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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19 FEATURES

이 시대의 신 스틸러 9인

  • 2019-09-05

작품은 요소의 조합이다. 무수한 개인이 각 기능을 완수해 하나의 극을 완성한다. 물론 거기엔 경중이 있다. 역할의 분량이나 주목도에 따라 직책이 구분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극에서 데우스 엑스마키나는 ‘신의 기계적 출연’을 뜻한다. 작품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절대적 요소를 의미한다. 하나의 요소로서 훌륭한 기능을 완수하는 배우도, 극에 긴장감과 생생함을 부여하는 조연도 있다. 남다른 연기와 개성으로 신을 훔치는 이 시대 스틸러 9명을 만났다.




레더 칼라 프린티드 셔츠 Prada, 브라운 헤링본 벨티드 코트 Polo Ralph Lauren, 브라운 팬츠 Ami.

최덕문
Filmography
영화 <나랏말싸미>・<마약왕>・<용순>・<암살>・<도둑들>,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마왕>

영화 <마약왕>에서 최덕문이 연기한 구 사장은 극에 힘을 더한다. 자칫 늘어질 뻔한 서사를 팽팽히 당기고 공포와 광기, 불안의 이미지를 극에 전이한다. 단 몇 분의 출연이다. 대본을 받은 날부터 몇천 번씩 읽어가며 연구한 결과다. “캐릭터의 모든 건 책(시나리오)에 있다. 내 분량은 물론이고 전체를 다 읽는다. 생략된 정보가 문맥 사이에 존재한다. 그걸 상상하며 살을 붙인다.” 최덕문은 문성근, 박광정, 류태호, 송강호, 이성민 등을 배출한 극단 ‘차이무’ 출신이다. 1999년 영화 <박하사탕>으로 데뷔할 때까지, 아니 <도둑들>과 <암살> 등을 거치며 소위 ‘잘나가는’ 배우가 된 지금도 무대 위에 오른다. 연기의 근원이자 에너지의 원천이 무대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무대 위에 오르려 한다. 거기서 에너지를 받고 그래야 긴장도 유지할 수 있다.” 최근 공연한 <곁에 있어도 혼자>에서도 함께한 연출과 배우, 스태프에게 좋은 자극을 받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배우가 최덕문이다. 여러 작품을 거쳤지만 고정된 캐릭터는 없다. 스릴러와 드라마, 코미디와 역사극 모든 사이에 그가 있다. “어떤 배우로 규정되는 건 싫다. 그렇게 되면 소모될 것 같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걸 즐기고 있다.” 지금은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을 촬영 중이다. 최근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했고 <애비규환>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그 이후로도 대기 중인 작품만 여럿.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지만 여전히 작품에 목마르다. “구마(驅魔)가 소재인 작품에 출연해보고 싶다. 관심이 많은 장르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호흡이 긴 영화에서 내 역량을 확인하고 싶다. 일단은 지금 진행 중인 촬영을 잘 마치고.(웃음)”




블루 프린트 셔츠 Acne Studios, 블랙 블레이저 Lemaire.
헤어 박승택(뮤제네프) 메이크업 서민주(뮤제네프)

유태오
Filmography
영화 <레토>,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출출한 여자> 시즌 2

유태오에게 연기란 삶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지난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한 영화 <레토>에서 러시아의 국민 스타이자 노래하는 시인 ‘빅토르 최’로 분한 유태오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서 비로소 삶의 경험과 시간의 축적으로부터 오는 정신적 깊이를 드러냈다. 그는 살아 있는 빅토르 최이자 유태오 그 자체였다. 이는 한국에서도 유태오라는 배우를 재해석하는 계기가 됐다. “시나리오에서 캐릭터를 분석할 때 5 W’s(Who, What, When, Where, Why)를 떠올린다. 그렇게 해서 인물마다 내가 해석한 이력서를 만들고, 그중 처음에 떠오른 열 가지 정도 생각은 대부분 거둬낸다. 그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일 테니까.” 타자와 다를 때 비로소 예술에 삶이 부여된다는 점을 유태오는 안다. 연기 외에도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동화를 그리면서 어떻게든 유년 시절부터 축적된 공허함을 뱉어내고야 마는 그는 알려진 것과 달리 ‘아티스트’를 지향한 적이 없다. 상업이야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예술이라며, 그는 진지한 눈으로 <미션 임파서블> 같은 상업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매체로든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위대한 예술에 가까워질 테니까. 최근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 위대한 사냥꾼 라가즈로 분하며 새로운 연기에 도전한 그는 매 순간 생각이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누구나 쉽게 내뱉는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숙고하고 섬세하게 반응한다. “연기하는 게 행복하냐고?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는다. 지나가는 감정이니까. 다만 연기하는 게 즐겁다. 다양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연기의 즐거움이다.” 올해는 불현듯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주 스치게 될 듯하다. 그가 출연한 영화 <버티고>가 하반기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코듀로이 블레이저, 패턴 타이 모두 Polo Ralph Lauren, 데님 팬츠 Levi’s, 화이트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병준
Filmography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구타유발자들>・<파괴된 사나이>・<나의 독재자>,
드라마 <공부의 신>

셔츠 위로 팔과 가슴 근육이 도드라진다. 50대 중반의 나이는 눈가를 빼곤 찾아볼 수 없다. 여전히 청년 같은 몸과 열정을 유지한 배우, 그가 이병준이다. “몸 관리는 꾸준히 한다. 배우는 몸을 쓰는 직업이니까. 출연 중인 뮤지컬 <벤허>에서 맡은 역할이 로마 해군 사령관이기도 하고.” 포즈를 부탁하니 순식간에 상황극을 연출한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다가 뮤지컬의 한 소절을 노래한다. 한국 영화 ‘신스틸러 1세대’라는 호칭은 무대에서 30년간 쌓은 내공 덕택이다. “영화와 드라마도 사랑하지만, 본업은 뮤지컬 배우다. 관객과 호흡하고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무대, 그게 좋아 매년 하려고 노력 중이다.” 지난해 출연한 뮤지컬 <아이언 마스크>나 전작인 <위대한 캣츠비>에서도 이병준은 가장 뜨거운 에너지를 뿜는 배우였다. 영화와 드라마에선 또 다른 모습이다. 영화 <구타유발자들>에서 그의 연기는 진짜 성악과 교수를 섭외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풍부한 성량과 노래 실력은 물론 디테일한 연기가 실제와 연출을 혼동케 한 것이다. “캐릭터 구축의 기본은 관찰이다. 다각도로 살피고 분석에 들어간다. 나이와 직업, 성향 같은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 위치나 생략된 과거까지 조립하다 보면 캐릭터가 완성된다.”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서 연기한 안토니오는 논현동 소재의 모 게이바를 출입하며 꼼꼼히 취재한 결과다. 그래서 낯설지만 자연스럽고 소름 끼칠 만큼 섬세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드라마 <공부의 신>과 <시크릿 가든>, <죽어도 좋아>에선 조금 더 유쾌하고 친숙한 연기로 대중과 한층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너의 노래를 들려줘>로 대중과 만날 예정이다. “계획 같은 건 없지만 다짐은 한다. 교만해지지 말자. 겸손하게 연기하자. 그리고 에너지를 잃지 말자. 스태프와 배우, 관객, 대중과 호흡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프린티드 셔츠, 블랙 슬랙스 모두 Neil Barrett, 링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허성태
Filmography
영화 <밀정>・<남한산성>・<브라더>・<범죄도시>,
드라마 <터널>・<이몽>・<왓쳐>

상사맨에서 35세에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쳐 배우가 된 그의 스토리는 더 이상 유명하지 않다. 그가 연기한 압도적 캐릭터는 각주를 지운다. 이제 대중은 수사를 떼고 그를 오롯이 배우 허성태로 기억한다. 그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밀정>에서 연기한 하일수는 허스키한 보이스와 강렬한 표정으로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듬해 출연한 <범죄도시>의 독사는 그를 충무로에서 가장 뜨거운 배우로 만들었다. 감독 강윤성은 허성태에게 ‘불과 15분 만에 퇴장하지만 독사는 장첸이란 악역을 극대화하는 트리거’라며 중책을 맡겼다. 그리고 허성태는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운이 좋았다. 고맙게도 감독이나 대중이 좋게 봐줬다. 이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잘 알기에 매 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기하고 있다.” 그래서 허성태는 지치지 않는다. 지난 3년간 출연한 작품만 19편으로,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지만 현장이 즐겁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이몽>에선 일제에 부역하는 조선인으로 분해 더 많은 대중과 만났다. 늦게 연기를 시작한 만큼 갈증도 크다. 그러나 돋보이기보다는 하나의 좋은 요소로 작용하고 싶다. “연출자와 대화를 많이 하려 한다. 어떤 의도 또는 의미인지 파악한 뒤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한 신뢰가 작품에서 중요하다.” 주로 악역을 맡았지만 코미디나 전쟁 영화에도 출연하고 싶다. 영화 <부라더>에서 허성태는 위트 있는 역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손사래 치지만 멜로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성공적으로 해낼 배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외계 언어 같은 퉁구스어 대사로 잠꼬대를 할 정도로 외워 NG 한번 내지 않은 그다. 그런 성실함과 노력이 지금의 허성태, 그리고 앞으로의 허성태를 만들어가고 있다. “잇따라 출연 기회를 잡다 보니 주변에서 축하해주거나 성공했다는 말을 한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디션 프로그램 종영 이후 잠시 느슨해진 때가 있었다. 1년 가까이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작은 반응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그때그때 현장이나 배역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화이트 재킷 Big Park, 이너 톱 Son Jung Wan, 이어링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스타일링 정지윤

이미도
Filmography
영화 <뷰티 인사이드>・<부당거래>,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아버지가 이상해>・<직장의 신>

영화 38편, 드라마 14편. 올해 만 37세의 이미도가 거쳐온 필모그래피를 합친 수다. 대한민국에서 이미도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를 대체할 배우가 번뜩 생각나지 않을 만큼 이미도는 자신만의 장르와 영역을 견고히 다져왔다. 숱한 배역에서 그의 존재감이 드러날 수 있었던 건 모든 배역에 이미도라는 유전자가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일차적으로 전반적 분석을 하고, 그다음엔 캐릭터에 개성을 불어넣는다. 마지막으로는 다른 인물이나 작품 톤에 맞춰 다듬은 캐릭터에 나, 이미도를 끼워 넣는다. 이를테면 내가 지닌 여러 성질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을 확장해 구축하는 식이다. 나를 완전히 떠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주로 코믹하거나 센 캐릭터를 비롯해 무수한 작품과 만난 이미도지만, 대표작으로 선뜻 꼽을 수 있는 작품이 없는 건 여전히 고민이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지체장애인 역할로 존재감을 드러낸 <부당거래> 같은 작품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결혼과 육아로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막 지나는 이미도의 최근 고민은 좀 더 ‘이미도’다운 연기를 하고 싶다는 것. “이미도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심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걸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그 전까지는 나를 가로막는 어떤 선이 있었는데, 그걸 과감히 깨고 싶은 열망이 있다. 연기를 좀 더 막하고 싶다는 마음이랄까?(웃음)” <시실리 2km>와 <차우>를 만든 신정원 감독의 SF 코미디 스릴러 영화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양선 역을 맡은 그녀를 올 하반기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다.




블랙 실크 셔츠, 블랙 & 화이트 스트라이프 스웨터, 스트라이프 팬츠 모두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태인호
Filmography
영화 <배심원들>・<명당>・<영도>,
드라마 <미생>・<식샤를 합시다 2>・<국민 여러분>

연기에 요행은 없다. 운이란 겸손의 사족일 뿐 내공 없는 배우가 신데렐라가 되는 경우는 없다. 태인호는 운이 좋았다 말하지만,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대학 졸업 후 부산에 위치한 극단 ‘열린 무대’에서 활동하다 3년 만에 서울로 상경했다. 더 넓은 무대, 더 많은 대중과 만나고 싶어서다. 그러고는 꼬박 7년 동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4년 정도 지나선 힘이 빠지더라. 그래도 어찌어찌 7년을 채웠다. 만약 드라마 <미생>의 성 대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다른 걸 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 기회가 늦춰졌더라도 그는 연기를 이어갔을 것이다. 선배들은 그에게 ‘소 같은’ 배우라고 했다. 미련할 정도로 성실한 태인호를 빗댄 에두른 표현이다. 이후 주연을 맡은 영화 <영도>와 드라마 <라이프> 등에서 섬세하고 입체적 연기를 선보였다. 태인호의 연기는 예민하다. 꼼꼼하고 생활 그 자체가 느껴진다. “일상이 그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까. 악하든 선하든 캐릭터가 현실감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래서 드라마 <국민 여러분>의 주연 한상진을 연기할 수 있었다. 정의롭고 이상적 세상을 꿈꾸는,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역을 태인호는 어딘가 꼭 있을 법한 캐릭터로 완성했다. 20년간 쌓은 내공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종영 후 두 달 동안 제주도에 홀로 있었다. 낚시를 하고 산책을 다니며 재충전했다. 그러면서 연기에 대해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가 말하는 근래의 고민, ‘연기 사춘기’는 아마도 갈증일 것이다. 산 하나를 넘은 뒤의 안도는 잠시, 소 같은 연기자는 금세 다음 목표가 필요하다.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다. 감정에 솔직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배역. <왕의 남자>에서 감우성 선배가 연기한 장생 같은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다.”




보머 재킷, 블랙 코트 모두 Dior Men.

전석호
Filmography
영화 <조난자들>,
드라마 <미생>・<굿와이프>・ <킹덤>・<미스터 기간제>

드라마 <미생>의 하 대리나 <미스터 기간제>의 이태석은 우리가 외면하고 부정하는 인간의 민낯을 상기시킨다. 타인에 대한 멸시와 비열함, 속물적 근성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전석호는 그걸 가감 없이 연기한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내가 조금 부끄러우면 된다. 불편하고 숨기고 싶은 모습, 나조차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거다. 그런 캐릭터는 열심히 준비하지만 모니터는 하지 않는다. 내 연기와 마주하는 순간 이성적 판단으로 머뭇거릴 것 같다.” 전석호에게 연기는 사람이다. 캐릭터를 연구할 때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인물과 인물이 빚어내는 갈등과 시너지가 작품의 키워드다. 그래서 그가 연기하는 악역은 입체적이다. 얄밉지만 애처롭고, 교활하지만 연민이 생긴다. 작품도 그렇게 선택한다. 필모그래피를 관리한다든가, 비중은 나중 문제다. “안 좋은 거라 생각도 하지만 작품도 사람을 보고 고른다. 그 사람이 좋으면, 또 그런 사람끼리 뭉치면 작품에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킹덤>의 김성훈 감독이나 김은희 작가, <라이프 온 마스>와 <굿와이프>의 이정효 연출, 14년째 함께하는 연극의 박선희 연출 같은 경우가 그랬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작품에 잘 묻어난다. 연극 무대에 오르며 몸에 밴 ‘톤 정리’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이어진다. 나보다는 작품 전체, 한 시퀀스보다는 극의 흐름을 먼저 생각하기에 많은 연출자가 그를 찾는다. “난 조력자다. 좋은 작품은 배우가 보이기보다는 작품 속에서 기능해야 한다. 각본가와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훌륭한 기능을 해낸다면 몫을 다했다고 본다.”




블랙 레이스 점프슈트 Valentino, 블랙 스틸레토 샌들 힐 Stuart Weitzman, 이어링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주영
Filmography
영화 <독전>,
드라마 <라이브>・<땐뽀걸즈>

이주영은 좀 느슨하다. 느슨한 태도로 상대를 바짝 긴장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탁월한 밀당 끝, 간발의 차이로 단숨에 대어를 건져 올리는 낚시꾼의 치열함과 쿨함이 보인다. 이주영이 첫 상업 영화에 도전한 <독전>의 이해영 감독은 언젠가 이주영을 두고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다. 자신만의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하듯 연기를 한다”고 평한 적이 있다. 모델 출신 배우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가 극에 관심을 둔 건 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다. 대학 시절 문예창작을 복수 전공한 그는 이지민 작가, <극한 직업> 배세영 작가의 수업을 들으며 장편 시나리오 두 편을 완성했고, 이는 연기 인생의 단단한 토대가 됐다. “아무래도 시나리오의 숨은 의도를 캐치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수줍게 고백하는 그다. 어린 시절부터 열망해온 비주얼에 관한 남다른 관심 역시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머릿속으로 캐릭터의 외형을 먼저 그린다. 그러고 나서 ‘이런 외형의 사람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 고민한다. 그러면 캐릭터가 더 가깝게 밀착되더라. 대본을 리딩할 때는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가도 현장에서 옷을 입고 분장을 하면 마지막 점을 찍는 느낌이다. 화룡점정이랄까.(웃음)” 대화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가 비언어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연기가 왜 그토록 자연스러운지 이해된다. 모델 이주영이 단 한 컷에서 최고를 뽑아내려는 자아였다면, 배우 이주영은 인간의 밑바닥까지 추락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경험이 전무한 이주영을 드라마에 데뷔시킨 노희경 작가의 tvN 드라마 <라이브> 속 혜리의 모습에서 그런 진지한 고민이 보인다. 인간미와 자연의 리듬이 숨 쉬는 듯한 연기를 하는 이주영. 시나리오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건 배역보다 작품성이다. “비중이 중요하냐고? 아, 물론 비중도 중요하다. 많이 나오고 싶으니까.(웃음)”




집업 스웨터 Fendi Men, 블랙 슬랙스 Maison Kitsune'.

조재윤
Filmography
영화 <범죄도시>・<내부자들>,
드라마 <구해줘>・<스카이캐슬>

봉인된 치부를 죄책감 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건 한편으로 축복이다. 조재윤이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늘 행복하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엄청난 관심과 함께 큰 인기를 얻은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우양우를 차치하더라도, 서른다섯 살에 연기에 입문한 조재윤은 주로 악의 없는 건달이거나 늘 짓궂은 역할을 맡아왔다. 인간 조재윤이 지금까지 맡은 역할과 다소 오버랩되어 있을 거라 예상한 건 착오였다. “(옅은 미소를 띠며) 살아가는 게 슬프다. 인간에겐 3개의 캐릭터가 존재한다는데, 나의 가장 중심에는 내적이고 정적인 자아가 있다. 어디 가서 털어놓지도 못하고 속병을 앓는 인간형이다.” 슬픈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는 늘 밝은 조재윤의 얼굴로 두꺼운 메이크업을 해왔다. 들키기 싫은 자아와 드러내고 싶은 자아의 좁은 틈 사이에서 조재윤은 연기를 통해 내면에 고인 썩은 물을 배설한다. 연기가 일종의 처방전인 셈. 조재윤 특유의, 호흡으로 줄다리기하는 듯 맛깔스러운 연기 톤도 ‘ㅅ, ㄹ’ 발음이 어려운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노력에서 비롯했다. 인간 조재윤을 감춤으로써 우리가 아는 배우 조재윤이 탄생했다는 아이러니한 스토리다. 올 1월부터 7월까지 예능, 드라마, 영화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활약한 그의 모습이 담긴 작품 수는 12개에 이른다. 바쁜 스케줄임에도 예능을 병행하는 건 배우이자 엔터테이너이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그의 연기가 살아 숨 쉰다는 느낌이 드는 건 그 까닭일지도. 하반기에는 뮤지컬 영화 <영웅>을 비롯해 숨겨둔 슬픔을 폭발할 수 있는 작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기대된다고? 기대하지 말아달라. 내 얼굴이 그렇게 기대할 만한 얼굴은 아니잖나.(웃음)” 궁극에는 라디오 DJ를 꿈꾸는 조재윤. 그의 순도 높은 속내가 담담한 어투로 전파를 탈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김참   스타일링 권수현(msg seoul)    헤어 안미연   메이크업 이아영   어시스턴트 장체라, 민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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