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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0

빛과 노래의 포옹

한국과 EU 수교 60주년을 밝힌 브뤼셀의 미디어 파사드.

북유럽 특유의 차가운 공기 속에 비를 품은 바람이 간간이 옷자락을 흔들던 2023년 11월 브뤼셀의 밤. 스산한 어둠에 잠겨 있던 생캉트네르 공원 개선문이 일순간 환한 빛으로 휩싸였다. 이어 30만m²에 달하는 거대한 공원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와 함께 음악이 울리자, 이에 호응하듯 개선문 양옆으로 날개처럼 펼쳐진 아케이드 기둥과 벽면에 빛의 춤사위가 번져나갔다. 빛의 조각이 개선문 위로 퍼져나가는 순간, 웅장했던 음악은 서사적 클래식으로 바뀌었다. 이와 흐름을 같이하던 빛의 드라마 또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갔다. 암흑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개선문에 펼쳐진 빛으로 가득했던 미디어 파사드 공연은 약 6분간 다양한 서사를 통해 평화와 공존,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먹물이 번지듯 어둠 속에 떨어진 빛의 덩어리가 물감처럼 퍼지며 주위를 밝히는가 하면, 중세시대 벽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땅에서 피어나듯 아래에서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다 한순간 날카로운 빛줄기가 빗방울처럼 개선문 위로 내려앉아 주위를 밝히며 그 모든 그림을 환한 빛 속으로 삼켰다. 이 웅장한 서사가 하이라이트로 치달은 것은 개선문 양쪽에 위치한 아케이드를 캔버스 삼아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며 중앙으로 모여드는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이었다. 빛 그림자가 만들어낸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고 급기야 거대한 군중을 이루는 순간, 개선문을 가득 채운 화면은 불멸을 상징하는 불사조 날개로 변했다. 작가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인 공원을 무대로 정하고 그 입구에 자리한 개선문에서 많은 사람이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화합하는 과정을 미디어 파사드로 선보임으로써 평화와 공존, 미래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전했다.





한국과 유럽연합(EU) 수교 60주년을 기념한 프로젝션 매핑 & 사운드 작업 ‘Embrace of Lights’를 이끈 주인공은 작가 리경이다. 그녀는 주로 빛을 매개로 한 설치 작업을 하는 설치미술가로,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선보인 고(故) 백남준 작가와의 2인전을 비롯해 2014년 에르메스 긴자 미술관에서 치른 개인전으로 미술관 설립 이래 최다 관객 수를 기록했다. 또 독일 현대미술관 ZKM, 광주·부산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인 굵직한 이력의 소유자다. 지난 11월 16일부터 22일까지 열린 한국과 EU 수교 60주년 기념 프로젝션 매핑 & 사운드 작업은 그런 그녀에게도 그간의 작업 중 최대 규모 프로젝트였다. 전시 기간은 7일, 준비 기간은 1년 조금 넘게 걸렸다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작가 리경이 선택한 캔버스는 생캉트네르 공원의 개선문. 벨기에 독립 50주년을 기념해 1880년 레오폴드 2세가 건축한 상징적 건축물로, 그동안 그 어떤 아티스트에게도 내어준 적 없는 공간이다. 이 기념비적 작업을 축하하기 위해 또 한 사람의 위대한 한국인 아티스트가 힘을 보탰다.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가 오프닝 공연에 합류한 것. 조수미는 문화, 인종과 관계없이 함께 나아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은 공연 취지에 맞게 안락한 공연장이 아닌 차가운 밤공기로 가득한 야외 무대에 기꺼이 올랐다. 팬들은 물론, 우연히 공원을 거닐다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었을 관객 모두에게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선물한 것이다. 조수미가 직접 선정한 네 곡은 저마다 의미가 다르다. 처음 선보인 엔딩곡 ‘Love Love’는 인류의 화합과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이어 교포들에게 힘을 줄 ‘I am a Korean’과 그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Impossible Love’를 선보였다. 또 벨기에 국민이 사랑하는 카운터 테너 도미니크 코르비오(Dominique Corbiau)와의 듀엣곡 ‘Barcarolle’를 통해 한국과 EU의 우정을 상징하는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생캉트네르 공원은 EU 본사 건물 인근에 자리한다. 유럽을 연합하는 곳, 나아가 세계인과 공존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상징적 기관인 EU를 마주한 개선문에서 열린 오프닝 공연에는 브뤼셀 시민과 교포들이 모여들었다. 불이 꺼지고 카운트와 함께 프로젝션 매핑이 시작되는 순간, 일부 관객은 “이곳에서 한국인 작가가 이런 작업을 해냈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초겨울 보슬비에 옷을 적시면서도 축하 공연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조수미가 ‘I am a Korean’을 부르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그녀를 향해 흔들어 보이던 교포를 통해 우정이라는 키워드 아래 한국에 대한 자부심과 응원의 메시지로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고자 했던 두 예술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전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INTERVIEW 
EU 본부가 위치한 브뤼셀에서 한국인 아티스트들이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번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리경 시작은 벨기에 한국문화원의 제안에서 비롯되었어요. 한국과 EU 수교 60주년을 기념한 프로젝트를 제안했죠. 뜻깊은 프로젝트인 데다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메시지가 즉각적으로 떠올라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젝션 매핑 & 사운드 작업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특정 국가의 만남이 아닌 다른 문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만나 연대하고 화합하고 어우러지는 것에 대한 내용이에요. 제가 늘 예술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죠. 조수미 저는 1983년부터 유럽을 주 무대로 활동했어요. 처음 유럽에서 활동할 무렵에는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도 많지 않았어요. 요즘은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한국 아티스트를 만나면 힘이 닿는 선에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리경 작가를 만났을 때 작업의 의미와 작가 개인의 도전정신에 마음을 뺏겼어요.
리경 작가가 이번 프로젝트를 착수한 후 두 분의 만남이 성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수미 소프라노가 축하 공연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수미 아티스트로서 제 미션 중 하나는 우리나라를 알리는 것, 뛰어난 우리나라 아티스트들을 돕는 거예요. 그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더 활발히 활동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고요. 이 과정을 통해 제가 우리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무엇보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계기는 리경 작가의 작업에 감흥하고 공감한 것이 가장 컸고요. 리경 조수미 선생님의 이런 전적인 지지가 큰 힘이 되었어요. 공연을 알리는 데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도요. 프로젝트를 제안받고 떠올린 키워드가 평화, 공존, 미래였어요. 이 메시지들은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전파해온 가치와 중첩되었죠. 같은 것을 추구했기에 다른 작업을 해온 저희 두 사람이 손을 잡을 수 있었어요.
브뤼셀 생캉트네르 공원 개선문이 이번 작업의 캔버스가 되었습니다. 벨기에 독립 50주년을 기념해 완성한 이 상징적 건축물을 프로젝트 공간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리경 개선문은 브뤼셀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배경 때문이 아니예요. 모두에게 열린 화합의 장소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벨기에 수도이기도 하지만, EU 본부가 위치한 곳이잖아요.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죠. 이들을 감싸 안듯 아케이드형으로 휘어진 개선문 양옆 구조가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좋았지만, 건축적 구조도 재미있었어요. 이미 하나의 설치 작품 같았거든요. 이번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생각했어요.
프로젝션 매핑은 7일간 이어지지만, 축하 공연은 하루밖에 만날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조수미 소프라노가 들려준 네 곡은 직접 골랐다고 들었는데, 어떤 기준으로 선정한 건가요? 조수미 ‘Impossible Love’는 리경 작가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선정했어요. ‘I am a Korean’은 교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 택한 곡이고요.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에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고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골랐습니다. ‘Barcarolle’는 벨기에 성악가 도미니크 코르비오와 함께 공연함으로써 예술을 통해 우정을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죠. ‘Love Love’는 윤자은 음악감독과 함께 이번 공연을 위해 만든 곡이에요. 이곳에서 세상에 첫선을 보였어요.
공연하는 아티스트도 관객의 에너지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이번 공연에서 힘을 받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조수미 ‘I am a Korean’을 부를 때였어요. 40년간 해외 생활을 하면서 한순간도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어요. 그 곡을 부를 때 제 삶의 가치이자 목적이기도 한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힘이 전해지기를 원했죠. 타국에서 생활하면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면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응원해요. 그 마음이 관객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어요. 리경 제게도 ‘I am a Korean’은 개인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 같았어요. 이 공연을 위해 만들어주신 ‘Love Love’ 또한 뜻깊은 선물이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많은 분이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요. 리경 미디어 아트라는 특수한 예술을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조수미 선생님은 물론, 음악을 작곡한 윤자은 감독님과 김종민 작곡가님을 비롯해 사운드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는 야외에서 완벽한 음이 나올 수 있도록 한국에서 벨기에까지 와 준 황병준 음악감독님까지 감사한 분이 너무 많습니다. 머릿속에 있던 영상을 구현해준 한국의 스튜디오는 말 할 것도 없고요. 무엇보다 프로젝트 진행의 전 과정을 매니징한 홍시 작가의 조력이 너무 컸고요. 그들이 없었다면 이 작업이 얼마나 더 힘겹고 어려웠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죠.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준 두 분의 시너지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미래의 어떤 프로젝트를 기대하면 좋을까요? 리경 조수미 선생님과 둘이 나눈 꿈이 있어요. 언젠가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열어보고 싶어요. 조수미 꿈은 좀 크게 그려도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하면 재미있겠다, 이런 걸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나누면서요. 운명이 어떤 꿈을 허락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 스스로는 뭔가를 바꾸고 싶고 도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 거죠. 이루고 싶고,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벌써 이집트에 가면 어떤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걸요.(웃음) 우리 모두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계속 꿈을 꾸면 좋겠어요. 그렇게 꿈꾸다가 이루어지면 더 좋잖아요.





 

에디터 남미영(denice.n@noblesse.com)
사진 여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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