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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0

시간의 농도

김현희 수석 경매사가 옥션 현장에서 보낸 17년의 시간.

미술품 경매 현장에 가본 적이 있는지. 호가에 따라 응찰자들이 바쁘게 패들(paddle)을 드는 모습은 스포츠 경기 같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치열한 경합 끝에 낙찰자가 정해지면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내가 작품을 산 게 아닌 데도 묘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 모든 분위기를 만드는 건 경매사들. 연이어 호가를 외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도 열기가 과열되는 것 같으면 적절히 완급을 조절하는 이들의 노하우에 따라 흥행이 좌우된다. 김현희는 이 일을 15년 넘게 해온 한국 미술품 경매의 산증인이다.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녀는 2005년 서울옥션 인턴사원으로 입사, 미술품 경매팀을 거쳐 경매사로서 서울과 홍콩을 오가며 150회 넘는 경매를 진행해왔다. 미술계 한가운데서 그 변화를 경험하고, 또 주도해온 그녀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또 그 변화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얻었을까.





몇 년 사이 한국 미술 시장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고, 미술 투자 열기가 유례없이 뜨겁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세계적으로도 1·2차 미술 시장 규모가 커지는 추세입니다. 특히 지난해를 기점으로 컬렉터층이 밀레니얼 세대로 확장된 걸 체감하고 있어요. 미술 시장 저변 확대와 함께 국내 작가들을 해외에 더 많이 알리고, 미술 시장에서 수요를 늘리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밀레니얼 세대 컬렉터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미술 작품을 감상 대상이자 투자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취향 영역에서도 기성 컬렉터와 차이가 있죠. 다양하고 자유로운 표현, 세계관을 지닌 동시대 작가들을 많이 찾습니다. 최근 몇몇 블루칩 작가들이 혜성처럼 미술 시장에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경매에 앞서 출품작을 선정할 때 기준과 절차가 궁금합니다. 현재 미술 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작가 위주로 작품을 모으는 편이에요. 중견 혹은 원로 작가의 경우 연대별로 작품 스타일이 다릅니다. 어느 시점에 어떤 작품을 선보이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한 작가의 작품이 단기간에 소비되지 않도록 밸런스를 맞추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내부적으로 여러 번 회의를 거치는데, 그 과정은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가장 흥미로운 일은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와 시장적 가치에 대한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이고요.
김환기나 김창열 등 세계 미술 시장에서 먼저 주목받은 몇몇 작가 외에도, 세계 무대에서 잠재성 높은 국내 작가들을 널리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몇 년 전 단색화 작가들이 주목받으면서 작품 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홍콩 경매에서 이들의 작품을 찾는 비중은 국내 컬렉터보다 해외 컬렉터가 더 높았고요. 유럽, 미국, 아시아에 걸쳐 국적도 다양했습니다. 특히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의 ‘우주’가 한국 작품 최초로 100억 원 넘는 낙찰가를 기록한 ‘사건’은 세계의 이목이 한국 미술계로 다시 한번 집중되는 모멘텀이었습니다. 지금도 국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좋은 작가들을 해외에 알리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며, 이들의 작품으로 홍콩 경매를 재개할 예정입니다.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을 맞이한 지도 3년이 되어갑니다. 위기를 딛고 일어선 미술 시장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코로나19는 여러 이유로 미술 시장 규모가 팽창하는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밀레니얼 세대가 미술 시장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새롭게 발굴한 작가들이 미술 트렌드를 그려가고 있고요. 최근 흑인 작가나 여성 작가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미술 시장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미술 시장이 백인 엘리트 작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면, 지금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단계에 접어든 거죠. 아직 세계 무대에 오르지 못한 한국 작가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 미술계가 함께 노력하면 뜻깊은 성과를 일궈낼 수 있을 것입니다.
17년간 수많은 옥션 현장을 경험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우선 떠오르는 건 김환기 작가님의 ‘달밤’이에요. 한국전쟁으로 그림통 하나 메고 피란길에 오른 힘든 시기에 완성한 작품이죠. 피란 시절 작품은 드물지만, 이 작품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작가님의 화풍이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하거든요. 그 때문에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까 봐 경매 출품을 망설였지만, 추정가의 두 배 넘는 가격에 낙찰되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2018년 이중섭의 ‘황소’가 낙찰되는 순간에도 경매사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2010년 최고가를 기록했고, 2018년 그 기록을 다시 한번 갱신했는데요. ‘황소’의 경우 남아 있는 작품 수가 적습니다. 2018년 옥션 당시에는 시작가가 20억 원이었는데, 2010년 낙찰가인 35억 원을 넘어 패들이 올라갈 때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국 미술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죠. 작품은 47억 원에 낙찰되었고, 이중섭 작가님에게 최고가 작품을 만들어드릴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귀한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낙찰자, 언더비더(underbidder)분들에게도 감사했고요. 한국 미술 시장이 어느새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활약도 기대됩니다. 일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요? 좋은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기쁨을 느낍니다. 그 작품에 담긴 사연을 알아갈수록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요. 작품을 조우하고 기록을 만들어가는 것은 곧 제 삶이기도 합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진행 김미영
사진 김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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