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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6

도자, 조각난 기억을 재구성하다

백진의 도자는 조각난 기억을 구체화하는 도구다.

1 <파편>전에서 첫선을 보인 도자 설치 작품 ‘무제’의 부분 클로즈업.




2 백진 작가는 도예를 전공했지만 남들과 다른 작업을 하고 싶어서 도자 설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Jin Baek
백진의 도자는 조각난 기억을 구체화하는 도구다. 작가는 꿈과 무의식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해 도자 파편을 규칙적으로 배열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백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도자 디자인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그룹전, 중국 웨스트번드 아트 & 디자인 아트 페어, 프랑스 발로리 국제 도자 비엔날레, 일본 도쿄 아트 페어 등에 참여했다. 2017년 중국 상하이 스와치 피스 호텔 아티스트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중국 수코타이 상하이 호텔과 IFC서울국제금융센터, 한국도자재단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3 ‘공(空)’은 동그랗게 만 도자 조각을 캔버스 위에 배열해 도자도 평면으로 구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적 작품이다.
4 NeuRoses, Porcelain on canvas, diameter 150×10cm, 2014

도자 설치 작가 백진의 일곱 번째 개인전 <파편(Fragment)>이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3월 22일까지 열린다. 예로부터 도자기를 사랑해온 우리나라지만 현대의 도자 작가는 화려한 서구 예술에 밀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 이 전시가 더욱 흥미롭다. 전시 제목 ‘파편’은 작가의 작업 의도와 방식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흩어진 기억을 구체화하기 위해 도자 파편으로 작품을 만든다. 도자는 쉽게 깨질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견고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조각을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패턴이 아름다운 평면 작품, 기둥처럼 높게 쌓아 올린 설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매끄러운 도자 작품은 미술관의 붉은 벽돌 벽과 대비를 이루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을 소개해주세요.
기둥처럼 우뚝 솟은 작품 ‘무제’는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겁고 단단하게 느껴지는 도자기를 일부러 가벼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2012년 IFC서울국제금융센터에 최초의 도자 설치 작품을 전시했고, 이번이 두 번째 설치 작품이어서 의미가 있어요. 전작은 도자를 천장에 매달아놓은 형태지만 이번엔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무작위로 도자 파편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각각 고유 번호가 있고, 완성한 도자는 번호를 매겨 조립에 들어갑니다. 파편끼리 90도를 이루어야 하고, 유약을 바른 면은 서로 반대로 접해야 하고, 휜 방향이 달라야 한다는 원칙이 있죠.

작품 제작 방식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세요.
우선 백토(白土)와 장석 가루를 넣어 흙물을 만들어요. 입자가 고운 백토를 푼 흙물에서 수분이 날아가면 얇은 판이 남습니다. 그렇게 만든 도자 판은 햇빛이 투과될 정도로 얇아요. 그 판을 기본 단위체로 삼아, 그걸 자르거나 조형해 작품을 만듭니다. 작업실에선 전기 가마를 사용하는데, 철저히 계산해서 만든 도자지만 가마에 들어가면 완전히 방향성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자기는 두 번 이상 굽습니다. 700~800℃에서 초벌구이를, 유약을 칠한 후 1100~1250℃에서 재벌구이를 합니다. ‘카오스’는 일곱 번 구워 완성한 작품이지요. 도자가 가마로 들어가는 순간 흙 고유의 변형이 시작되기에 굽고 나면 반은 버리게 돼요. 의도치 않게 형태가 갈라지거나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공(空)’과 ‘시(時)’ 등 여러 연작이 있는데, 기본 틀을 이용하는 원리는 같아요. 과거에는 높이 2m의 대형 작품도 만들었는데, 점차 작품 단위체가 작아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표현해 도자의 질감과 형태가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큰 단위체를 벽에 거는 것도 무리가 있고요.

흙에 장석 가루를 넣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단위체를 곡선으로 휘거나 구부려 부드러운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장석 가루를 사용합니다. 저와는 반대로 다른 작가는 대부분 힘 있는 도자를 선호합니다. 예전에는 커피를 넣어본 적도 있었고, 지금도 여러 실험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면 당시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는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벽면에 평평하게 설치한 곡선 작품 ‘리에(Reie:선)’ 연작은 완성한 날짜순으로 설치했습니다. 작품을 마주하면 그날의 심리 상태가 보여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제작한 작품은 빽빽하게 짜여 있고, 기분이 좋은 날은 간격이 넓어집니다. 강박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구성이 촘촘해지는 것 같습니다.

신작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조각을 모아 꿈속 기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평소 꿈을 많이 꾸는데, 깨고 나면 그 내용이 흐릿해요. 작품을 통해 기억의 윤곽을 실험하다 보면 언젠가 온전한 하나의 형태를 구현하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작업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입니다. 꿈은 제 일부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작업으로 남기는 거예요. 2003년 대학을 졸업할 즈음부터 꿈을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꿈과 무의식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요?
작업할 때는 특히 꿈을 많이 꿉니다. 그 꿈이 궁금하고 신경 쓰이죠. 꿈을 꾸는 건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내일은 이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으면, 그것이 꿈에도 나오게 됩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은데, 제가 작업하는 것이 그림이 아니다 보니 추상적 형태로 발현됩니다. 꿈은 뭔가 보이는 구상이지만 기억 나지 않는 것이 많고 이야기할 수 없는 단편적 이미지가 많기 때문에 추상 작품으로 표현됩니다. 그렇게 여러 형태를 맞추다 보면 하나의 꿈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단위체를 여러 개 만들어놓고 그걸 캔버스에 정리할 때 마음이 편합니다. 퍼즐을 맞추는 것 같고, 작품을 완성하는 기쁨이 크거든요. 물론 작가로서 도자기를 전통 방식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컸어요. 다양한 변주를 통해 흙의 유연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5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파편>전 전경. 기둥처럼 우뚝 솟은 작품이 새롭게 선보인 도자 설치 작품 ‘무제’다.
6 캔버스 위에 도자를 고정한 ‘간(間)’ 연작 중 하나. 3개의 도자층을 겹겹이 쌓은 작품으로, 한 층을 올릴 때마다 가마에 다시 구워 견고하게 만들었다.

처음 도자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3차원적 도자 설치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도예를 전공했지만 남들과 다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아이디어죠. 우리나라는 도자 그릇을 대중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도자 작가에 대한 편견이 심합니다. ‘도자’라는 단어를 가볍게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세라믹 아티스트로 불리고 싶지 않습니다. 설치 작가였으면 해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자 작가는 인사동 갤러리에서만 전시해야 한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마주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도자 전시를 주로 하지 않는 전시장을 찾아다녔어요.

국제적 활동을 할 때도 도자 작가에 대한 편견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제가 미술가인지, 공예가인지, 디자이너인지 고민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갤러리도 저를 아트 페어에 초대하지 않아 비교적 참가하기 수월한 디자인 페어에 직접 나갔어요. 국제 무대에서 제가 어떤 작가인지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2010 도쿄 디자인 위크(Tokyo Design Week), 2011 텐트 런던(Tent London) 디자인 페어에 1인 부스로 출전했어요. 현지에서 받은 공통적 평가는 “아트 페어에 있어야 할 작가가 왜 여기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미술가로 작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하이 스와치 피스 호텔 아티스트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하며 어떤 영감을 받았습니까?
당시 제가 유일한 도자 작가였어요. 레지던시에는 가마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도자기를 모두 구워 갔습니다. 도자를 굽는 것만이 도자 작가의 일은 아니라는 것에 서로 공감했기에 레지던시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흙을 사용하는 중국 작가는 있었는데, 도예 작가는 제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2016년 지원했는데, 심사위원 중 배우 조지 클루니도 있었답니다.(웃음) 대학 재학 중에는 보스턴 하버드 대학교 캠퍼스의 도자 레지던시에 있었어요. 한국 작가로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작업을 하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도자로 평면이나 설치를 하는 작가는 드물어요. 처음 시도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너무 몰라서 고민했습니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고 논의할 사람도 없었거든요.

옛 도자기에서도 영감을 받나요?
흰색을 쓴 것은 조선백자에서 영감을 받은 게 맞습니다. 그러나 형태나 기법에서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청자보다 백자를 보면 편안해지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흰색을 좋아합니다. 청자는 왕실 자기처럼 고급스러운 이미지지만, 백자는 서민부터 왕까지 두루 사용했습니다.

관심이 가는 다른 작가가 있나요?
중국 작가 류젠화(Liu Jianhua)의 작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도자로 시작해 다채롭게 작업하는 작가죠. 인체를 백자, 청자로 만드는 등 작업 반경이 넓고 색깔도 다양해서 흥미로워요. 일본 작가 기노 사토시(Satoshi Kino)의 작품도 재미있어요. 청자 조형 작업을 하며 유연한 라인을 보여줍니다.

도예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매력 때문에 계속 흙 작업에 빠져 있는 건가요?
마음을 정리하는 행위 중 하나가 흙을 만지는 것입니다. 흙물 상태로 작업하니 손이 항상 젖어 있고, 지문이 없어지기도 해요. 계속 석고 틀을 들었다 놓았다 해서 힘들 때도 있지만, 흙과 함께 있는 순간이 좋고 편합니다. 정신과 마음을 맑게 정리해주는 행위지요. 또 흙을 만질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한번 흙을 선택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작업할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재료에 관심이 생긴 적은 없나요?
흙이 아닌 다른 재료를 선택했더라도 그 재료에 몰두했을 것 같아요.(웃음) 만약 나무를 먼저 접했다면 나무의 매력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앞으로도 저는 도자에 다른 소재를 섞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IFC서울국제금융센터 설치 작품 이후 흰색 도자가 아닌 다른 색, 다른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흙에 대해 완벽하게 알기 전엔 다른 것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저는 흙이 얼마나 유연한지, 흙이 어떻게 투광되는지, 흙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탐구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여전히 저에겐 흙이 최고의 소재죠.

 

에디터 이소영(프리랜서)
사진 안지섭(인물)   사진 제공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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