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마이어, 백색 건축 미학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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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0

리처드 마이어, 백색 건축 미학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미학을 계승한 솔올미술관이 강릉에 개관한다.

솔올미술관은 리처드 마이어의 순수한 백색 미학과 간결한 형태가 자연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했다.

미술관 건축은 미술관의 이상을 의미한다. 미술관은 미술을 담는 공간이지만 미술관 건축은 그 자체로도 예술이다. 어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지, 어떤 전시를 기획하는지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미술관의 첫인상은 건축에서 비롯한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대한 기억에서도 건축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루브르는 유리 피라미드, 뉴욕의 구겐하임은 나선형 계단, 퐁피두 센터 하면 외부로 노출된 설비 시설이 떠오를 정도로 미술관에 대한 기억은 곧 미술관 건축에 대한 기억이다.
더불어 예술성, 기능성, 상징성, 공공성 등 다양한 측면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 미술관 건축이다. 그런 만큼 건축가에게 미술관 건축은 큰 도전이지만, 또한 건축가 개인이 일생 동안 맡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프로젝트일 것이다. 미술관 건축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최고 권위,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는 건축가에게 맡기지만 미술관 건축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건축가는 손에 꼽힐 정도다. 지난 세기 미술관 건축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낸 건축가는 ‘백색 건축’의 거장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 1934~)다.
1984년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한 마이어는 은퇴하기 전 10개의 미술관을 지었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 미술관으로 애틀랜타 하이 미술관(1983),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관(1985),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1995), 로스앤젤레스 게티 센터(1997) 등이 있으며, 2024년 2월 강릉에서 개관을 준비 중인 솔올미술관(Sorol Art Museum)은 마이어의 건축디자인과 철학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Meier Partners)의 작품이다.





솔올미술관은 리처드 마이어의 순수한 백색 미학과 간결한 형태가 자연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했다.





독일의 작은 마을 롤란트제크의 숨은 보석과도 같은 아르프 미술관. ©Shutterstock

마이어 건축의 트레이드마크는 ‘백색’이다. “백색은 모든 색 중에서 가장 탁월한 색이라고 생각한다. 무지개의 모든 색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I think white is the most wonderful color of all, because within it one can find every color of the rainbow).”
백색에 대한 그의 고집은 그 색의 ‘절대성’ 때문이다. 백색은 건축의 순수한 시각적 형태를 드러낼 뿐 아니라 마이어가 추구하는 건축 철학을 명확히 보여준다. 백색은 모든 기하학적 형태의 미학적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무엇 하나 더하거나 덜할 것이 없는 정갈함과 명료함. 백색과 간결한 선 그리고 형태의 완벽한 조응은 마이어 건축의 고유한 ‘백색 미학’이다.
마이어를 상징하는 또 다른 건축 요소는 유리 파사드. 마이어 건축의 보임새를 지배하는 것은 정렬한 백색 패널과 거기서 파생된 격자형 그리드다. 반복되는 사각 패턴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자칫 과도해 보일 수 있는 엄격함은 유리라는 투명한 재료를 접목함으로써 변주해 한층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큰 유리창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마이어의 공간 철학에서 비롯했다. 그는 지속성과 연결성을 강조한다. 공간과 공간의 연결성, 공간과 사람의 연결성, 주변 환경과 건축의 연결성 등 연결성에 대한 마이어의 건축적 해석은 항상 흥미롭다. 특히 연결성은 미술관 건축의 본질과 밀착된 문제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미술과 미술, 미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런 재료적 특징, 형태적 특징과 함께 마이어 건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조형 요소가 빛이다. 공학적 기술이 건축을 완성한다면, 빛은 건축을 미학적으로 완결 짓는다. 빛은 마이어의 백색 건축에 변화와 움직임을 부여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은 건축 공간 곳곳에 스며들어 예상치 않은 움직임을 유발하는 동시에 절제된 조형미를 극대화한다.
마이어의 미니멀한 백색 건축은 얼핏 주변 환경을 압도하거나 지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넓은 시야로 주변 환경과 함께 마이어의 백색 건축을 관찰하면 건축과 주변 환경이 얼마나 엄밀하게 조화를 이루는지 알 수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 롤란트제크의 아르프 미술관(Arp Museum)이 좋은 예다. 2007년 문을 연 이곳은 숨은 보석과도 같은 마이어의 걸작이다. 그 아래로 1858년에 지은 옛 기차역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을 통해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다. 마이어의 건축은 비탈진 숲속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라인강 건너편에서 미술관을 바라볼 때 전체 이미지가 한 편의 풍경화처럼 조화로이 시선에 들어온다. 전경에 라인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뒤로 신고전주의풍 19세기 기차역 건물이 서 있다. 울창한 숲이 배경으로 펼쳐진 가운데 마이어의 백색 건축이 말 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지형과 자연환경, 기존 건물과 새로운 미술관이 섬세한 건축가의 감각으로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푸른 하늘이 자연과 건축을 하나로 엮는다. 인구 500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 이처럼 아름다운 미술관이 있다니, 그저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미국 애틀랜타를 대표하는 하이 미술관의 아름다운 백색 건축. ©Shutterstock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센터. ©Shutterstock

옛 건물을 통해 미술관에 입장하면 긴 터널을 지나게 된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동선이 짜여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 순식간에 창밖으로 라인강이 낮고 넓게 펼쳐진다. 그제야 알아차린다. 우리가 마이어의 백색 건축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밖에 시간과 공간을 이동한 듯한 낯선 경험이다. 여기서 마이어의 건축 경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통로에 들어서게 된다. 왼쪽으로는 전시실, 오른쪽으로는 간이 전망대로 이어지며 연결성과 개방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아르프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기존 미술관이 지켜온 공간 어법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최대한 중립적으로 보이도록 건축적 개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온 어법이다. 그래서 벽면을 하얗게 칠한 전시 공간을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고 불렀다. 이곳에서는 전시 공간의 건축적 중립성이라는 규칙을 깼다. 또 공간과 공간이 분명히 분리되어 있어 개별 공간에 독립성이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르프 미술관은 하나의 층이 하나의 전시실처럼 열려 있다. 공간과 공간의 엄격한 경계 대신 자연스럽게 연결된 듯 하나의 섹션에서 다음 섹션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경직된 공간 구분은 없지만 마이어 건축 특유의 가늘고 둥근 기둥이 동선의 방향을 이끈다. 전시장의 탁 트인 공간감은 수평적으로 열린 시선 못지않게 수직적으로 층과 층을 아우르는 방식을 통해서도 부각된다. 2개 층으로 이어지는 높은 벽면과 한 층과 다음 층을 연결하는 계단실 역시 구조적으로 열려 있어 수직적 개방감을 드높인다. 마이어 건축의 숨은 연출자는 역시나 아낌없이 사용한 유리창이다. 밖으로 낸 넓은 창은 물론이고 벽과 벽 사이 이음매 곳곳으로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좁고 높은 창을 디자인했다. 전시 공간에서 빛의 건축적 해석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전시장의 빛은 작품의 분위기는 물론 전시의 느낌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다. 과거에는 자연광을 최대한 차단하고 인공조명으로 전시장을 연출했다. 최근 들어서는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해 전시 공간의 조도를 적절히 확보하고 인공조명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방식으로 빛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옛 기차역으로 들어가는 아르프 미술관의 아름다운 전경. ©김석모





솔올미술관 역시 아름다운 자연광이 미술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이 빛을 발한다.

벽을 대신한 넓은 창과 하늘로 열린 천창을 통해 자연광을 받아들이는 아르프 미술관의 전시실은 감상자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눈의 편안함은 정제된 자연광의 최대 장점이다. 물론 위험성도 있다. 자연광의 특성상 빛의 균질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너무 강한 빛도, 너무 약한 빛도 작품 감상에 적합하지 않다. 무엇보다 걸러지지 않은 빛이 작품에 직접 닿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 지속적이고 강한 자연광은 작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위험 요소를 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외부의 빛을 차단하고 인공조명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마이어의 전시 공간은 건축가의 고집스러운 신념을 꺾지 않으면서 빛의 미학적 가치를 지켜낸다. 대신 정밀하게 전시 공간의 빛을 계산해 건축구조적으로 해법을 마련하고 보조 장치를 적극 활용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차단한다.
기존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외부와의 연결성을 극히 꺼리는 경향을 보인다. 외부와의 연결성과 외부로의 개방성은 미술관에서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보안, 작품 감상의 집중력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다. 반면 마이어의 전시 공간은 지속적으로 외부와의 연결을 시도한다. 단절을 통한 인위적 집중이 아니라, 미술 본연의 미적 감각이 발현되도록 미술·자연·환경·사람의 관계를 열어주는 개방된 공간을 지향한다. 이런 건축 철학을 적용한 것이 밖으로 열려 있는 넓은 창문, 그리고 전시장에서 외부로 나가 자연을 조망할 수 있는 발코니다. 기본적으로 마이어의 건축에서는 자연에 대한 시선을 강조한다. 발코니는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일종의 경계 공간으로 특별한 건축과 자연에 대한 다른 차원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도시 강릉에선 현재 마이어의 건축 디자인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의 솔올미술관이 개관을 기다리고 있다. ‘솔올’이라는 이름은 미술관이 자리한 지역의 옛 이름으로, ‘소나무가 많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솔올미술관의 건축 역시 마이어의 순수한 백색 미학과 간결한 형태가 자연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했다. 솔올미술관은 국내 미술관 최초로 추상미술을 집중 조명할 계획이며, 한국 미술과 세계 미술이 만나는 미학적 담론의 장이 될 것이다. 개관전으로는 공간주의 운동을 일으킨 이탈리아 작가 루초 폰타나 개인전이 준비 중이며, 캐나다 출신 미국 작가 애그니스 마틴 개인전이 이어질 예정. 이 같은 미술관의 방향성을 충분히 건축에 녹여내기 위해 계획 단계부터 긴밀한 논의를 이어왔다. 미술을 매개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솔올미술관의 비전이 장소와의 관계성,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마이어의 건축 철학으로 조화롭게 시각화되어 우리나라 미술관 생태계에 의미 있는 좌표를 찍길 바란다.

 

에디터 이소영(프리랜서)
김석모(솔올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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