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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30

덜어냄의 미학

최근 몇 년간 그림자처럼 미술 작품을 따라다니던 캡션의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 중인 [올해의 작가상 2020]전에서 김민애 작가는 벽면 한쪽에 작품 캡션을 모아서 소개했다.

평소 좋아하는 회화 작가가 전시를 연다고 해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전시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QR코드 기기.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다. 전시장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입구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뭘까? 전시 서문, 작품 위치와 함께 상세히 정리된 플로어 플랜이다. 한 장 챙겨서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롯이 작품에 집중해 감상하다 숨이 턱 막히는 작품 하나를 발견한 뒤 플로어 플랜에서 열심히 작품 정보를 찾았다. 아! 이 작가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약간의 이질감 역시 마음에 든다. 역시 영민한 작가라는 생각과 함께 기분 좋게 전시장을 떠났다. 요즘 에디터의 전시 관람 루트는 대개 이렇다. 전시를 보고 어떤 작품이 왜 인상적인지 감상을 자연스럽게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작품 옆에 붙어 있는 작가와 작품의 정보를 읽느라 정작 작품에 집중하지 못했다. 전시장을 나서면 남은 건 작품보다는 작가와 전시에 대한 정보였다. 그런데 요즘은 현대미술 전시 풍경이 바뀌고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다소 불필요하다 여겨지는 캡션 정보를 따로 정리해 제공하는 것. 작품과 플로어 플랜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일대일로 맞춰봐도 되지만, 오히려 정보는 하나도 모른 채 작품만 감상하는 것으로 관람을 마무리해도 무방하다. 작품의 캡션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위쪽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다양한 설치 방법이 도입되면서 캡션을 플로어 플랜이나 브로슈어로 만들어 관람자의 감상을 돕는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하나의 사건]전에 출품한 구민자 작가의 ‘짱구의 세상’.
아래쪽 Photo by Scott Shaw Photography.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2017년 선보인 ‘ARTLens’. 터치스크린을 통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먼저 흔히 보는 캡션은 기본적으로 작가의 이름, 작품명, 작가의 출생과 사망 연도, 작품을 만든 연도, 매체를 비롯한 소장처 등 작품에 대한 기본 정보를 소개한다. 캡션의 출현은 소장품 기술 지침서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라는 공공 기관이 생겨나고, 체계적으로 작품을 정리하기 위해 소장품 지침이 마련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로 이를 정의할 것인지 논의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이해력을 고취하고, 관람객의 생각을 환기함으로써 공공의 취향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었기에 전시를 개최할 때 기획 의도와 출품 작품에 대한 정보를 잘 ‘전달’하는 일은 기관으로선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캡션은 가장 쉽고 빠르게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전시를 개최할 때 관람객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이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출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보는 내 손 안의 작은 디바이스를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 미술관과 박물관은 교육적 목적보다는 ‘경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감상에 방해가 되는 전시장의 불필요한 요소를 최대한 걷어내고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작품과 ‘나’ 사이의 개인적 느낌을 촉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요즘 전시는 관람객 개개인의 독특한 경험에 좀 더 초점을 맞춰 전시 공간을 디자인한다. 캡션의 유무와 모양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중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플로어 플랜과 브로슈어인데, 요즘은 ‘종이’가 폐기물이 되기도 하기에 실용성과 간편성은 물론 환경적 부분까지 고려해 QR코드를 적극 활용하는 기관이나 갤러리가 많다. QR코드 활용은 조금은 단편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플로어 플랜의 한계를 깨는 방편으로, 많은 전시 기획자가 선호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디자인과 김용주 기획관은 이렇게 말한다. “전시를 본다는 행위엔 사실 여러 요소가 내재돼 있어요. 작품 감상이 전부가 아니죠. 전시장 가는 길에 마주하는 풍경에서 느끼는 감각, 그것이 그날의 전시장 분위기와 조우하면서 촉발하는 또 다른 감각이 작품과 시너지를 내면서 하나의 경험으로 관람자에게 남게 되는 거예요.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사들도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교육적 면모를 부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경험 촉발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 전시 기획 단계에서 결정해야 하죠.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작품 정보를 벽 한쪽에 몰아서 정리하거나, 플로어 플랜을 만들거나, QR코드를 사용하는 등 최대한 단순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 아트스페이스 언주라운드. 아트스페이스 언주라운드 개관전 [크랙: C-R-A_C-K]의 전시 전경.
전시장 바닥에 적힌 작가의 이름과 플로어 플랜의 작품을 맞춰볼 수 있다.

이 같은 변화가 큰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특히 작은 갤러리나 대안 공간은 전시의 특성상 작품마다 캡션을 달기 어렵다. 얼마 전 논현동에 새롭게 문을 연 비영리 공간 아트스페이스 언주라운드 천수림 부관장은 “개관전 <크랙: C-R-A_C-K>에 출품한 작품은 평면, 설치, 영상 등 장르가 다양하기에 캡션 배치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평면의 경우 옆에 배치하면 그만이지만, 공간을 가로지르는 설치 작업은 조금 애매하죠. 그걸 찾으러 다니느라 감상 포인트를 놓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바닥에 작가의 이름만 드러내고 나머지 정보는 플로어 플랜과 QR코드를 활용해 따로 찾을 수 있도록 전시를 디자인했습니다”라며 공간에 따른, 혹은 작품 배치에 따른 캡션 배치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관람객 역시 변화된 캡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캡션이 없어도 누가 만들었는지 단번에 알아보는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선입견 없이 작품 그 자체를 느끼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아요.” 작품과 ‘나’ 사이의 다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면서 작품의 민낯이 드러났고, 개인의 상상과 감성적 추리력이 감상하는 데 좀 더 중요해지면서 이러한 캡션의 변화는 긍정적 피드백을 낳고 있다. 종합해보면 캡션은 단순히 시대적 변화보다는 전시와 공간의 특성이나 방문자의 관람 형태, 시대와 기술 발전에 따른 생각의 확장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라는 ‘상황’마다 어떤 방법이 공공의 이용자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 또 개인화되는 전시 관람 형태와 경험을 어떻게 만들지, 지금도 학예사와 큐레이터, 전시 디자이너들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 중이다. 앞으로는 전시장에서 캡션을 통해 누구의 작품인지, 작품 의도가 무엇인지 찾기보다는 ‘나’와 작품 사이의 공간을 오롯이 자신의 느낌으로 채워보는 것은 어떨까.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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