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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14

진짜보다 진짜 같은

거짓이 사실을 압도하는 ‘탈진실’의 시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

1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키워드인 ‘탈진실(post-truth)’.
2 브렉시트 국민투표, 미국 대선의 판도를 흔든 가짜 뉴스.

탈진실(post-truth)은 지난 1992년 미국 극작가 스티브 테시크가 처음 쓴 단어다. 주간지 <더 네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레이건 정부가 비밀리에 적국인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이란-콘트라 사건을 정당화하려는 이들과 그것을 믿으려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보고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탈진실의 세상에서 살길 원한다는 결정을 스스로 하고 있다.”
당시 탈진실이란 단어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매년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는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이 2016년을 대표하는 단어로 탈진실을 선택하면서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키워드로 거듭났다. 옥스퍼드 사전은 탈진실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느낌과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 달리 말하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았거나 거짓 정보가 담긴 가짜 뉴스가 여론을 조성하는 데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탈진실화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지난 2016년 브렉시트 결정을 이끈 영국 정치인들은 “EU 멤버십 때문에 매주 3억500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있다”며 국익 손실을 과장한 유세를 펼쳤고, 이는 브렉시트 결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대선 과정 중 도널드 트럼프는 자극적인 발언으로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중 다수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거짓을 말하면서도 굳이 그것을 진실처럼 포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던지는 말을 대중이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마음으로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고 말이다. 사실 가짜 뉴스의 사례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다못해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노래로 만든 <서동요>도 가짜 뉴스의 일종이다. 하지만 오늘날 가짜 뉴스는 이런 ‘입소문’ 정도와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지닌다. 소셜 미디어의 발전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 미디어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에서도 다양한 뉴스를 접한다. 소셜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친구나 지인들과 교류하는 온라인 사교의 장이다. 사용자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최적화되어 있으며, 특정한 관점을 지닌 의견이 사실에 기반을 둔 정보보다 많이 공유된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 그럴듯한 가짜 뉴스가 쉽게 퍼지는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으면 가짜 뉴스는 ‘좋아요’나 리트윗을 통해 기존 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진다.
여기에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꾼’들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한층 심각해졌다. 이들의 존재와 영향력은 지난 미국 대선에서 확인된 바 있다. ‘힐러리 클린턴, IS에 무기를 팔아넘기다’, ‘프란치스코 교황, 트럼프를 지지하다’ 등 미국 대선 결과에 영향을 준 가짜 뉴스를 가장 열심히 퍼뜨린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케도니아의 소도시 벨레스에 거주하는 10대였다. 미국 정계와 아무 관련 없는 이들이 친트럼프적인 가짜 뉴스를 쏟아낸 이유는 간단하다. 클린턴 관련 뉴스보다 트럼프 관련 뉴스가 돈이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의의 가짜 뉴스 사이트를 개설해 황색 언론에서 만든 가짜 뉴스를 퍼 올리고, 이것을 자신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올려 더 많은 사람이 보고 클릭하게 했다. 조회 수가 높을수록 구글의 애드센스 등 자동화된 광고 엔진에서 더 많은 보상을 받기에 혐오나 폭력 등 극단적 코드의 가짜 뉴스를 골라 올렸다. 정식 언론사가 아닌 이들은 평판이나 신뢰도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그래서 가짜 뉴스의 내용이 아무리 비윤리적이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단지 광고가 차단됐을 뿐이다.




3 오늘날 가짜 뉴스는 ‘ 좋아요’나 리트윗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다.
4 작년 1월 ‘페이스북 저널리즘 프로젝트’를 출범한 페이스북은 가짜 뉴스로 의심되는 콘텐츠에 관련 기사를 첨부, 사용자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 해당 기능은 개별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점차 확장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도 가짜 뉴스 확산에 한몫했다는 평가다. 이 알고리즘은 개인의 온라인 활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먼저 보이는 콘텐츠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페이스북을 떠올려보라. 다른 무언가를 찾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자주 교류하는 친구의 소식 혹은 관심 분야의 기사만 보게 된다.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이다. 이는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할 만한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편리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뉴스 콘텐츠와 결합하면 더 심각해진다. 한쪽으로 편향된 뉴스를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특정 이슈에 대한 편견이 강화된다. 그리고 강화된 편견은 알고리즘으로 하여금 좀 더 입맛에 맞는 게시물만 가져오게 한다.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는 확증 편향의 속성을 지닌다. 작년 3월 KISO 포럼에서 건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황용석 교수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확증 편향에 따라 자신의 기존 생각을 강화하는 내용만 선택적으로 골라 공유함으로써 집단 극화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뉴스 정보를 공유하는 데 사실 여부보다 그것이 누구의 입장에 부합하는가가 더 중요하단 얘기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인간의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그 사례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작년 촛불 집회 군중에게 ‘반기문 전 총장 퇴주잔 마시는 영상’이 퍼지고, 태극기 집회 군중 사이에 ‘박영수 특검이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에게 절하는 사진’이 공유되어 자기네끼리 그것을 굳게 믿고 분노한 상황이 바로 그랬다.
소셜 미디어 등 IT 기업은 가짜 뉴스 확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해결책 마련에 나섰다. 특히 미국 대선 기간에 가짜 뉴스의 보급로 역할로 비판받은 페이스북은 작년 1월 ‘페이스북 저널리즘 프로젝트’를 출범했다. 가짜 뉴스로 의심되는 콘텐츠에 관련 기사를 첨부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린 페이지의 광고를 차단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글은 작년 4월 프랑스 대선 기간에 르몽드와 AFP 등 언론사와 함께 ‘크로스체크 프로젝트’를 가동, 이용자들이 신고하는 가짜 뉴스에 대한 팩트 체크를 실시했다. 독일은 올해 1월부터 아예 가짜 뉴스를 지우지 않는 소셜 미디어 기업에 거액의 벌금을 물리는 법안을 시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작년 조기 대선 이후 국회의원들이 앞다퉈 가짜 뉴스 방지를 위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가짜 뉴스와 맞닥뜨리는 건 어쨌거나 우리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처하는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두 가지, ‘이성’과 ‘소통’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 대니얼 J. 레비틴은 가짜 뉴스를 ‘무기화’하는 요인은 대중매체나 소셜 미디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장 큰 위험 요인은 믿음의 강도다. 즉 거짓말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확신하는 데 있다.” 결국 우리는 어떤 현상에 대해 냉정하게 사실을 판단하고, 증거를 통해 결론을 내리는 비판적 사고를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조금은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건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실의 시대와 탈진실의 시대 중 어디에 살지, 선택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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