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미술관에서 만나는 서혜영 작가 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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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09

성곡미술관에서 만나는 서혜영 작가 전

스무해가 넘는 시간을 오롯이 정리한 서혜영 작가 개인전.

서혜영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2002년 제21회 석남미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 이후 벽돌을 모티브로 공간을 탐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서혜영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더현대 서울, 용인시민체육공원, DMZ 등 다양한 공간에서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1층 전시장에 선 서혜영 작가. 뒤편 벽면에는 ‘Ubiquitous 3’(2003) 연작이 걸려 있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설치 작품은 ‘남겨둔 가지 (Prolongement)’(2023)이다.

한 중견 작가에게 작가로 살아온 20년이라는 세월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감히 짐작건대 수많은 영감과 번뇌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궤도에 올랐을 테고, 이즈음 문득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부단한 창작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향후 작업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모색하는 기로에 서 있을지도. 서혜영 작가의 지난 20년과 현재의 모습도 그렇다. 그저 평범할 수도 있는 현실에서 수없이 부딪히며 탐구하고 실험하기를 거듭해왔다. 성곡미술관에서 6월 18일까지 열리는 <노드: 하나의 전체>전에서 그녀의 2003년 이후 작품을 되짚어보며 그가 구축해온 일상과 예술을 넘나드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완연한 봄을 뒤로하고 초여름의 길목에 선 성곡미술관 2관에는 3개 층에 각기 다른 매체로 표현한 작품이 펼쳐져 있다. 스무 해 동안 제작한 다양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이기 좋다는 점 외에도 특정 공간에 따라 형태감과 느낌이 달라지는 그녀의 설치 작품에 특별한 미감을 부여하기에 손색없는 건축적 구조를 지닌 장소다. 각 전시장의 벽면, 천장, 바닥 등에 놓인 작품은 조각부터 설치, 평면 작업에 이르기까지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드는 각기 다른 구조와 형태를 띠지만, ‘벽돌’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공간’을 탐구한다는 공통점이 내재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이렇듯 20년간 이어온 작업의 연결점을 찾아보고자 하는 유의미한 자리다.





2층 전시장 전경. 기둥으로 공간감을 더한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의 ‘ectype’ 연작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전병철

1층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그녀의 초기작 중 하나인 회화 연작 ‘Ubiquitous’. 종교적 도상 ‘수태고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재해석한 평면 작품이다.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 밀라노의 브레라 국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미술사로 논문을 쓴 그녀는 젊은 시절 그 역사적 작품들을 보며 그 안에서 현대 문화에도 통용되는 상징적 메타포를 발견했다. “인류를 설득하기 위한 하나의 완벽한 프레임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순수성을 상징하는 백합처럼, 메타포를 통해 표현한다는 점에서 모든 문화가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죠. 미학 수업을 들으면서 미술과 음악, 문학 등이 다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신화적 서사에서 비롯한 영감을 담아 캔버스에 흑연 연필로 무수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완성한 작품은 켜켜이 쌓은 벽돌의 형상으로 2차원 공간에 내재된 독특한 공간감을 드러낸다.
그녀는 작업 초기부터 10년간 해온 평면 작업이 쉽지 않다고 했다. 회화는 회화만의 문법이 따로 있고, 공간 안에 놓일 때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입체 작품에 비해 평면과 오롯이 맞서야 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잘 모르고 시작한 대형 회화 작업을 되돌아본 뒤, 그녀는 요즘 마치 일상을 기록한 도감처럼 작은 사이즈의 화폭에 섬세한 점과 선으로 묘사하는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다. 1층을 비롯해 2층과 3층을 잇는 계단 벽면에 걸린 ‘물질도감’이 바로 그런 생각에서 연유한 드로잉 연작이다. 반투명한 종이에 색연필로 그리고, 굴절된 유리로 레이어를 더한다. 각각의 레이어는 경계인 동시에 연결점으로 기능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 안의 물질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언젠가부터 일상 속 단순한 사물에도 고유한 시간성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딱히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이를테면 식물의 씨앗 같은 미상의 물질이죠. 혹은 일상의 어떤 도구이기도, 신체의 일부이기도 해요. 이 작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저만의 도감집을 만들고 싶어요.”
2층 전시장의 테마는 ‘긴밀한 경계’. 안과 밖, 분리와 결합처럼 서로 대립하고 구분되는 두 항의 경계가 사실은 얇은 막에 불과하다는, 관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반영한 ‘ectype’은 철(스틸)로 만든 연작이다. 경계를 나누면서도 브릭 패턴의 틈새로 비치는 색색의 면은 서로 중첩되며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한 그림자 효과로 새로운 공간감을 형성한다. 3층 전시장에는 ‘가능성 있는 모든 결합’이라는 소주제를 붙였다. 삼각형과 사각형 등 작은 유닛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확장해 예술 작품의 일상 속 실용적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특별한 도구 없이도 이 유닛들을 조립할 수 있는 사용설명서를 전시장 입구에 붙여놓았고, QR코드를 스캔해도 3D로 구현한 모델링을 볼 수 있어요. 각각 하나의 스컬처 설치 작품이지만 접고 펼치는 형태에 따라 입체적 벤치나 파티션, 카펫, 조명이 되기도 해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기능성과 인테리어 효과도 부여할 수 있죠.” 단순한 도형이 각각 다른 결합을 통해 다양한 형태감의 유연한 변주를 보여주며 시각적 리듬감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도출해낸다. 이 또한 벽돌 형상의 유닛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는 작업의 맥락을 이은 작품이다.





3층 전시장의 천장과 기둥, 바닥을 활용해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의 묘미를 보여준 ‘isola project’(2023).

브릭 패턴 작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시도한 첫 작업은 1층 전시장에 설치한, 황동과 비즈왁스 등으로 다채로운 재료의 스펙트럼을 활용한 대형 행잉 설치 작품. 2019년 프랑스 파리 시테의 레지던시에서 구상한 작업의 연장이다. “보통 한국에서는 어느 시기가 되어 나무를 전지할 때 ‘쳐낸다’는 의미로 ‘가지치기’라고 표현하는 반면, 프랑스에서는 ‘연장’의 의미로 프롤롱주망(prolongement) 이라는 표현을 써요. 원예 과정에서 식물이 뻗어나갈 수 있도록 가지를 연장해 ‘남겨둔다’는 의미죠. 결과는 같지만 접근 방식이 다른 사고의 전환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나무 밑,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는 대체 어떤 시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죠. 그런 사유를 담아 우연히 을지로 철물점 거리에서 발견한, 오래전 쓰임을 다하고 남은 황동을 모아 작업했어요. 이 미술관 공간에 어우러지는 형태를 구현하며 황동이 간직한 시간과 공간을 연장시킨 작품입니다.”
벽돌이라는 창작 어법으로 일관된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다채로운 재료와 매체를 통해 표현해온 서혜영 작가는 20년간 작업을 되돌아보며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항상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 벽돌 또한 사각의 어떤 틀에서 반복적 형태로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뭔가를 하고 그게 쌓이다 보니 그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학교 강의 같은 활동도 하지 않는 전업 작가예요. 아침에 작업실 가서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그래서 스스로 그저 아트가 직업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작업을 계속해왔어요. 작업 시간 자체가 하나의 돌파구였고, 굉장히 귀중한 시간이었죠. 그저 묵묵히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해온 것 같아요.”
그렇게 20여 년을 보낸 서혜영 작가는 50대 중반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본게임이라고 말했다.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도 일흔 중반이었으니까요. 그 작품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평소 인왕산 쪽을 보면서 ‘인왕제색도’를 그릴 때 겸재의 마음을 짐작해보며 이런 생각을 해요. ‘진정한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번 전시는 그런 시간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별개의 것이지만, 가지처럼 어떤 지점에 접점이 존재하며 그 하나가 전체인 것처럼 연결되는 작업. “나에게서 비롯해 연장되는 가지, 분화하는 사건의 지점”이라는 노드에 대한 작가의 해석처럼 또 하나의 가지가 향후 20년, 아니 그 이상으로 연장될 창작의 세계를 담아 뻗어나가고 있다.

 

에디터 이정주(jilee@noblesse.com)
사진 안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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