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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16 ISSUE

호크니의 시선이 머무는 곳

  • 2016-12-09

우리는 왜 그림에 매료될까? 데이비드 호크니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3차원을 2차원으로 해석한 그림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테이트 브리튼에서 2017년 2월 9일부터 5월 29일까지 열릴 그의 대규모 개인전을 앞두고 풍경화와 인물화, 수영장 작품을 통해 호크니가 바라본 세상을 함께 감상해보자.

데이비드 호크니(1937년~ )
영국 요크셔 출신 화가. 런던 왕립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회화 외에도 사진, 판화, 무대미술, 의상 디자인, 잡지 디자인, 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그의 예술 작품은 1960년대 초부터 이미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수영장 그림과 개성 넘치는 초상화로 유명하다. 1964년에 처음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후 30여 년간 주로 미국에서 생활했으며 한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 풍경을 그리는 작업에 전념했다. 회화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다수의 책을 출간했는데 대표 저서로 <호크니가 말하는 호크니(David Hockney by David Hockney)>, <내가 보는 법(That’s the Way I See It)>, <명화의 비밀(Secret Knowledge)>, <그림의 역사(A History of Pictures)> 등이 있다.



1 Garden, Acrylic on Canvas, 122×183cm, 2015

계절이 무르익을 무렵
‘정원’

자연을 주제로 한 풍경화는 서양 회화에서 원근법 발견을 계기로 본격화됐습니다. 풍경화는 16세기 후반에 하나의 독립된 회화 장르로 자리매김했고, 도시가 커지면서 전원을 즐기는 취미가 생겨 더욱 각광받았습니다. 화가들은 풍경화를 통해 자연풍광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빛 혹은 현상 이면에 숨은 에너지를 포착하려 애쓰면서 회화적 평면성을 실험했고, 때론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죠. 동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세계에서도 풍경화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호크니는 2004년 고향인 요크셔 브리들링턴으로 돌아가 약 8년간 머물면서 영국 북동부의 자연을 그렸습니다. 그곳에서 제작한 대형 캔버스 작품과 화첩에는 하늘과 숲, 나무와 풀꽃이 담겨 있습니다. 야외와 스튜디오 작업을 병행한 그에게 풍경화는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순환, 유동하는 자연을 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작품 속으로
비교적 최근작인 ‘정원’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호크니의 집 정원을 그린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는 호크니가 오랫동안 생활한 곳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고향에 머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모습을 그린 호크니는 2013년 여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습니다. 그해 봄 작업실 조수가 자살한 비극적 사건이 계기였죠. 조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화가는 한동안 붓을 잡지 못했습니다. 몇 달간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그가 먼저 그리기 시작한 것은 실내에 있는 주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2015년부터 서서히 밖으로 나가 자기 집 정원을 그렸습니다. 물론 호크니가 로스앤젤레스의 집을 그린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는 1980년대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실내를 다시점(多視點) 구도로 그린 적이 있죠. ‘정원’에서 보이는 시점 역시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화가가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풍경을 결합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화면 하단의 커다란 알로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각도, 오른편의 붉은색 바닥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포착했죠. 이 작품에선 테라스가 있는 파란 집, 수영장, 하늘에 닿을 듯한 키 큰 야자수, 무성한 나무와 만개한 꽃이 보입니다. 빨강·파랑·노랑·초록 등 호크니 특유의 강렬한 원색을 사용했고, 화면 왼쪽의 나무나 한쪽 굴뚝의 분홍색이 화면에 생기를 더해줍니다. 또 그림 속 곳곳에 흩어진 점과 선이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을 주며 이 그림 전체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픽토르
“내가 만나본 화가 중 가장 열심히 그리는 사람이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역사가 폴 존슨(Paul Johnson)이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해 쓴 글의 첫 문장입니다. 호크니는 평생 동안 그림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회화 매체의 실험을 이어온 화가입니다. 그의 오랜 관심사는 바로 3차원을 평면으로 옮기는 일이었죠. 한때 사진 콜라주, 컴퓨터 드로잉 작업을 한 호크니는 2009년부터 아이폰, 2010년부터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이패드 드로잉’인데, 거의 매일 일출 장면이나 창밖 풍경, 꽃, 정물을 그려서 지인들에게 수시로 전송하기도 한답니다. 이처럼 새로운 차원의 회화를 시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78세의 노장은 지금도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며 그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3만여 년 전에는 동굴 벽에 그렸고 21세기에는 아이패드에 그리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림을 그린다는 인간의 원초적 행위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세기 이상을 회화에 매진해온 호크니의 모습을 통해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픽토르(HomoPictor)’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글. 김보라(미술평론가)







2 Model with Unfinished Self-Portrait, Oil on Canvas, 152×152cm, 1977

당신과 나 사이에
‘모델이 있는 미완성 자화상’

데이비드 호크니가 1960~1970년대에 그린 초상화를 보면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경우도 있지만 평소 친밀하게 지내는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 많습니다. 특히 한 화면에 두 사람을 그려 넣은 2인 초상은 작품의 배경인 실내 공간, 각 인물의 위치나 자세, 시선, 표정 등으로 인물 사이의 심리적 관계를 탁월하게 드러내죠.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는 게이 커플이나 불안해 보이는 신혼부부를 그린 2인 초상에는 관계를 대변하는 결정적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모델이 있는 미완성 자화상’은 두 사람이 한 공간에 함께 있지 않습니다. 앞쪽에는 파란 목욕 가운을 입은 남자가 환한 햇빛을 받으며 곤히 잠들어 있고, 뒤쪽엔 다른 남자가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죠. 두 공간에 모두 빨간 튤립이 꽂힌 화병을 놓아 연계성을 부여할 뿐, 각기 다른 두 공간이 한 화면에 겹쳐져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미완의 자화상
제목에 ‘자화상’이라는 단어가 있으니 아마도 책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작가 자신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호크니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그래서 동글동글한 얼굴형과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안경테, 차분한 헤어스타일을 기억한다면 더욱 확신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보다 먼저 완성한 ‘푸른 기타를 그리고 있는 자화상’을 자화상 부분에 비슷하게 베껴 그린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앞선 작품을 이 작품의 일부분으로 차용한 셈이죠. 예술가에게 자화상은 자신을 향한 관심과 고민의 표상입니다. 1977년, 마흔 즈음의 호크니는 이미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성공한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는 데 강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고민이 많은 시기에 멘토를 찾듯 그는 선배 작가 피카소를 떠올렸습니다. 이미 1973년과 1974년에 피카소와 대면하고 있는 ‘화가와 모델’이라는 에칭 작품을 만들어 거장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바 있죠. 푸른 기타는 피카소의 작품 세계에서 창작의 영감을 상징하는 모티브입니다. 조용히 책상에 앉아 푸른 기타를 따라 그리는 호크니는 ‘이제 어떤 작품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착실하게 찾아가고 있는 모범생처럼 보입니다.

작품 속으로
호크니는 지적 호기심이 풍부하고 다재다능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미술관에 걸린 고전 초상화의 시각적 왜곡을 탐구해 책을 펴냈고, 카메라를 통한 실험에 몰두했으며,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그림을 발표하고 있죠. 1970년대에는 <난봉꾼의 행각>이나 <마술피리>등 오페라 무대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고, 회화 작품에서도 그 영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모델이 있는 미완성 자화상’에서는 모델이 누워 있는 곳을 연극의 무대, 작가가 앉아 있는 곳을 연출자의 공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의 하단은 유리 테이블 위 화병의 그림자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연주의를 재현한 공간이죠. 파란 커튼과 얇은 벽은 이 장면의 한계를 짓는 배경막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막 뒤 작가가 있는 곳은 묘사를 생략하고 배경은 모호하게 추상화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죠.
이전에 호크니가 그린 초상화는 모델의 이름이 곧 작품의 제목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모델은 단지 모델로만 불리며, 당시 호크니의 애인이던 그레고리 에번스(Gregory Evans)인지 옛 연인 피터 슐레진저(Peter Schlesinger)인지조차 애매합니다. 모델은 상대방이 편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되기 위해 다소곳하게 잠든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얼 하고 있을까요? 책상에 놓인 종이는 아직 백지 상태이며, 자화상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합니다.
글. 신혜성(미술평론가)







3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 Acrylic on Canvas, 214×305cm, 1972

상상을 이끄는 어떤 순간
‘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호크니는 런던 왕립 미술학교에 다니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정착한 곳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였습니다. 1963년에 처음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이후 몇 차례 여행을 했고 1976년에는 아예 그곳에서 살기로 했죠. 아마도 고향보다 따사로운 그곳의 햇살에 매료된 모양입니다. 실제로도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의 날씨를 즐기며 느긋한 생활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요? 호크니가 그곳에서 그린 그림 중 잘 알려진 것은 흥미롭게도 로스앤젤레스의 자연이 아닌 교외 주택에 있을 법한 수영장 풍경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수영장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수많은 수영장 그림은 대부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는 야자수나 산이 보이거나 미니멀한 형태의 집이 함께 보이는 수영장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초기에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린 것과 달리, 수영장 그림에는 교외의 일상적 풍경을 감각적으로 담아냈습니다. 도시 풍경은 아니지만 가벼운 일상의 모습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팝아트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단, 호크니의 작품은 다른 팝아트 작품보다 건조한 느낌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죠. 그는 유화보다 빨리 마르는 아크릴물감을 선택해 캘리포니아의 생활과 수영장 풍경을 깨끗한 윤곽선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수영장 그림은 전통적 풍경화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그린 수영장에는 떠들썩하게 노는 사람들이나 화려한 튜브, 물놀이용 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네모난 수영장과 수면에 튀는 물보라 그리고 잠수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호크니를 에드워드 호퍼에게 비견할 만한 건조한 미국 풍경을 그린 작가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작품의 특징은 작가가 관심을 가져온 사진 작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호크니는 앞으로 디지털카메라의 시대가 올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전통적 사진기가 없어질 것을 예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을 즐겨 찍었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아 포토콜라주 형식으로 작업을 하기도 했죠. 바로 그런 점이 수영장 그림에 카메라로 한순간을 포착한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물이 첨벙 소리를 내며 튀는 모습이나 수면 아래에서 수영하는 사람 등 흔한 찰나의 순간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작품 속으로
‘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은 산과 나무가 보이지만 이내 화면에 수평으로 놓인 수영장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호크니의 수영장 작품은 대부분 사건을 묘사하진 않습니다. 어떠한 메시지도 없죠. 그런데 이 작품은 수영을 하는 남자가 있고, 그 위쪽에서 붉은 재킷을 입은 또 다른 남자가 그를 쳐다보는 장면이 마치 특정한 사건이나 관계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에 붙은 또 다른 제목은 ‘한 예술가의 초상’입니다. 과연 누가 예술가일까요? 재킷을 입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수영을 하는 사람일까요? 이 수수께끼 같은 화면에 호크니는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각 인물의 개성이 드러날 만한 장치도 없고, 그저 메마른 듯 깔끔한 화면에 두 인물을 배치했을 뿐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 단순한 그림을 통해 수많은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나요? 이 작품의 매력은 다른 현대미술 작품처럼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다는 점입니다.
글. 허나영(미술평론가)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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