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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9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 세 권.

최근 책을 둘러싼 물리적 시간을 되돌린 신간이 출시돼 눈길을 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사전적 의미의 신간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이미 출판된 적 있는 책의 본문은 그대로 둔 채 표지와 레이아웃만 바꿨기 때문. 일종의 ‘리커버 마케팅(recover marketing, 유명 책의 표지를 새롭게 디자인해 판매)’으로, 이는 독자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이러한 ‘같은 책, 다른 표지’의 핵심은 출판계 큰손으로 자리 잡은, 비주얼을 중시하는 2030 세대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 덕분에 책은 단순 인쇄물을 넘어 디자인·패션 등 여러 분야와 협업하는 매체로 거듭났다. 그렇다고 책의 본질을 잃은 건 아니다. 책을 읽으며 책이 쓰인 시대의 분위기에 동화되고, 당시 시선이 여전히 유효한지 살펴보는 것은 예전 그대로다. 다시 말해,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책을 통해 우리네 삶을 톺아본다는 뜻. 이를 경험할 수 있는,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책 세 권을 소개한다.
첫째는 시인 김소월과 화가 천경자의 시.그림집 <진달래꽃>(문예출판사 펴냄). 1958년 천경자가 <소월시선> 표지에 진달래꽃을 그린 이후 65년 만에 두 거장이 재회했다. 김소월과 천경자는 꽃과 여인, 슬픔이라는 주제를 공유하지만 묘사하는 방식은 상이하다. 김소월의 어조는 애절하고, 천경자의 화풍은 가슴이 아릴 만큼 날카롭다. <진달래꽃> 내지를 예로 들면, 김소월이 시 ‘봄밤’에서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어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섧고 그리운 새카만 봄밤”이라고 읊조리며 봄 문턱에 선 화자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과 달리 옆 페이지에 게재된 ‘노오란 산책길’(1983)에서 천경자는 검은색 옷, 색이 변해가는 나뭇잎을 활용해 계절의 경계를 명징하게 표현한다. <진달래꽃>에 관해 문학평론가 정재찬은 “김소월은 자기가 처한 슬픈 현실을 개혁하고자 적극적 의지를 보이지는 않으나, 현실에서 도피해 꿈 혹은 퇴폐 세계에서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라고 설명하는데, 그의 말마따나 어떤 사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대 같은 청춘의 마음은 만고불변의 소재인 듯하다.
둘째는 2004년 작 소설이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라 화제가 된 천명관의 <고래>(문학동네 펴냄). 책은 노파-금복-춘희로 이어지는 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근간으로 하지만 걱정, 쌍둥이 자매, 생선 장수, 약장수, 철가면 등 인물이 얽히고설킨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20세기 중반을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서글픈 삶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라는 구절.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 역시 특정 결과만을 보고 상대를 가늠하는 행위가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리라. 한편, 흥미롭게도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고래>의 표지는 세 가지다. 하나는 붉은 물결(첫 출간), 다른 하나는 흑백 그림(한국문학 전집), 그리고 얼마 전 3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선보인 표지. 세 가지 버전을 나란히 놓으니 폭풍의 소용돌이에서 깨달음을 얻는 소설의 플롯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마지막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디자인이음 펴냄). 2017년에 선보인 손바닥 크기의 문고판에 겉표지를 씌워 재출간했다. <변신>의 주된 뼈대는 어느 날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와 그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가족이 겪는 갈등이다. 가족을 끔찍이 여기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뒤 그의 헌신과는 반대로 가족에게 미움을 받는다. 심지어 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벌레가 된 오빠를 보며 여동생은 소리친다. “오빠가 맞는다면 제 발로 나가야 했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오빠가 없는 게 되겠지만, 그래도 오빠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며 살았을 거라고요.” 그레고르는 정녕 무엇을 위해 애쓴 것일까? 만약 내가 존재 가치를 잃는다면, 나와 이어진 사람들과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변신> 겉표지 앞부분은 작은 점이 이어져 있고 뒷부분은 이들이 산란하는 모양새인데, 점들의 위치가 변화하는 것을 보노라면 느슨해진 오늘날 사람 사이의 유대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종용하는 것 같다.

 

에디터 박이현(hyonism@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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