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정물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물화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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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9

기존 정물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물화

정수영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단순히 '정물화'로 규정짓기를 거부한다.

Her New Livingroom, Acrylic on Linen, 150×120cm, 2021

팬데믹 상황은 전 세계인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놨다.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삶이 나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작업 세계를 전체적으로 전복한 작가가 있다. 바로 정수영 작가다. 대학 시절과 20대 후반까지 작가는 ‘만다라적’ 특징이 보이는 꽉 찬 화폭을 선보였다. “2009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서 가족끼리 경상도 통도사에 자리한 극락암이라는 암자에서 천도재를 계획했죠. 그 전까지 불교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그런 종교적 행사가 무척 충격이었어요. 2년간 매달 한 번씩 치르는 천도재는 가족사와 가정, 중요한 분을 잃었다는 상실감, 내면을 억누르던 개인적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출구로 느껴졌어요.” 이를 계기로 시작한 만다라 회화에는 빈틈이 조금도 없다. 작가는 캔버스 공간을 빽빽하게 채우는 행위를 일종의 ‘수행’으로 상정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림이 편안하진 않아요. 어떤 이들은 공격적이라고 느낄 정도였죠. 과녁처럼 돼지머리를 정중앙에 배치한다든지, 해골이 등장한다든지 아무튼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도 그럴 것이 작가 개인의 불안에서 출발한 작업에 신화나 제의, 죽음, 내세 등 인간사의 다양한 면모를 작품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불현듯 작가는 붓을 놓았다. 2년 정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때는 작가로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술이 운명이었던 걸까.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 작가는 낯선 나라에서 다시 한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서른이 넘어서야 부모님에게서 독립했어요. 그동안은 스스로 일상적인 것을 결정할 일도, 이유도 없었죠. 이후 치약부터 세제 향까지 무엇이 내 취향에 맞는지 등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다시 붓을 잡으니 이러한 일상적 고민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죠. 타지에서 새로운 시작과 함께 그림 인생도 완전히 리셋하는 기분이었어요.” 자신의 예전 그림을 돌아본 작가는 문득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화면에 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는 그림은 여백을 살리고 조금이나마 ‘쉼’을 담아보고자 했다. “꽉 찬 그림을 그리다 여백을 남기려니 왠지 미완성 같았어요. 여러 방법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다시 제가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천도재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상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리넨을 캔버스 삼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섬유조직이 배경처럼 보이니 여백이 있어도 미완성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후에는 쭉 리넨에 작업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리넨 회화는 한 가지 더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왔는데, 바로 ‘동양화적 화폭’이다. 우리가 정물을 그린 그림을 유독 친숙하게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작품 속 대상이 일상적 사물이라는 점뿐 아니라 화면구도와 천의 재질도 한몫하는 셈이다.





Full of Choice 2(gin), Acrylic on Linen, 50×200cm, 2020

작가는 이번 전시의 메인 작업으로 ‘Her New Livingroom’을 소개한다.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서 영국에 사는 언니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낼 기회가 없었는데, 서른이 넘어 함께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죠. 사실 이 작품을 하기 전 언니의 방을 그린 적이 있어요. 그때는 의자도 돌려놓았고, 주변 물건도 그리 많지 않았죠. 신작은 돌려놓은 의자가 다시 관람객을 향해 있어요. 반려견을 막 키우기 시작해 관련 소품도 여기저기 널려 있죠. 언니가 수경 식물에 관심을 보이면서 집 안에 화분이 늘어난 상황도 반영했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여자는 일정 나이가 되면 모성애가 폭발하며 뭔가 성심성의껏 기른다고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식물과 반려견을 기르는 데 힘을 쏟는 우리 모습이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요.”
이 지점에서 정수영 작가의 작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보려 한다. 바로 정물화에 대한 논의다. 아무래도 화면 곳곳에 정물이 흩어져 있기에 관람객은 그녀의 작품을 정물화로 인식한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그렇게 규정짓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소재가 정물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Her New Livingroom’처럼 저를 포함한 누군가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제 작업에 더 중요한 부분이긴 하거든요. 또 개인적으로 제 작업이 정물에 집중하기보다 사물 간 관계를 확인하며 그 공간을 읽어가는 프로세스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한 작품에 가져오는 사물 하나하나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사물, 즉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큰 맥락을 만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실 정물화에서 가장 핵심 기법은 ‘트롱프뢰유’라고 할 수 있다. 정지된 사물을 실제인 것처럼 빛과 그림자의 한 시점을 정해 그리는 기법이다. 하지만 정수영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면 바닥과 벽의 경계가 없고, 그림자도 있다가 없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 있는 등 중구난방이다. “공간을 그림으로 읽을 때 실존 법칙이 제 그림에 꼭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실재하는 공간이지만 그림이 되면 다른 공간으로 변모하는 거죠. 그래서 정물이 그림 내부에 있는 것 같다가 그림 위에 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관람객에게 다양한 시각적 유희를 선사하는 것 같아요.” 이렇듯 언뜻 보면 단순한 정물화로 읽히는 그림에 정수영 작가는 많은 생각을 투영한다. 결국 그녀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을 수 있는 사물을 다르게 보려는 그녀의 시각이 아닐까.





Good morning, Acrylic on Linen, 120×120cm, 2020
parcels, Acrylic on Linen, 120×120cm, 2021
A Slice of quarantine(life), Acrylic on Linen, 90×85cm, 2021
Addiction, Acrylic on Linen, 120×120cm, 2021






1987년생인 정수영 작가는 2012년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회화판화과를 전공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화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2018년 왕립예술대학교에서 다시 한번 회화를 공부했다. 런던의 새클러 빌딩, 스페이스 갤러리, 힉스 갤러리, 사치 갤러리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2018년에는 한국 해담하우스에서 열린 협동작전 주최의 [Solo Show]전에 학고재 갤러리와 함께 참여하였다. 현재 런던을 베이스로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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