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보통의 집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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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9

작은 보통의 집

자연과 사람의 공간 사이에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지은 간결하며, 인간적인 집이 숨어있다.






베를린 동쪽의 중심 하케셔마르크트에서 트람 M5를 타고 북쪽으로 30분쯤을 달렸다. 베를린 북동쪽 오버제(Obersee)라는 호숫가에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지은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모더니즘이 가장 낙관적이었던 시대에 지어진 집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규모를 가진 채 늘어서 있는 조용한 동네를 걷는다. 가장 풍요로우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공고한 미덕인가.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소박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독서를 하며 긴 밤을 보내고, 주말이면 정성껏 정원을 가꾸며 세상에 헛된 시비를 걸지 않을 것 같은 성실한 일상, 어쩐지 이 동네의 독일인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근사한 집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미스 반 데어 로에 하우스(Mies van der Rohe Haus)라는 문패가 달린 집 앞에 도착했다. 라벤더가 무릎까지 단정히 피어오른 입구를 따라 걸어가니 붉은 벽돌의 L자형 단층집이 정갈하게 반긴다. 미스 특유의 단순성과 견고함이 간결하게 표현된 구조였다. 명쾌한 공간 구획과 천장에서 바닥(Ceiling to Floor)으로 이어지는 유리창은 내외부의 경계를 무색하게 했다. 키 큰 초록 나무들과 들풀, 무리지은 라벤더의 넘실거리는 풍경이 맑은 하늘 아래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따금 저 유리문을 열어 두면 자연과 인간의 공간 사이의 모든 경계는 사라지게 되는 걸까?






베를린에서 아트 비즈니스를 했던 카를 렘케(Karl Lemke) 부부는 1932년 건축가 미스에게 ‘작은 보통의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부부는 1945년까지 이 집에서 평범하고 우아한 일상을 보냈다. 지금은 비어있는 흰 벽엔 아마도 부부가 모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직접 디자인한 마호가니 옷장과 책장, 렘케 부부가 컬렉션 했던 거실의 가구들은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만 겨우 남아 있었다. 가구도 사람도 사라진 이 공간이 마치 광활한 자연 속에 그려 놓은 가느다란 드로잉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이 집의 공간적 미학을 맥락으로 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턱 없는 문을 열고 나와 호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저 멀리 물이 보이는 지점부터 지형은 작은 구릉으로 바뀐다. 선베드를 펼쳐놓고 곧장 호수로 달려가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던 시절은 역시 작은 흑백 사진 속에만 존재하고, 이제는 호수로의 진입을 금지하는 팻말과 그물이 드리워져 있다.
이 집은 미스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독일에 지은 ‘주택’건축이다. 영어도 못하는 채로 미국에 건너가 대도시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버릴 건축가의 소박한 방점 같은 것이었을까. 광활한 스케일의 빌딩을 선견한 듯 예술과 자연을 사랑하는 부부를 위한 인간적이며 간결한 집, 건축에 있어 그토록 가차 없던 미스의 내면에도 이렇듯 정겨운 면모가 있지는 않았을지. 이 집에 담긴 미스 특유의 재료와 디테일에 대한 집착 그리고 단순성에 대한 모색 역시 한결 따듯하고 부드러운 스케일로 마감된 듯 느껴졌다. 한여름, 반바지 수영복 차림으로 한껏 나른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집주인 렘케의 사진을 보고는 ‘나도 이런 집에 살고 싶다’는 구체적인 바람이 절로 피어올랐다. 비록 미스는 이 세상에 없지만, 어쩐지 실현가능한 몽상으로 다가왔다. 다만 어딘가에 숨어 있을 나만의 호수를 먼저 찾아야만 한다는 복병은 잊은 채였다.

 

글, 사진 박선영
에디터 이태영(taeyi07@noblesse.com)
디자인 장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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