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몬트를 찾아서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LIFESTYLE
  • 2024-05-24

벨몬트를 찾아서

시칠리아의 벨몬트는 어디일까?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에리체.

시칠리아는 영화의 고장이다. <대부>, <시네마 천국>, <말레나>, <그랑 블루> 등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시칠리아를 꼽았지만, 이곳 배경의 영화 속 주인공은 때때로 고향에서 더는 희망을 찾지 못하고 떠나기도 한다.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한 끝에 시칠리아에 도착한 나는 괴테만큼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영화에서 본 명소라고 해봐야 주로 황량한 풍경이고, 최근 몇 년간 극심한 무더위와 불편한 교통, 마피아의 본산이라는 선입견 탓에 망설였지만 결국 카타니아 공항에 내렸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 바사니오는 벨몬트(Belmont)에 사는 포셔라는 여인에게 구혼하기 위해 친구에게 큰돈을 빌린다. 뒷이야기는 각자 몫으로 남기고 여기서는 벨몬트가 어디인지 주목해보자. 벨몬트의 의미는 ‘아름다운 산’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많은 학자가 이를 추론했고, 대부분 베네치아 인근 빌라를 꼽았다. 그중 특이하게도 해리스 제이 그리스턴(Harris Jay Griston)이라는 학자는 먼 시칠리아를 지목했다. 바사니오에게 필요했던 많은 여비와 왕복 기일, 경쟁 구혼자의 면면으로 볼 때 베네치아 근처가 아닌 시칠리아가 적합한 후보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칠리아의 벨몬트 후보지는 어디일까?
팔레르모(Palermo)에서 내륙으로 10km쯤 들어가면 ‘왕의 산’이라는 뜻의 몬레알레(Monreale) 지역이 나온다. 몬레알레에서는 특히 아름다운 성당을 볼 수 있다. 12세기, 시칠리아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노르만의 굴리엘모 2세에게 어느 날 꿈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성당을 지으라고 명한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대성당은 이슬람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재한다. 화려한 내부의 금색 모자이크 벽화는 비잔틴 양식을 따른 베네치아 남쪽 라벤나의 성당과 유사하다. 곳곳엔 굴리엘모가 성모에게 성당을 봉헌하는 조각과 그림이 있는데, 내게는 마치 바사니오가 안토니오의 돈으로 정성껏 마련한 선물로 포셔에게 구혼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물론 포셔가 다른 구혼자를 물리고 바사니오를 선택한 까닭은 돈이 아니라 그의 소박하고 지혜로운 마음 때문이지만.
몬레알레를 벨몬트의 후보로 유보해두고 에리체(Erice)로 향했다. 일찍이 그리스 사람들은 시칠리아 서쪽 끝 아름다운 해안 절벽에 성곽을 짓고 베누스 신을 모셨다. 이곳을 ‘키클롭스(Cyclops)의 고장’이라고 일컫는다.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을 동굴에 가두고 잡아먹던 폴리페모스가 바로 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롭스다. 고고학상 키클롭스의 동굴은 그리스에 있지만(호메로스와 달리 에우리피데스는 이곳 시칠리아로 썼다), 이곳에 거대한 성곽을 지으려면 그의 힘을 빌렸으리라는 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아무래도 벨몬트와 연관 짓기엔 너무 높고 오래된 곳이다.







팔레르모 마시모 오페라극장과 베르디 두상.
타오르미나의 반원형 극장과 에트나 화산.
영화 <대부> 촬영지 중 하나인 사보카의 마을 전경.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영화는 누가 뭐라 해도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감독의 <표범(Il Gattopardo)>(1963)이다. 1958년에 나온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Giuseppe Tomasi di Lampedusa)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니노 로타(Nino Rota)의 베르디풍 음악과 더불어 시칠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용광로처럼 녹여낸다. 배경은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붉은 셔츠의 천인 부대(이탈리아어 ’Mille’)를 이끌고 시칠리아의 부르봉 왕가를 전복할 무렵. 이탈리아 통일의 도도한 물결과 함께 귀족의 특권이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을 직감한 파브리치오 살리나 대공(버트 랭커스터 분)은 가문의 문장(紋章)인 표범을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표범’이고 ‘사자’였다. 자칼이나 하이에나가 우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무릇 ‘표범’은 자칼과 양에 아랑곳없이 스스로 ‘다른 소금’임을 믿어야 한다.” 대공은 조카 탄크레디(알랭 들롱 분)를 딸과 맺어주려 하지만 약삭빠른 탄크레디는 벼락부자이자 속물인 시장의 딸(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분)과 결혼하며 바뀐 세태에 부응한다. 상원의원직을 마다한 대공이 조카의 약혼식 무도회에서 아름다운 약혼녀와 왈츠에 맞춰 춤을 추고 먼저 집으로 향하며 영화는 끝맺는다. 람페두사는 역사를 짊어진 한 사람의 신념을 묵직한 말투로 묘사한다. 지배 세력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모든 것을 유지하고 싶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정신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 속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대공의 영지 팔마 디 몬테키아로(Palma di Montechiaro)를 모델로 한 가상의 지명이다.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뜨거운 태양과 에트나 화산재가 퇴적된 비옥한 토양은 돈나푸가타 와인을 시칠리아 밖까지 널리 알렸다. 돌체앤가바나와 협업한 라벨도 눈길을 끌고, 영화 주인공 카르디날레가 와이너리를 방문해 가족과 찍은 사진도 자랑스레 붙어 있다. 진득한 초콜릿 풍미가 혀를 누르는 와인이 마치 표범의 정기를 품은 듯하다.
고전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팔레르모의 오페라하우스는 랜드마크로 인식된다. 마리오 푸조 원작이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 마지막 편을 이곳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돈 코를레오네(알 파치노 분)는 자기 뜻을 거스르고 오페라 가수가 된 아들의 데뷔 무대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성공리에 막을 내리고 극장 밖으로 나오던 대부는 자신을 겨눈 암살자의 총탄에 딸을 잃고 만다. 그리고 앞선 오페라의 ‘간주곡’이 흐르며 삼대에 걸친 가문의 파란만장한 여정이 막을 내린다. 많은 관객이 기억하는 이 장면은 좀 더 파고들 여지가 있다. 간주곡이 흐를 때 대부의 뇌리에는 가장 소중했던 세 여인과 춘 왈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먼저 첫 신부였던 아폴로니아다. 그녀의 이름은 시칠리아가 그리스 식민지였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두 번째는 아내 케이와 춘 왈츠이며, 마지막 상대는 그의 딸이다. 감독은 3개의 회상 장면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으로 연결했다. <표범>의 격언에 빗대면, 사랑도 음악도 모두 바뀌었지만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에 매인 꼭두각시 삶은 그대로인 것이다. <표범>의 베르디 왈츠에 상응하는 장면 아닌가! 젊은 날 <대부>의 마이클 코를레오네는 아버지의 저격과 맏형의 암살 탓에 진로가 꼬인다. 그가 시칠리아로 피신 왔다가 엉겁결에 결혼식까지 올린 마을은 구불구불 산간의 사보카(Savoca)다. 이곳이야말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어울릴 법한 풍경이다. 마을 어귀에는 코폴라 감독의 실루엣이 카메라로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형물이 있고, ‘달콤한 인생’이라 이름 붙인 삼륜차는 관광객을 태우고 언덕을 오르내린다. 씁쓸한 소나기가 흩뿌리나 싶더니 금세 햇살이 무지개를 앞세워 다시 나타났다. 아름답긴 해도 벨몬트라기엔 까마득한 오지다.
타오르미나(Taormina)의 로마 극장은 천혜의 입지에 자리해 있다. 두 산봉우리 사이의 분지를 무대로 자연적인 관람석이 펼쳐지고, 눈앞엔 바다, 오른쪽으로는 에트나 화산 아래 시가지가 보인다. 이곳에서 괴테는 <오디세이아> 중 ‘나우시카의 이야기’를 극화할 구상을 했다. 파이아키아의 공주 나우시카는 난파선에서 떠밀려온 오디세이아를 구해주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고향행을 택하자 단념한다. 괴테는 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쓰려다 완성하지 못한다. 대신 시칠리아에 가져온 희곡 <토르콰토 타소(Torquato Tasso)> 원고를 마무리하는 데 박차를 가한다. 괴테는 16세기 문예부흥의 중심지였던, 페라라의 궁정 시인 타소의 삶을 조명한 이 작품을 통해 바이마르의 궁정 시인이자 고관이던 자신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자문자답한다. 실제로 타소는 만년에 정신이상으로 투옥되고, 나중엔 떠돌이 신세로 지내다 쓸쓸하게 죽는다. 그러나 신분 제약을 넘어선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와 그 창작의 고뇌에 대한 괴테의 결말은 열린 것이다. 그는 시칠리아 현지 안내인이 한니발의 격전지를 소개하며 뿌듯하게 여기자 과거와 현실을 함부로 뒤섞지 말라며 나무란다. 자신은 작품 안에서 호메로스와 타소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면서 안내인에게는 최소한의 상상력조차 허락하지 않은 것. 역사에 대한 평가는 범인의 몫이 아니라는 태도는 어쩐지 권위적으로 보인다. 괴테의 성품은 작품의 위대함에 미치지 못한다. 나 또한 <표범>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가이드가 못마땅하지만, 괴테를 떠올리며 널리 이해하려 했다. 내가 너무 멀리 간 탓이다. 다음 행선지인 아그리젠토(Agrigento)와 시라쿠사(Siracusa)에 벨몬트 비슷한 곳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영화 <표범> 중 약혼식 무도회 장면.
팔레르모 마시모 오페라극장 천장화.
몬레알레 성당 내부.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