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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7

만년필 전성시대

아날로그를 상징하는 만년필의 호황기가 다시 도래했다.

1 전 세계 만년필 컬렉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몽블랑 컬렉터 라인. 하이 아티스트리 에디션은 그중에서도 희귀한 만년필이다.
2 파카 소네트 출시 25주년을 기념하는 스페셜 에디션 소네트 푸제르. 인기 모델의 한정판 에디션은 가치 있는 수집품 중 하나다.
3 아서 코난 도일은 자신의 대표 소설 <셜록 홈스>를 파카 만년필로 집필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첫 만년필을 구입했다. 당시 어느 기업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회사 부회장이 사회 초년생인 우리에게 덕담이라며 만년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린 ‘갑자기?’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만년필의 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요한 계약을 할 때 반드시 좋은 만년필로 사인한다. 진중한 분위기에 걸맞은 위용 있는 펜을 꺼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이미지에 흠집이 난다. 만년필은 체구는 작아도 공식 석상에서 무게감을 지닌다”라며 하나쯤 장만하면 유용하다는 조언을 건넸다. 손에 아무 볼펜이나 쥔 내 모습이 왠지 부끄러워 퇴근길에 큰 서점의 만년필 코너로 향했다.
샤프가 1915년, 볼펜이 1943년에 발명됐으니 1883년에 처음 등장한 만년필은 신문물과 가장 거리가 먼 필기구다. 관리하기도 까다롭다. 매일 사용하며 길들여야 하고 세척도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세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잉크가 굳어 금세 고장이 난다(에디터도 이렇게 첫 만년필과 작별했다). 와인을 잘못 숙성하면 가치가 낮아지듯 만년필도 서툴게 쓰면 닙이 망가진다. 채운 지 얼마 안 된 잉크는 금방 바닥을 보이고, 다른 잉크로 바꾸려면 만년필 전체를 세척해야 한다. 샤프나 볼펜과 비교하면 만년필은 결코 편한 필기구는 아니다.
그런데 최근 파카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용하는 ‘파카 51’을 복각하겠다고 발표했다. 파카 51은 볼펜 발명에 따른 만년필의 수요 저하로 수십 년 전 단종된 모델이다. 디지털 펜의 등장으로 볼펜마저 위협받는 이 시점에 ‘왜?’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지금 만년필은 호황기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과 디지털 펜으로 일반 문구가 타격을 입은 반면, 만년필이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펜 사용의 절대적 빈도수가 줄어든 만큼 소비자는 사용하다 버려도 그만인 그저 그런 펜보다 평생 아끼고 소장할 만년필을 찾고 있다고 한다.
좋은 만년필은 소장하기만 해도 그 사람의 품격을 높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만년필이란 몽블랑, 워터맨, 파카, 쉐퍼, 펠리칸 등으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헤리티지를 쌓은 데다 인류 역사상 중요한 순간을 함께해온 것을 일컫는다. 예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 사임서에 몽블랑 마이스터스튁으로 사인했으며, 2009년에 열린 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몽블랑을 꺼냈다. 코난 도일은 소설 <셜록 홈스> 집필을, 푸치니는 오페라 <라 보엠> 작곡을 파카로 했다. 완벽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이다. 누구나 흔히 살 수 있는 기성품에는 정이 가지 않는다. 만년필도 기성품이지만, 일반 펜과 달리 부품이 워낙 다양해 하나씩 바꿔가며 좋은 조합을 만들 수 있다. 만년필의 핵심인 닙도 사용하는 이의 패턴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라진다. 소중한 만년필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안 된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4 보험 외판원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만년필에서 새어 나온 잉크 때문에 중요한 계약을 망친다. 그는 잉크를 조절할 수 있는 만년필 발명에 몰두했고, 1883년 현대식 만년필 개발에 성공한다. 워터맨은 그가 창립한 브랜드다.
5 하이엔드 브랜드의 만년필은 디테일을 찾는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몽블랑 작가 에디션의 리미티드 에디션에는 해당 작가에게 의미 있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6 일본 마키에(makie) 기법으로 보디를 장식한 만년필. 일본 장인이 제작한 만년필은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그렇다면 첫 만년필은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선호하는 브랜드, 필기감, 그립감 그리고 닙 굵기까지 취향이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라 ‘어떤 제품이 좋다’라고 명확히 정의하는 게 되레 엉터리다. 그래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있다. 실제로 써보는 게 가장 좋다. 만년필의 필기감은 ‘사각사각’으로 알려져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소리 없이 종이 표면을 훑으며 매끄럽게 써지는 것도 있다. 향수의 향을 글로 가늠하기 힘들듯, 만년필도 똑같다. 인터넷에 정성스러운 후기가 많지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시도가 낫다. 디자인도 중요한 요소다. 가심비(심리적 만족을 위한 소비) 상품인 만년필은 계속 손이 가는 외관이어야 한다. 앞서 말한 다섯 브랜드의 대표 모델로 선택지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꼭 좋은 만년필로 입문할 필요는 없다. 이 까다로운 펜은 서툰 솜씨로 다루면 망가질 수도 있다. 험하게 쓰는 한이 있더라도 첫 만년필로 나와 만년필 간 거리를 좁히고, 지식이 쌓이면 두 번째에 좋은 걸 들여도 충분하다.
만년필에 눈뜨면 소장 개수가 금방 늘어난다. 이쯤 되면 필기구를 넘어 수집품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여느 컬렉팅과 마찬가지로 만년필 수집의 주요 기준은 ‘희귀성’과 ‘보존 상태’다. 로댕 ‘칼레의 시민’의 12개 에디션 중 첫 번째 에디션의 값이 가장 높듯이 만년필도 인기 모델의 첫 번째 버전이 큰 가치를 지닌다. 이변이 없는 한 만년필 애호가가 사랑하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9, 파카 51, 워터맨 에드슨, 펠리칸 100 초판은 고가를 유지할 것이다. 컬렉터가 애정을 쏟는 또 다른 모델은 역시 한정판으로, 그중에서도 몽블랑이 인기다. 컬렉터가 정확히 어떤 모델을 선호하는지 몽블랑 코리아에 물었다. “만년필 애호가나 컬렉터는 몽블랑 ‘컬렉터 라인’을 주목합니다. 이 라인에는 도네이션, 뮤즈, 문화 예술 후원자, 작가, 그레이트 캐릭터, 사인 & 심벌 에디션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네이션, 뮤즈 에디션으로 입문해 문화 예술 후원자, 작가 에디션 등으로 넘어가 컬렉팅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아티잔, 하이 아티스트리가 있습니다. 특히 하이 아티스트리는 1억 원대 이상으로 매우 진귀하며 제작 수량도 극소량이죠.”
얼마 전 디지털 펜이 만년필 스타일 필기를 지원한다는 말에 혹해 태블릿 PC와 디지털 펜을 구매했다. 하지만 막상 사용해보니 만년필과 조금도 닮지 않은 데다 왠지 모를 삭막함마저 느껴졌다. 디지털 펜을 내려놓고 나의 세 번째 만년필을 꺼내 같은 문장을 써보았다. 오랫동안 내 손에 길들여진 만년필은 필압에 따라, 순간의 기분에 따라 다른 맛의 글씨를 만들어냈다. 3월은 새 출발을 알리는 달이다. 주변에 새 학교, 새 직장을 준비하는 이를 위해 소중한 선물을 주고 싶다면 만년필 한 자루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만년필은 대체 불가능한 영역일 테니까.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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