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팅 세럼 바르는 남자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FEATURE
  • 2018-01-02

부스팅 세럼 바르는 남자

그루밍은 특별한 게 아니다. 그냥 생활이다.

요즘 곳곳에서 자주 들려오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그루밍(grooming)이다. ‘그루밍 제품’, ‘바버숍’, ‘그루밍족’ 등과 연관 검색어로 연결된 그루밍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루밍은 마부(groom)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 말끔하게 꾸미는 행위에서 유래한 단어로 ‘동물의 털 손질, 몸단장, 차림새’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외모에 관심이 많아 자신을 가꾸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남자가 늘어나면서 여성의 ‘뷰티(beauty)’에 해당하는 남성의 미용 용어로 쓰이고 있다. 피부, 두발, 치아 관리는 물론 성형수술까지 포함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그루밍은 여성의 뷰티 산업이 그 대상을 남성으로 치환했을 때 사용하는 용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금 거친 말로 표현하면, 뷰티라는 단어를 남사스럽게 느끼는 남성들을 공략하기 위해 기업에서 맞춤형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남성 여러분, 당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뷰티 제품을 구매하세요”보다 “남성 여러분, 당신을 멋지게 만드는 그루밍 제품을 구입하세요”가 더 멋스럽고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실제 그루밍 제품은 의외로 다양하다. 보통 사람(여자에 국한되지 않는다!)이 쓰는 세안제, 스킨, 로션, 에센스, 크림, 마스크 팩 등의 화장품, 헤어와 관련된 제품(왁스가 대표적이다)은 기본이고, 요즘은 남성의 특권이라 할 만한 수염에 관한 여러 트리트먼트 제품을 넘어 기초 화장에 해당하는 컨실러, 프라이머, 쿠션 파운데이션, 눈썹 브러시, 눈썹 다듬는 키트까지 점점 다양하고 폭넓어지고 있다.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에 남성 그루밍 섹션이 떡하니 자리 잡은 현재 그루밍족에 대한 사회적 시각도 변화하고 있다. 단어의 구조상 ‘그루밍을 하는 특정 집단’이라 해석해야 할 용어고, 실제 사전에도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자’로 등록되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은 그루밍족이라 하면 신기한 생물체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유난스럽게 자신의 피부를 관리하고 수염을 다듬으며 화장을 하는, 민감하고 유별난 ‘미용 중독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실제 10년 전만 해도 BB 크림 바르는 남자를 보면 바로 “저 사람 화장했나 봐. 게이인가?”라는 비이성적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흔했다. 하기야 남성용 화장품이라면 아저씨 냄새 풀풀 나는 스킨과 로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대에 그루밍족이라는 단어는 지금처럼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남자가 아니라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는 사람에게 쏟아내던 비꼬는 시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내가 지금까지 그런 시선을 엄청나게 받아온 산 증인이니까!
내 그루밍의 시작은 화장품이었다. 사실 20대 초반만 해도 스킨 하나 바르지 않았음에도 폼 클렌저를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름 피부를 위한다고 자부하던 나다. 여름이면 더워서 기름이 번질거리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고, 겨울에는 추워서 하얀 각질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겼다. 이를 상쇄하려는 의지는커녕 어떤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그루밍이란 단어는 해외에서 흘러들어온 신비한 어휘일 뿐, 국내에는 관련 제품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니 사실 형태가 보이지 않는 말뿐인 단어였다. 그러던 내가 화장품에 눈을 뜬 계기가 있으니 바로 여드름이다. 중·고등학교 때 나던 여드름이 가라앉고 깨끗하고 맑은 피부를 얻은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여드름이 얼굴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도 압출 정도밖에 하지 않았고, 특히 고통에 대단히 취약한 나는 건너편 여고생이 휴대폰 자판을 누르며 무표정하게 여드름을 압출하는 장면을 초현실적으로 느낄 정도로 병원에 가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바로 화장품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블로그가 생겨나자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화장품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뭐만 바르면 얼굴이 깨끗해져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혹한 나는 화장품 브랜드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도 우습고 멍청한 생각이지만, 그때만 해도 내겐 화장품이 기적을 부르는 물질이었기에 이왕 바를 거 가장 좋은 걸 바르면 얼굴이 깨끗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안티에이징 화장품이다(맙소사!). 돈을 들인 만큼 피부가 좋아지고 안티에이징 라인을 쓰면 여드름이 없어지고 피부도 탱탱해지고, 30대가 돼도 동안(그땐 지금처럼 덩치가 커지기 전이라 얼굴이 나름 주먹만 했다)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화장품 판매원의 설명에 혹해 남는 돈이 있으면 화장품 사는 데 전력투구했다. 에스티 로더, 랑콤 같은 거대 글로벌 브랜드를 비롯해 시슬리, 쥴리크 같은 식물성 화장품, 과학적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풀어내는 르비브, 특수한 성분을 쓴다는 SK-Ⅱ, 스위스퍼펙션, 일단 바르면 얼굴에 광채가 난다는 라프레리, 초과학적 신념을 믿는 라 메르, 아무도 모르는 브랜드 네츄라비세까지 지금 잠깐 생각해본 화장품 브랜드만 이 정도니 기억에서 사라진 브랜드까지 합치면 정말 수십 개를 써본 것 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드름은 낫지 않았고, 다양한 공부를 한 끝에야 내 문제는 수분이 부족한 지복합성이라는 피부 타입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수분을 많이 더하고 적당히 기름을 잡아주는 화장품을 쓰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화장품 브랜드를 통일하고 가짓수를 대폭 줄였다. 세안한 후 수분을 보충하는 데 집중했고, 매트한 피부를 유지해주는 성분의 로션이나 세럼을 살짝 발랐다. 하지만 여드름은 낫지 않았고, 나중에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게 원인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땐 화장품에 들인 돈을 후회해도 이미 내 통장은 빈 후였다.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두 가지만 바른다. 수분 폭탄이라는 데코르테의 모이스처 리포솜과 민감한 피부에 잘 맞는다는 달팡 인트랄 세럼이다. 근데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하면서 내가 쓰는 브랜드를 밝히면 하나같이 사람들은 날 기묘한 눈빛으로 본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치 “남자가 저런 브랜드를 어떻게 알고 쓰는 거지?”란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비오템 옴므와 랩 시리즈를 쓰지 않아서 그런가. 꼭 남성용 화장품을 써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물론 남녀의 피부 두께나 민감도, 지성 정도에 차이가 나겠지만 사람 피부에 쓸 수 있는 것에 성차별이 웬 말이란 말인가. 나는 나 나름대로 그루밍을 즐기고 있다. 그것도 굉장히 건강하게! 요즘 격하게 빠진 그루밍이 하나 있어서 덧붙인다. 바로 바버숍이다. 원래 나는 머리 관리에는 좋은 커트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청담동 쪽 미용실을 자주 찾곤 했다. 염색과 파마를 안 하는 대신 그 돈으로 세련된 커트를 하면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왁스 바르는 걸 싫어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데 회사에 다니면서 바쁜 스케줄에 쫓겨 면도도 못하는 날이 늘어나면서 수염이 눈에 띄게 자랐고, 처치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서야 한번씩 습식 면도기로 면도하게 되자 아예 한번 길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남성 매장에 있는 바버숍 마제스티다. 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어 프라이빗하고 바버의 솜씨도 좋아 머리와 수염을 맡긴 지 2개월째인데 무척 만족하고 있다. 특히 같은 남자라 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필요한 말이 아니면 말을 걸지 않는다. 사람 목소리 듣는 거 싫어하는 내겐 더욱 환상적이다. 그리고 움직이다 신체의 일부분이 노출될 때나 부득이하게 생리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는데 전혀 신경쓰지 않는 그의 배려가 좋다. 게다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처음인데도 전보다 훨씬 관리하기 편하고 남자에게 딱 맞는 스타일로 세팅하면서 수염도 같이 맞춰주니 토털 케어를 받는 느낌이다. 가끔씩 해주는 헤드 마사지도 피곤한 남자에게 딱 필요한 서비스고. 지금껏 바버숍 다니는 남자를 약간 허영덩어리로 치부해온 나 자신을 크게 반성한 시간이었다. 아마 독자 중에도 분명 수염이 가지런한 남자를 보며, 머리 세팅이 완벽한 남자를 보며(털 관리에 미친) 그루밍족이라 폄하하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이처럼 좋은 게 없다. 그루밍이란 말은 과연 실존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것도 남성의 삶의 만족도를 강하게 끌어올릴 정도로! 사실 그루밍은 특별한 게 아니다. 꼭 특별한 화장품을 쓰거나 바버숍에 다니고, 기초 화장에 해당하는 툴을 열심히 챙겨 사용하는 게 그루밍의 본질은 아니다. 그루밍은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이자 타인을 위한 작은 배려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기막힌 꿩 먹고 알 먹고가 어디 흔한 줄 아는가. 좋은 향수를 쓰면 그 향에 감화되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순간을 선사할 수 있다. 잘 가꾼 수염은 신뢰감을 높인다. “피부가 좋은데 어떤 제품 쓰세요?”라는 말은 “오늘 날씨가 참 춥죠?”처럼 어색한 침묵을 깨는 특별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 그루밍을 너무 무겁게 보지 말자. 자신을 아끼는 게 그루밍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성찰에서 그루밍은 시작된다. 이 마법 같은 행위를 놓치지 말자. 당신의 권리니까 말이다.

 

에디터 전종현(harry.jun@noblesse.com)
사진 Shutterstock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