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st News

JUNE. 2019 CITY NOW

로마 유적을 품은 호텔

  • 2019-06-03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를 걷다가 우연히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품은 호텔을 발견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호텔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하는 소피아 시내 전경.

‘요구르트’와 ‘장미’ 그리고 ‘장수’의 나라 정도로 알려진 불가리아. 하지만 불가리아는 우리가 모르는 흥미로운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수도 소피아(Sofia)를 걷다 보면 단번에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도시 곳곳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양 문명, 그리고 이슬람 사원을 비롯한 동양 문명이 뒤섞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동서양이 만나고 충돌한 대표적 도시 중 한 곳.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뒤섞인 소피아를 여행한 건 지난 2월이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 독특한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이었다. 간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유적지를 촬영한 사진 한 장에 시선이 갔다. 연한 우유 빛깔 대리석 기둥이 열을 맞춰 서 있는 모습.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간직하고 있기라도 하듯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유적지를 품은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Arena di Serdica Hotel)’이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떤 사연으로 호텔 안에 고대 로마 유적지가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은 2004년 신축을 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했다. 5성급 호텔이었기에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됐다. 한데 수영장 부지를 조성하는 공사를 진행하던 중 우연히 땅속 깊은 곳에서 고대 유적지 터가 발견됐다. 호텔 측은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불가리아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불가리아 정부는 호텔 공사 현장으로 전문 발굴팀을 보내 유적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발굴팀은 유적지의 구조를 분석한 결과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arena)’과 ‘극장’이 함께 땅속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 외관.

여기서 잠깐, 소피아에는 원래 발칸 지역을 호령하던 고대 왕국 다키아(Dacia)의 수도 세르디카가 있었다. 기원후 2세기경 세력이 팽창하던 로마제국은 다키아 왕국을 지배하며 실질적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 호텔 부지에서 발견된 유적지는 로마가 다키아 왕국을 지배하며 세력을 과시하려 했던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다. 이를 증명하듯 호텔 부지에선 다키아 왕국 시대의 유물이 속속 발견됐다. 특히 사자와 호랑이, 곰과 악어 같은 문양을 새긴 검투사의 유물이 대표적이었다. 호화로운 무늬가 새겨진 도자기와 그릇, 검투사의 문양이 새겨진 프레스코 벽화는 곧장 불가리아 국립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이야기를 다시 이어서,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던 2~3세기경엔 원형경기장 내에서 잔혹한 학살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검투사들의 원형경기장과 연극 극장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은 그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원형경기장 유적지가 발견된 호텔 공사 현장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의 문제.
이미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된 호텔 공사를 중단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유물이 발견된 곳은 사유지. 불가리아 정부가 사유지를 유적지로 전환하는 데는 큰돈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몇 달간 ‘호텔 공사’와 ‘유적지 보존’이라는 두 가지 이슈로 설전이 벌어졌다. 그러다 정부와 호텔 측의 타협안이 나왔다. 호텔이 고대 로마 유적지를 온전하게 보전하는 조건으로 공사를 계속하기로 합의한 것. 이것이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이 고대 로마 유적지를 품게 된 배경이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품은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 내부.

불가리아에선 ‘Yes’와 ‘No’가 반대다. 그들은 ‘Yes’라고 할 때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No’라고 할 때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이는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침략과 정복을 당하며 시련의 역사를 쌓아온 불가리아인만의 독특한 기질 때문이다.
로마가 불가리아를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던 시절, 불가리아인은 로마 군대에 맞서 자신들의 영토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포로로 잡혀 죽음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도 불가리아인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불가리아 전사들에게 로마가 가한 처벌은 잔혹했다. “살고 싶으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라!” 로마 군인들은 포로들의 입에 칼을 집어넣고 저항을 포기하면 살려준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불가리아 전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로마인의 눈엔 머리를 위아래 흔드는 것이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온몸으로 저항하며 생을 마감했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품은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 내부.

현재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은 당시의 공사 현장에서 발견한 원형극장 잔재 위에 로비를 만들어 영업하고 있다. 유적을 바탕으로 호텔 구조나 인테리어를 섬세하게 구성했다. 이 호텔의 고대 유적은 투숙객은 물론 외부인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아레나 디 세르디카 호텔에서 나온 유적은 비록 자신들을 지배했던 로마의 것이지만, 불가리아인들은 식민지 시대의 유물도 자신들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여긴다. 단호하지만 자신들의 역사를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낡고 오래된 것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컨트리뷰팅에디터 이영균
글·사진 김덕영(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작가)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