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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18 FEATURE

전광영의 서정, 抒情

  • 2018-04-25

우리 고서에서 나온 한지로 싼 각각의 삼각형 유닛이 모여 이룬 한국이란 집단의 역사, 그 총체적 조화를 입체 회화라는 장르로 선보이는 전광영 작가. 그간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애널리 주다 갤러리, 로버트 밀러 갤러리, STPI, 펄 램 갤러리, 버나드 제이컵슨 갤러리, 뉴 컨템퍼러리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서울의 PKM갤러리를 비롯해 전 세계 6개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그의 다음 행보는 브루클린 미술관을 향한다.

1 ONT-012, Oil on Canvas, 131 x 227cm, 1976.
2 ONT-085, Oil on Canvas, 182 x 152cm, 1978.

2011년 갤러리현대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개최하는 PKM갤러리 개인전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전광영 작가는 꽤 상기된 표정이었다. 2년 전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 거리상 많은 관람객이 함께하지 못한 터라 이번 개인전이 그에게는 꽤 오랜만에 관람객을 만나는 자리였을 터. 한지 입체 회화 ‘집합’ 시리즈의 신작 몇 점이 새롭게 얼굴을 비치고, 그간 다른 전시에서는 보기 힘들던 미국 체류 시절 작업한 초기 추상회화 작품까지 선보이니 설렘 반, 걱정 반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건너 들은 그의 미국 유학 시절 이야기는 그리 밝거나 행복하지도, 작가로서 어떤 성과를 내거나 주목을 받은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아버지의 미술대학 진학 반대로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4년 내내 학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그렇게 돈을 모아 1969년 떠난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에서는 늘 외롭고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내야 했다.
졸업 후 1977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늘 배를 곯을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린 그의 미국 생활은 어떤 의미에선 인생의 암흑기였을 것이다. 작가로서 미국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마침내 짐을 쌀 때 그는 추상회화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접었을 뿐 아니라 생과 사 사이에서 몇 번이나 고민했을 정도로 삶 자체는 절박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이 바로 그 시절의 그림이라니, 만감이 교차하는 작가는 차치하고 관람객 입장에서도 꽤 흥미로는 작품 감상이 될 만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의 1970년대 초기 회화는 대표적 입체 평면작 ‘집합’의 어떤 근본을 보는 듯했다. 회화를 밑그림 삼아 그의 한지 작업이 발전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추상회화와 입체 회화가 한 뿌리에서 나온 듯 닮은 모습이었다. 분명 그는 ‘just like New York’이라는 평가를 받던 추상회화를 그만두고 한국적인 것, 전광영만의 DNA를 발견하기 위해 국내의 민속 박물관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큰아버지의 한약방 천장에 매달려 있던 약봉지를 떠올렸고, 스티로폼으로 만든 삼각형 조각을 한지로 싸서 끈으로 동여매는 방식의 유니크한 작품 ‘집합’을 창조해 세계적 관심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40여 년 만에 들춘 그의 회화는 마치 어제 그린 그림처럼 현재의 작품과 뚜렷한 연결 고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추상회화와 입체 회화에서 발견한 규칙적인 선이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방향성,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색채의 농담, 개별적인 무수한 터치와 유닛이 모여 이루는 전체적 통일성 등을 발견하고 보니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가 “전광영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특히 초기 페인팅이 중요한 단서이자 뿌리가 된다. 그 작품을 함께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이번 전시는 큰 의미를 둔다”고 말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PKM갤러리 개인전 <전광영: Works 1975-2018>을 시작으로 올해 4개의 개인전이 열립니다. 신작 제작부터 전시 기획 점검까지 쉴 틈이 없으실 것 같아요. 한 작가가 개인전을 1년에 한 번 하기도 어려운데 저는 PKM을 시작으로 5월에 뉴욕 선다람 타고르 갤러리, 9월에 홍콩 펄 램 갤러리, 10월에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있어요. 일정이 잡힌 전시 외에도 전속으로 속해 있는 갤러리들에서 늘 신작을 요청하기 때문에 제가 소화해야 하는 작품 양이 적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작업해야 하죠. 특히 브루클린 미술관은 전 세계 5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곳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어 매우 흥분돼요. 백남준, 이우환 작가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 후 주요 미술관 전시로는 오랜만이죠.

고서의 한지를 삼각형 스티로폼으로 싸서 일일이 매듭을 묶고 그것을 다시 구기자, 치자, 오미자, 선인장 가루, 커피 가루 등으로 천연 염색한 후 그 유닛을 캔버스에 입체 회화의 형태로 재결합하는 일련의 작업은 시간의 레이어가 층층이 쌓여야 완성되는 작품입니다. 한 작품당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요. 조금만 원료의 양을 달리해도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내가 만든 색일지라도 이전에 만든 색과 똑같이 다시 만들기는 쉽지 않아요. 복잡한 제작 과정상 다작이 잘 안 됩니다. 어떤 작품은 한두 달씩 걸리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1년 내내 바쁘죠. 그래도 이번 전시에서는 한 번도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많이 선보였어요.

그간의 작품에 비해 분위기가 매우 서정적입니다. 입체지만 색의 깊이와 농담이 살아 있어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신작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작품은 제 얼굴이에요. 우리의 삶이 매일 다르듯 얼굴의 표정도 같을 수 없죠. 색과 소재는 같지만 7년 전 보여준 작품에 비해 표출된 모양이나 거기에 깃든 솔(soul)은 아주 많이 달라졌습니다.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되었으나 이방인으로 혼돈의 시기를 보내다 1977년에 귀국하셨습니다. 1970~1980년대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간 국내 젊은 작가들은 누구랄 것 없이 문화적·인종적 충돌을 많이 겪은 것 같아요. 충돌과 균열 그리고 융합과 통합, 이런 것이 작품의 영감이 되는 경우도 많고요. 저의 20대와 지금의 20대가 유학을 가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그때는 한국에서 1000달러 이상 가지고 갈 수도 없었어요. 현지에서 벌어 생활하라는 말이나 똑같았죠. 특히 문화적 충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충격을 이겨낼 만한 면역력이 있을 때 미국에 가는 것과 없을 때 가는 것 또한 매우 다릅니다. 저처럼 호기심만 가지고 간 상태에서 경험한 충격은 마치 바윗돌로 머리를 얻어맞는 것과 같았어요. 집채만 한 알래스카의 빙산이 제 앞을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었죠.

문화적 차이도 있지만 혈혈단신으로 미국에서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걸 보여줄 수 있을까 얼마나 고민하셨겠어요. 모든 작가의 고민이겠지만요. 당시 제 몸무게가 44kg이었어요. 미국 가서 18개월 동안 한국 사람을 한 번도 못 봤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족도 없고, 마치 망망대해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듯 잔인하게 문화적 충돌을 경험하면서 이상한 자생력이 길러졌어요. 절박함도 생겼고요. 미국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입체 추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전시장에 걸린 1970년대 후반의 추상 작품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의 작품과 그 흐름이 연결되어 있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을 가지고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해요. 입체 작품 ‘집합’과 함께 나란히 보니 추상회화가 더욱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선생님의 추상회화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미국에서는 저를 도로를 지나다니는 무수한 쏘나타 중 한 대로 본 것 같아요. 새것과 헌것의 차이일 뿐, 쏘나타는 많죠. 제가 만약 페라리였다면 사람들이 ‘우와~’ 하며 쳐다봤겠지만 미국에 있으면 그냥 계속 쏘나타로 살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제 회화 작품을 보니 ‘1970년대 그림인데 요즘 페인팅에 뒤지지 않네. 꽤 앞서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서의 도전이 너무 짧았다는 아쉬움은 없나요? 아니요. 당시 자신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지금의 유니크한 입체 회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추상회화와 입체 회화가 소재나 표현 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연관되어 보이는 건 모두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작가로서 소망이 있다면 미술을 시작한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전광영의 작품은 모두 한 유전자에서 나왔구나’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용기를 내어 초기 회화 작품을 걸었어요. 내게 이런 뿌리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Aggregation17-DE101,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92 x 156cm, 2017.(왼쪽) Aggregation14-JA009 (Desire2),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63 x 131cm, 2014.(오른쪽)

추상회화에서도 동양의 정서와 선생님 특유의 미학이 느껴지지만 1990년대 후반 입체 회화로 전향하면서 본격적으로 오리지널리티를 발현하셨습니다. 50년 이상 된 고서의 한지를 이용해 삼각형을 하나하나 감싸고 틀 안에 집어넣어 전체적 하모니를 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으셨는데,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으셨죠? 제가 유학 간 당시 미국에선 한창 추상회화가 인기를 얻고 있었어요. 그 발원지에 가서 그림을 그려보니 내 것이 너무 초라해 보이더군요. 분명 내 것이 있을 텐데 나는 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좋은지 나쁜지 따질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됐고, 그럴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그러다 진짜 내 것을 찾아보자 싶어 연구한 것이 한국의 보자기 문화고, 거기서 발전해 한지 작업이 나오게 된 거죠.

지금도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염색 재료를 직접 고르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종이, 천연의 색을 사용한 선생님의 작품은 그래서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집에 온 듯 맘이 편해져요. 뭔가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서 하숙하며 학교에 다니셨는데, 거기서 비롯된 가족에 대한 애잔함 같은 것이 작품에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건 지금도 큰 상처로 남아 있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떨어져지내다 보니 약 10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와 너무 보고 싶었던 어머니를 보고도 “엄마~” 그 한마디가 안 나왔어요. 그래서 지금도 늘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이 있어요.

부친께서는 미술대학 진학을 심하게 반대하셨다던데, 어머님은 어떠셨어요? 가부장적 사회의 전형적인 어머니, 발언권이 없는 어머니였어요.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어머니 시대는 앞으로 다시는 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어머니는 살아생전 얼마나 본인의 인생을 살고 싶으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요즘은 일기장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겨요. ‘나 지금 열심히 작품 만들고 있어. 이 작품으로 엄마를 위로해줄게’ 이렇게요.

선생님이 성장하며 겪은 그런 경험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든 것 같습니다. 1층 전시장의 작품을 보면 잔잔하면서 회화적이잖아요. 한 인간으로서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애잔한 감정이 있다 보니 그게 작품으로 나와요. 신작에 사용한 노란색도 흥분된 노랑은 아니에요. 오랜 시간 외롭게 살아온 탓인지 작품 속에 다 나타나죠.

3월 말에 홍콩에서 열린 아트 바젤 홍콩에서도 선생님의 작품을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주요 아트 페어와 영국의 애널리 주다 갤러리, 미국의 로버트 밀러 갤러리, 도쿄의 모리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종종 갤러리스트나 컬렉터와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을 텐데, 그들은 선생님 작품의 매력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요? 제 작품을 좋아한다고 할 때 가장 많이 덧붙이는 이야기가 ‘크리에이티브하다’는 거예요. 특히 저는 ‘유니크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 제일 행복합니다. 또 제 작품에 서 제가 아시안인 것과 그동안 살아온 제 삶이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작품에 더 애정이 간다고요.

갤러리와 미술관, 양쪽에서 사랑을 받긴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평소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작가’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작가인데, 그렇게 자리매김하면 작가로서 그다음 작업이나 행보가 좀 수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신작이 나오면 걸어두고 수개월을 봐요. 그런데 6개월 만에 꼴도 보기 싫을 때가 있어요. 한자리에 머무는 걸 못 견디고 자꾸 튀어나갈 생각을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새로운 걸 하면 기존의 작품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안 좋아하는 경우도 있어요. 쳐다보지도 않죠. 그런데 저는 ‘안 쳐다봐? 관둬, 그럼’ 그러고 계속 제 갈 길을 가는 편이에요. 그런 작가가 오래가고 잊히지 않는 것 같아요.

작가라는 직업은 어쩌면 작품 구상과 제작, 전시 그리고 다시 작품 구상으로 이어지는 쉼 없는 작업의 연속입니다. 그런 삶에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미국 유학 시절, 폴이라는 친구와 가깝게 지냈어요. 저를 잘 챙겨줬죠. 어느 날 그 친구와 저녁에 맥주 한잔하는데 난데없이 “너를 보면 늘 걱정스러운 게 하나 있어. 작품은 즐기는 거지 전쟁이 아니야”라고 하는 거예요. 당시 제가 어땠느냐 하면 주변 친구들에게 매일같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미술 공모전 어디 없니?” 이러고 다녔거든요. 친구들 보기에는 그게 이상했던 거죠.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성남이나 안양에서 미술 대회가 있다는데 너 아니?’ 정도의 질문이었을 테니까요. 친구들이 물었어요. “거기서 금상 받고 은상 받으면 뭐 할 건데?” 그래도 저는 친구들 몰래 출품하고는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혼자 결과 확인하고 그랬죠. 그 후로도 폴은 저에게 계속 그랬어요. “절대 초조해하지 마. 예술은 즐기는 거니까.”

그래서 그 후로는 즐기셨나요? 즐기려고 하는데 자신을 몰아가는 성격을 잘 못 고쳐요. 뒤에서 쫓아오는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서 열심히 달리죠.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도 쫓기고 초조해하는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 있는 스태프들도 차를 가져다주면서 “선생님, 좀 쉬면서 하시면 안 돼요?”라며 걱정해요. 그러면 저는 이래요. “이게 병인걸 어떡하니?”라고요.

오는 10월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개인전을 앞두고 계십니다. 미술관의 일부 공간에서 진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1년 가까이 이어지는 프로젝트 전시라 현지 교포와 뉴욕을 찾는 미술 애호가들에게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최초의 한국 작가 개인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라 감흥도 남다를 것 같고요. 브루클린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 전시로 여러 공간 중 ‘컨템퍼러리 아트 갤러리’에 150~200호 정도의 ‘집합’ 시리즈 10점과 천장에 매다는 대형 설치 작품 1점을 낼 계획이에요. 브루클린 미술관 전시가 확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뭔 줄 아세요? ‘하면 되는구나’였어요. 50년 가까이 작가로 살면서 ‘작가를 그만둘까’ 생각한 게 족히 100번은 넘거든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작가로 살고 있는 저 자신이 기특해요. 그래서 요즘은 가끔 크게 혼잣말을 해요. “야, 전광영! 너 괜찮은 작가야. 결국 50년을 해왔잖아!”




3 Aggregation17-NV092(Dream21),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95 x 132cm, 2017.
4 Aggregation15-MA018(Desire4),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51 x 151cm, 2015.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JK(인물)   이미지 제공 PKM 갤러리, 전광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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