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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7

목욕탕의 남자들

비우거나, 채우거나, 흘려보내거나. 크리에이터 9명이 말하는 목욕탕 예찬론.

남달리 짜릿한 냉탕, 신촌수정불한증막
내게 목욕탕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같은 거다. 일요일 오후 2시는 한 주 동안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숙제처럼 남아 있던 것이 모두 사라지는 시간이다. 내 몸에 남아 있는 ‘해야 할 것’의 흔적을 뜨거운 물에 담가 떨치고, 일주일에 한 번 온전한 나를 바라본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욕봤다.” 목욕의 신이 위로하는 듯한 종교적 신비도 있다. 누군가는 예배나 미사를 가듯, 나는 목욕탕의 신을 영접하는 셈이다. 지금도 곱씹어 추억하는 목욕탕은 서울에 올라와 자취하던 시절 내 집처럼 드나들던 신촌수정불한증막이다. 작은 규모에 비해 탕이 상당히 넓고, 특히 냉탕의 직선거리가 긴 편이다. 냉탕의 온도가 높은 편이라 냉탕과 온탕을 오갈 때 몸이 크게 놀라지 않는다. 특히 냉탕에서 헤엄칠 수 있을 만큼 온도와 길이를 보장하기에 좀 더 유희를 즐길 수 있다. 언젠가는 목욕탕을 더 큰 유희의 장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꿈도 있다. 아주 오래된 목욕탕을 전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클림트를 비롯한 아르누보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공예나 응용미술, 건축에 대입해 목욕탕이나 부엌 같은 생활 공간을 예술 작품처럼 꾸미듯, 동네 곳곳의 목욕탕 타일이나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다양한 패턴이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개 같은 빛깔을 지닌 타일로 장식한 목욕탕에 다녀오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현대의 오래된 목욕탕도 각기 시대의 색깔과 소재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기획한 전시가 목욕탕 안에서 한 시대의 예술을 대변할 수 있다면 아주 근사할 것이다. _ 김철식(전시 기획 팀장, ‘미디어앤아트’ 소속)

기분 좋은 종례식, 대동사우나
내게 목욕은 마무리 의식 같은 것이다. 찌든 때를 벗기고 내일을 준비하는 하루의 마무리 의식, 그리고 한 주의 문을 닫는 기분 좋은 종례 시간. 목욕탕 앞을 지날 때 일순간 풍기는 습한 사우나 냄새를 맡을 때면 일요일 오전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사우나의 추억이 떠오른다. 목욕을 한 뒤엔 건조함 후에 찾아오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함을 좋아한다. 오직 목욕탕 문을 나설 때만 느낄 수 있는 이 상쾌함을 만끽하며 ‘네스퀵(초코 우유)’을 쪽쪽 빨던 어릴 때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디자이너라는 직업병 탓인지 목욕탕에 갈 때마다 엉뚱한 생각도 종종 한다. 특히 바스켓에 비누를 뭉쳐놓은 것을 보며 버려진 비누를 모아 공용 비누로 만든 목욕탕 아저씨의 지혜에 감탄하곤 한다(위생과는 무관할 것 같지만!). 그 획기적인 이미지가 디자인 업무를 할 때도 가끔 떠오른다. 올겨울, 만약 고향에 간다면 아버지와 자주 가던 제주 한림읍 한림리 대동사우나에서 묵은 때를 벗길 참이다. 그러고는 언제나 그랬듯 네스퀵을 입에 물고 제주 삼일식당에 가서 칼칼한 해장국으로 몸을 데우리라. _ 문승지(디자이너)




오전과 오후 사이, H 자동차 사옥 사내 사우나
어린 시절, 말수가 적은 아버지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목욕탕에서였다. 당시 나는 장난감 자동차를 좋아하는 보통의 초등학생이었고, 장난감 자동차를 손에 넣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이 차가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일장연설도 서슴지 않는 당돌한 아이였다. 긴 노력 끝에 고가의 RC카를 득템하는 날이면 PT 시간을 허락해준 목욕탕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겨울이면 목욕탕 문을 나서는 길에 산 흰색 팥 호빵을 호호 불며 먹던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따뜻해진다. 자동차 디자이너가 된 지금은 점심시간마다 회사 수영장 안에 있는 목욕탕과 사우나로 향한다. 운동을 마치고 가벼운 샤워 후 온탕에 앉아 쉬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니, 내게서 새삼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수영을 즐긴 후에도 몸이 피곤하기는커녕 훨씬 개운해지는 건 분명 오전과 오후 사이 목욕의 힘이다. 그러고는 회의가 길어질 때면 또다시 뜨거운 탕 생각이 간절해지니, 이쯤 되면 목욕탕 중독이라 해야 할까. _ 박동열(H사 자동차 디자이너)




44℃의 열정, 라성사우나
양조 일을 하다 보면 기꺼이 몸을 던져야 할 때가 많다. 술 빚으며 체력을 소진하고 땀을 쭉 뺀 한 주, 혹은 술기운으로 온몸을 적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목욕탕이 간절해진다. 추억에 대한 향수보다는 몸이 욕탕을 그리워하는 것이니, 감성보다는 이성이나 과학에 가깝겠다. 혼자 갈 때도 있지만 주로 목욕탕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크루처럼 함께하는데, 단골 목욕탕은 성수동 라성사우나다. 우리가 주로 활동하는 무대가 성수동이기는 하나, 라성사우나를 고집하는 이유가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라성사우나에서는 목욕탕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열탕과 냉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어서다. 항시 44℃ 이상 온도를 유지하도록 철저히 열탕을 관리한다(의외로 욕탕에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맛(?)을 유지하기 어려운 건 내가 만드는 막걸리나 목욕탕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내게 목욕은 휴식과 리셋의 개념이라 탕 안에서만큼은 무념무상의 시간을 즐긴다. 멍 때리며 휴식을 누리는 동안 동행한 친구들과 근황을 주고받는다. 그 어떤 공간보다 툭 터놓고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목욕탕이기에. 목욕이 끝난 후에는 밖으로 나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맛있는 음식과 술 한잔!” 사우나 근처의 행복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거나 왕십리의 작은 주점 ‘아맘’에서 술 한잔 들이켜면 그야말로 살맛 난다. _ 정덕영(한국술 양조자, ‘한강주조’ 연구 및 생산 담당)




정신적 고요를 위한, 실로암 사우나
유년 시절의 일요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구멍이 기분 좋게 따끔거리는 듯하다. 아버지, 형과 함께 목욕탕 가는 일요일 오전은 당시 금기였던 탄산음료를 마음껏 마시는 유일한 시간이었다(어머니가 좀처럼 탄산음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자주 가던 동네 목욕탕은 사라졌지만, 목욕 후 통과의례처럼 탄산음료 마시는 버릇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끔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가족끼리 온천 여행도 다닌다.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요리하는 날이면, 출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다 녹초가 되는 날이면 반드시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다. 몸의 근육통이 잠시나마 잦아들고 천천히 찾아오는 마음의 평안함을 즐긴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곳은 중곡동 실로암 사우나다. 정신적 고요를 즐기는 거의 유일한 시간에 가깝기에 중요한 결정을 할 땐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감사하게 미슐랭 1스타를 받았다. 아마도 잔인하게 바쁠 12월이 지나면 실로암 사우나에서 땀을 쏙 빼고, 사우나 근처 유일설렁탕에서 설렁탕에 소주 한잔할 참이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 마음 놓고 낮잠을 즐겨야지. 목욕 후의 푸근함이 좀 더 오래가도록. _ 신창호(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주옥’ 오너 셰프)

20년 지기 놀이터, 두승 참숯가마
뜨거운 맛을 본 첫경험은 생각보다 어릴 때였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2주에 한 번 찾아가던 포천의 한 사우나. 80℃가 넘는 열기를 품은 사우나 안에서 1분, 1분 30초, 2분, 차차 시간을 늘리며 버티다 냉탕으로 뛰어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꾹 참다가 맞이하는 극단의 희열은 추억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도 좋아한다. 한데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 같은 목욕탕은 따로 있다.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다닌 창동의 두승 참숯가마(시작은 두승 목욕탕이지만)다. 두승 참숯가마의 90℃를 육박하는 건식 사우나에서 몸을 찌듯이 달군 뒤 냉탕 입욕. 그렇게 2~3회 반복한 뒤 온탕에 몸을 담그고 마침내 뇌 속 잡음을 잠재운다. 잡념과 상념을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힐링의 시간이 내게는 목욕의 중요한 가치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목욕탕으로 향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싱가포르의 한 바에서 근무할 때, 칵테일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이었다. 에스프레소 관련 칵테일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대회는 망했구나’ 하며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열탕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는데, 바로 그때 에스프레소 추출 방식을 한 번 비틀어 응용한 아이디어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내려놓는 찰나에 다가온 기적 같은 순간. 덕분에 대회에서 ‘톱 7’까지 올랐다. 비록 두승 참숯가마는 그곳에 없었지만, 오랜 친구 같은 목욕탕이 없었다면 타지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승 참숯가마에서 목욕한 뒤 근처 간이시장에서 뼈 있는 족발에 맥주 한잔하거나 파트 단지 내 단골 치킨집에서 치맥을 하면 완벽한 마무리가 된다. _ 투빅(JW 메리어트 호텔 모보 바 헤드 바텐더)




몇 년 전, 젠틀몬스터는 계동의 한 목욕탕을 고친 쇼룸을 만들었다. 2019년 말 계동 쇼룸 운영은 종료되었다. 사진은 쇼룸으로 리뉴얼 하기 전의 마지막 모습.

고립의 권리, 어느 목욕탕
목욕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목욕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날 막아주는 건 목욕밖에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고립이다 보니 혼자 하는 목욕이 좋다. 그래서 어쩌다 텅 빈 목욕탕에 들어서면 횡재한 기분마저 든다. 텅텅, 손바닥으로 수면을 쳐보기도 하고, 꽤 대범한 데시벨로 콧노래도 흥얼거린다. 그러다 준비해온 책을 읽는다. 주로 가볍지 않은, 사색을 재촉하는 책이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생각에 잠긴다. 한 구절 읽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고, 한 구절 읽고 다시 먼 곳을 응시한다. 그런 시간이 좋다. 내게 가장 필요한 시간. 이렇게 억지로라도 분리되지 않으면 좀처럼 갖기 힘든 시간. 광고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늘 15초 짧은 광고처럼 분주했고, 재기 발랄해야 했다. 그러니까 목욕은 내게 일종의 명상과도 같다. 너무 가벼워지지 않도록,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일. 생각해보면 잠시 일에서 벗어난 그 시간 덕분에 인생의 꽤 멋진 결정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와 단둘이 유럽을 횡단해야겠다는 생각도, 지금 아내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도 모두 목욕의 부산물이다. 목욕을 마치면 탈의실 매점에 들른다. 바나나우유와 삶은 달걀. 진부하지만 그래서 더 좋다. _ 서재식(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유희의 온천, 대만 온천
유년 시절, 목욕탕은 내게 아버지와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서로 등 밀어주던 추억의 공간이다. 지금은? 내게 목욕탕은 온천이다. 내게 목욕은 놀이나 문화에 가깝다. 나는 온천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온천 마니아다. 대만에 7년째 거주 중인데, 믿거나 말거나 반쯤은 온천 때문에 이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바쁠 때는 한 달에 한 번 꼭 온천에 몸을 담그기에 지역별로 좋아하는 온천이 따로 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그랜드 뷰 리조트 베이터우에서 고즈넉하게 개인탕을 즐기거나, 이란 지역의 야마카타카쿠 호텔의 온천에서 유황온천 특유의 고릿한 냄새 없는 무색무취의 온천수를 만끽하거나, 온천수의 품질이 우수한 가오슝의 스프링 힐 리조트에서 시간을 보내면 더 바랄 게 없는 일상의 휴가다. 아이디어는 주로 탕 속에서 비롯된다. 마음을 비우고 자연을 바라보노라면,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풀리듯 잘 풀리지 않던 아이디어가 술술 솟구친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영상 스토리텔링 아이디어로 해외 영상 콘테스트에서 수상한 적도 있다. _ 김주혁(영상 크리에이터, 여행 작가)




익숙하지만 낯선, 동림탕
살면서 대략 몇 번쯤 목욕을 했을까. 그런데도 목욕탕에서 하는 목욕은 늘 익숙하면서 생경한 느낌을 준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 낯설고도 친숙한 느낌. 그 상충된 느낌을 즐긴다. 솔직히 목욕탕 마니아라 할 만큼 대단한 애정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네 사람의 터줏대감 같은 노포, 동림탕을 좋아한다. 아직 목욕할 때(?)가 아니라도 동림탕을 지나치면 왠지 그 냄새와 향수에 이끌려 불쑥 들어가기도 한다. 화려하거나 거창할 것 없는 오래되고 쿰쿰한 냄새를 품은 목욕탕. 목욕탕에 갈 땐 특별한 목적이 없다. 한데 온몸이 목욕탕을 갈구할 때의 마음의 심연을 추적하면 대개 이렇다. 혼자 탕에 들어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거지’ 자위하고 안정감을 느끼고 싶을 때. 남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동굴이 내겐 목욕탕이 아닐까 한다. 목욕탕은 평소 아주 새로운 것보다는 오래된 것(클래식이나 고전쯤으로 해두자)으로부터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을 즐기는 내 편집 디자인 스타일과도 꽤 잘 맞아 떨어진다. 목욕이 끝나고 난 뒤에는 사가정역 근처의 장수쌀롱을 즐겨 찾는다. 오래된 공간을 고쳐 만든 바인데, 낮에는 커피, 저녁엔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고마운 동네 사랑방이다. _ 장민(편집 디자이너)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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