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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4

대를 잇는 헌신

역사 속 텍스타일의 요람이자 실천적 문화 기관을 꿈꾸는 안토니오 라티 재단.

빌라 오모에서 열린 전경. Courtesy of Fondazione Antonio Ratti, Photo by Agostino Osio

 INTRO 
악명 높은 기교로 이름을 남긴 전설적 피아니스트이자 ‘교향시의 완성자’라 불리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이탈리아의 코모 호수를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에 겨운 두 연인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면 코모 호수의 둑을 배경으로 하자.” 이렇듯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아름다운 호수는 역시나 만인에게 사랑받는 휴양도시 벨라조를 기점으로 두 갈래로 나뉜다. 둘 중 서쪽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자연의 축복을 한껏 받은 경관을 자랑하는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코모를 만날 수 있다. 코모의 중심가에서 버스로 약 10분만 가면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네오클래식 양식의 빌라 수코타(Villa Sucota)가 보이는데, 바로 이곳에 안토니오 라티 재단(FAR) 본부가 있다. 실크 생산 기술을 배우며 업계에 발을 내디딘 사업가이자 컬렉터 안토니오 라티는 수십 년에 걸쳐 몰두한 직물 사업의 성공을 기반으로 1985년에 비영리 예술 재단 FAR을 설립한다. 직물뿐 아니라 디자인과 미술에도 꾸준히 관심을 둔 그가 작고한 후에도 FAR은 창립자의 열정과 사명을 이으면서 나아가 젊은 예술가의 실험과 도전을 지원하고 있다.

 TEXTILE COLLECTION 
2002년, 창립자의 딸 안니 라티(Anni Ratti)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으며 현재 위치로 이전한 FAR은 무려 3만 개가 넘는 앤티크 직물 컬렉션을 자랑한다. 재단 도서관에서는 직물, 패션, 시각예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7800권이 넘는 다양한 서적을 대중에게 기꺼이 공개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직물일까? 물론 안토니오 라티의 사업 분야이기도 하지만, 넓게는 코모의 산업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원래 실크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서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유럽 귀족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역 상인들이 자체 생산 방법을 연구했고, 초창기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에서 조금씩 생산한 실크가 14세기부터 코모 호수 주변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누에고치의 주식인 뽕나무 서식지에 따라 발달한 산업 경로, 호수가 주는 유통의 이점, 도시 바로 아래 예술과 문화, 상업의 중심지 밀라노가 있다는 점도 코모 지역의 직물 산업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건재한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차례 전쟁을 치르고 사회적·산업적 환경이 변하면서 많은 직물 공장이 사라졌지만, 코모는 여전히 최고의 자카드 생산지로 손꼽힌다. 밀라노 패션 산업을 대표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패션 위크를 준비하며 시즌마다 최상의 재료를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FAR 컬렉션은 이런 이탈리아 직물 산업의 역사와 유산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50년대에 안토니오 라티가 시대에 상관없이 다양한 직물을 수집한 덕분에 컬렉션은 고대 이집트 원주민을 뜻하는 ‘콥트(Copt)’와 미국 원주민의 직물, 이탈리아산 벨벳, 인도와 유럽의 캐시미어, 프랑스 실크, 쿠바산 직물, 중앙아시아의 이카트, 프린트 면직물, 일본 기모노 원단 등 8개 카테고리로 묶은 샘플 3300여 개를 보유 중이다. 지난 200년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산, 유통된 산업 직물의 샘플 북도 3000여 개나 갖고 있다. “저는 살면서 다양한 미술관을 방문해 창의적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하길 바랍니다”라는 안토니오 라티의 말을 증명하듯, 컬렉션은 원단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역할을 하며 동시에 직물 전문가, 예술가, 디자이너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물론 대중을 위한 투어도 제공한다.





안토니오 라티 재단이 보유한 텍스타일 모음. Courtesy of Fondazione Antonio Ratti, Photo by Agostino Osio

 Architecture & SCULPTURE PARK 
FAR을 대표하는 건축물 빌라 수코타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완공한 네오클래식 건축양식의 정석을 보여준다. 과거 나폴레옹의 주치의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이곳에 거주했으며, 물리학자 피에트로 콘필리아키(Pietro Configliachi)도 한때 빌라 수코타의 소유주였다. 시간이 흘러 현재 빌라 수코타는 FAR 본부로 쓰이고 있다.
역사의 산증인이 스쳐 간 건축물, 직물과 도서 컬렉션 외에도 지리적 이점을 살린 조각 공원이 볼만하다. 조각공원은 코모 호수 주변에 있는 상아색 빌라 올모(Villa Olmo)와 빌라 델 그루멜로(Villa del Grumello)의 정원 등을 연결하며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고 자연을 벗 삼아 활기찬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조각 공원에는 장소 특정적 설치 조각품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예술, 건축, 자연의 통합을 꿈꾼 창립자의 의지에 따라 모든 작품은 FAR과 수년 동안 협업해 탄생했다. 영구 설치 작품과 일시적으로 설치한 작품이 공존한다. 조형과 공간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공원 환경에 절묘하게 스며든 작품들은 방문객과 자연스레 상호작용한다. 역사적 유산인 건축물, 코모 호수와 주변 경관이 선사하는 눈부신 배경, 현대적 조형물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모습은 그 자체로 장소 특정적 미술 작품이다.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일요일 오픈하는 조각 공원은 지도에 표시된 노란 점을 따라 관람해보자. 1번의 유럽풍 정자에서 아래 호수를 감상한 뒤 노란 점을 따라가며 작품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면 그 길 끝에 온실이 기다리고 있다. 여유를 갖고 빌라 수코타의 건축적 유산과 코모 호수가 선사하는 느긋함, 현대미술의 예술적 감각까지 충만하게 누리기 바란다.

 PROJECT 
FAR은 예술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특히 1995년부터 안니 라티의 지휘로 해마다 운영하는 아티스트 리서치 랩 CSAV는 젊은 예술가를 물심양면 돕는 대표적 프로그램이다. 시각예술에 대한 실용적·이론적 지식의 범위를 더욱 확장하고자 20여 명의 작가를 선발해 7월 셋째, 넷째 주에 코모에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열고 실험적 워크숍을 진행한다. 올해도 영국 작가 힐러리 로이드(Hilary Lloyd)의 리드로 다양한 예술가가 서로 작품을 크리틱하고, 관련 리서치를 진행할 예정이다. 재단의 거점인 빌라 수코타가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예술을 넘어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슈를 공유하며 폭넓고 깊이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는 심포지엄도 개최한다. FAR은 문화 예술 기관이 지향해야 할 목적과 수단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동시대가 당면한 사회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보며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실천적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안토니오 라티 재단이 자리한 빌라 수코타 파크.

 TRAVEL TIP 
코모는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에 인접한 알프스산맥 남쪽 기슭에 있는 도시다. 즉 바다처럼 깊은 코모 호수와 알프스산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뜻. FAR을 찾아 예술을 한껏 즐긴 뒤 바로 알프스산맥을 만끽하고 싶다면 산악열차 푸니쿨라(Funicular)를 타자. 단숨에 브루나테산 정상으로 갈 수 있다. 평균 560~1000m 고지에는 주민 1700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는데, 이들은 1894년에 처음 생긴 푸니쿨라를 타고 시내에 내려와 물건을 사고팔며 생활을 이어갔다고. 산 정상에서는 코모 호수와 주변 지형, 마을뿐 아니라 호수 건너편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멋진 풍경이 펼쳐지니 반드시 올라가볼 것. 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 티라노행 열차를 타고 고즈넉한 바렌나로 떠나자. 가장 아름다운 코모 호수의 전망을 담을 수 있는 이곳에서 수상버스를 타면 벨라조에도 단 10~15분 만에 갈 수 있다. 벨라조가 얼마나 독특한 마을인가. 독재자 무솔리니가 그 아름다움에 반한 곳이자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 부부가 음악적 영감을 펼친 곳 아닌가. 배우 조지 클루니의 별장도 여기에 있다. 북유럽의 목가적 풍경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인 붉은 벽돌 지붕과 빛바랜 파스텔 톤 건축물은 그야말로 동화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코모시는 밀라노에서 기차로 1시간, 편리한 교통편을 자랑한다. 밀라노를 방문한 뒤 FAR로 당일치기 근교 여행을 떠나는 루트를 권한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코모역까지 약 1시간에 한 대 있는 기차를 타고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C10 버스를 타면 단 10분이면 FAR에 도착한다. 가는 길에 빌라 올모에 내려 초록빛 오솔길(The Green Path)을 따라 FAR까지 산책하는 루트도 추천하지만, 중앙역에서 재단까지 쭉 걸어도 좋다. 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호수와 하늘을 감상하고, 이탈리아에 왔으니 카페에 들러 멋들어진 풍경을 배경으로 즐기는 에스프레소 한잔도 놓치지 말자.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윤효정(프리랜서)
사진 제공 안토니오 라티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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