물을 보지 않으면 진가를 알 수 없다. 2020년 1월 27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 <랜덤 인터내셔널: 아웃 오브 컨트롤>전에서 선보이는 ‘레인 룸’을 경험하기 위해 부산행 KTX 표를 끊었다.
여러 수식어가 있다 한들 ‘경이롭다’는 단어 외에는 ‘레인 룸’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 이 방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감탄사를 내뱉는다.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지만 몸에 닿지 않는다. 습하긴커녕, 상쾌하고 가뿐하다. 엄두가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온몸으로 장대비를 흠뻑 맞는 일이 가능하고, 그 어떤 장애물 없이 비를 가장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경이로움이 가득한 곳이다. 캄캄한 공간에 내리쬐는 한 줄기 조명마저 보는 이의 감상에 따라 해가 되고 달이 된다. 비는 현대미술을 향한 낯섦, 어려움, 불편함을 씻겨 내리기에 관람객은 이 공간 자체가 현대미술임을 잊은 채 탄성을 터뜨린다. ‘레인 룸’에서 이뤄지는 낯설고도 기묘한 체험을 어떻게 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왜 외신에서 “인간이 비를 통제할 수 있는 공간” 정도로 표현했는지 수차례 문장을 지우고 고치는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인 룸’에 머물렀던 10분 동안 예술이 주는 경이로움을 오감으로 느꼈고, 그 경험은 작품을 순수하게 마주했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서울로 돌아와 ‘레인 룸’의 경이로움을 곱씹고 있던 중 가까운 인천에서 랜덤 인터내셔널의 또 다른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2020년 1월 31일까지 이들의 개인전 <랜덤 인터내셔널: 피지컬 알고리즘>을 개최하는데, 이곳에선 인간·예술·기술의 삼박자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온 랜덤 인터내셔널의 흔적을 좇을 수 있다. 총 10점의 작품을 ‘조응: 바라보기’, ‘모사: 따라 하기’, ‘개체: 독립체 단계’로 나눠 기계가 인간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따라 하고, 나아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구성이다.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의 시그너처, 제프 쿤스의 ‘게이징 볼-파르네세 헤라클레스’ 앞으로 늘어선 ‘Audience’(2008)는 관람객을 발견하자마자 머리(거울)를 바삐 돌려가며 관찰한다. 곧바로 만나는 ‘Presence and Erasure’(2019)는 인간의 움직임을 포착해 나무 패널 위에 이미지로 기록하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Fragments’(2016)는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인간에 대응해 모습을 바꾸는데, 마치 대화를 시도하려고 입을 오므렸다 펼치는 듯하다. 전시장 깊숙이 들어갈수록 작품에 이식된 기계는 점점 진화한다. ‘Small Study(FAR)’ (2016)는 규칙적인 빛이 춤을 추고, ‘Our Future Selves’(2019)는 역동적인 인간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작품에 옮겼으며, 비로소 인간처럼 관절을 움직여 걷는 ‘Fifteen Points / Ⅱ’(2019)로 진화해 전시장을 누빈다. 전시는 기계가 인간과 어떻게 융화하는지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 전시된 10점의 작품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관람객과 상호 작용한다. 하지만 관람객의 반응은 ‘레인 룸’을 마주했을 때와 다르지 않다. 놀라운 풍경 앞에서 나온 짧은 감탄사에는 다양한 감정이 얽혀 있다. 현대미술 관람자에서 참여자가 됐다는 설렘, 다른 차원의 예술을 마주한 신기함, 인간·예술·기술이 만든 작품에 대한 경이로움 등. 플로리안 오르트크라스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우리는 기술을 기술이 아닌 하나의 도구(tool)로 여긴다. 로봇 하면 터미네이터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인간이 기계를 잘 알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력도 깊어진다”라고 말했다. 본디 예술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학문이다. 랜덤 인터내셔널은 첨단 기술로 사람들에게 테크놀로지의 대단함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현대미술의 진짜 맛을 보여준다. 기술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예술로 인간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것. 랜덤 인터내셔널은 이런 작품을 한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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