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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19 FASHION

미래를 좇는 고고학자

  • 2019-10-31

옛것이라면 무조건 뒤떨어지거나 요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그는 자신이 자란 곳을 자양분 삼아 누구나 입고 자랑하고픈 옷을 만들었다. 2020 크루즈 컬렉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패션쇼가 열린 카피톨리니 미술관 내부.

로마를 겨우 몇 번 가본 처지에 로마에 대해 평한다는 것은 마치 강남에 한두 번 와본 외국인이 서울을 평가하는 느낌이라 섣부르다는 입장이다. 그저 갈수록 어느 시대라고는 규정할 수 없는 도시를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커진 것뿐이라고 해두자. 공항에서 달려 로마로 들어서면 로마 특유의 소나무에서부터 고대로 진입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시 대부분의 도로는 여전히 돌로 메워 하이힐을 신고 걷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으며, 고색창연한 건물이 주를 이뤄 해만 떨어지면 어두컴컴해지기 일쑤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실내는 맨해튼의 편의시설이 부럽지 않으나 건물 외관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얼굴로 도시를 장악하고 있다. 이는 역사가 오래된 유럽 도시라면 응당 지닌 공통점이지만, 로마는 좀 더 특별하다. 로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시대 이후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을 때도 있는 듯하다. 왜일까?






2020 크루즈 컬렉션.

5월 28일 캄피돌리오 언덕에 위치한 카피톨리니 미술관에서 구찌의 2020 크루즈 컬렉션이 펼쳐졌다. 일반적 패션쇼장의 휘황찬란함에는 연연하지 않는 듯, 관객들은 미술관 내 조각품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좁은 자리를 탓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인 곳에서 심지어 관광객이 몇 시간이고 줄 서서 보고 싶어 하는 조각품을 옆에 끼고 패션쇼를 감상했으니 말이다. 실내는 로마의 밤처럼 어슴푸레하고, 흰색 조각상이 뿜어내는 매끈한 빛이 분위기를 심오하게 떨군다. 입구에서 고고학자처럼 사용하라고 나눠준 휴대용 랜턴으로 이리저리 비춰본다. 조각상의 무표정과 호기심에 달뜬 관객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박물관 사이사이에 자리를 배치하다 보니 모델의 동선도 어느 때보다 길다. 이제나저제나 쇼가 시작되길 기다리자니 어느새 모델이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전체적 룩도, 관심 있는 액세서리도, 메이크업도 랜턴으로 꼼꼼히 살펴본다.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추구하는 자유와 자기 결정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컬렉션엔 1970년대에 시작된 여성의 자유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담겼다. 컬렉션에 소개된,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슬로건 ‘마이 보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라는 문구와 아티스트 MP5가 디자인한 ‘차임 포 체인지(CHIME FOR CHANGE)’ 로고가 더해진 옐로 티셔츠의 수익은 차임 포 체인지가 후원하는 자선단체에 전액 기부할 예정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만의 놀라운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 요소와 컬러의 조합은 이번 크루즈 컬렉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디자인에 더한 ‘로마적’ 요소는 미술관과 꽤 잘 어울렸다.






쇼를 보고 나오니 캄피돌리오 언덕은 베이지색 건축물의 음영과 조화를 이뤄 운치를 더한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크루즈 컬렉션 장소를 선정할 때마다 ‘구세계와의 대화를 잇는 것’에 방점을 두었다. 뉴욕의 디아 예술재단,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회랑, 아를의 공동묘지인 프롬나드 데 알리스캉, 최근에는 폼페이의 헤르쿨라네움 및 셀리눈테 유적 공원에서 2019 프리폴 컬렉션을 촬영했다. 쇼를 볼때마다 에디터는 그가 컬렉션과 장소는 과거에서 차용하지만 시선은 늘 미래에 두고 있음을 느낀다.
2020 크루즈 컬렉션이 열린 카피톨리니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의 하나로 캄피돌리오 광장에 함께 지어졌다. 이 지역은 과거 로마시대의 중심지로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25개의 신전이 자리하던 곳이다.






구찌 앰배서더 EXO 카이.

박물관은 광장을 끼고 마주 선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누오보궁전의 두 건물을 총칭하는 것으로 모두 고대 조각품의 보물 창고라 불린다. 특히 콘세르바토리 미술관은 1450년 건립했으나 1564~1568년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바탕으로 재건해 확장했다. 콘세르바토리 미술관에는 ‘캄피돌리오의 암이리’, ‘캄피돌리오의 브루스트상’, ‘가시를 빼는 소년’ 등 청동상이 전시돼 있으며, 16~19세기 회화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누오보 궁전에도 ‘큐피드와 프시케’와 ‘빈사의 갈리아인’ 등 로마에 들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방문하게 만드는 작품이 즐비하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유년 시절이 연상되는 곳에서 성대하게 열린 2020 크루즈 컬렉션은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창의성이 역사를 휘감은 도시를 다시 한번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구찌는 향후 2년간 캄피돌리오 남쪽에 위치한 암벽인 타르페아 절벽 복원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타르페아는 1세기까지 반역자를 아래로 떨어뜨려 사형시킨 절벽으로, 수 세기 동안 깎이고 파이면서 지금의 독특한 천혜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도시를 위한 당연한 애정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에디터 이윤정(yoonjunglee@noblesse.com)
사진 제공 구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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