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끊임없는 시도와 도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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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7

작가들의 끊임없는 시도와 도전

지난 근대, 현대미술은 눈부신 작품들로 가득했다. 작가들의 아름다운 행보들.

단색화의 미덕, 김기린
(1936~2021)


Inside, Outside, 캔버스에 유채, 162.5×130.3cm, 1987
이미지 제공 갤러리현대





Inside, Outside, 캔버스에 유채, 55×81cm, 2008
이미지 제공 갤러리현대

1936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1961년 생텍쥐페리에게 매료되어 프랑스로 막 건너갔을 때만 해도 김기린은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그가 화업으로 마음을 돌린 건 언어의 장벽 때문. 자신이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표현하기에 프랑스어는 한계가 있었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고, 이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와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의 초기 작품에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평면에 대한 관심 등 당시 캔버스 앞에 선 작가의 심리가 그대로 읽힌다. 이후 회화의 평면성에 심취했는데, 회화의 깊이감을 새롭게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에 들어 평면 안에 또 다른 평면을 앉히고 서로 다른 원색의 대립으로 공간감을 형성한 연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평면에 대한 작가의 다차원적 접근이 돋보인다. 평면에 대한 탐구는 1980년대 이후 단색과 점을 통한 명상적 태도로 뻗어나갔다. 점은 회화 속 새로운 기본 단위로 기능했는데, 그의 작품을 단색화의 영역에서 해석하기 시작한 것도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반복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점을 찍은 건 어떤 사조에 포함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형상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림을 볼 때, 마음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입니다. 불필요한 요소를 떨쳐버리고 단순한 움직임으로 색을 캔버스에 올려놓았을 때, 우리 인간이 그러하듯 점 하나하나가 같은 듯 다른 느낌일 때,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용하게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듯 그림을 마주할 관람객을 배려하는 태도는 그가 그림이라는 수행 속에서 찾은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화단의 이단아, 권영우
(1926~2013)


무제, 한지, 121×94cm, 1982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무제, 캔버스에 한지, 117×91cm, 2000년대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권영우의 족적은 선명하다. ‘화단의 이단아’, ‘종이의 화가’, ‘단색화의 선구자’ 등 그에게 따라붙은 수식어는 그의 작품이 어떤 전환기를 맞이할 때마다 등장한다. 작품 세계의 변천사를 읽는 중요한 단서인 셈. 1946년 해방 직후 그는 처음 개교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며 1세대 해방 작가로서 화단에 들어섰다. 그의 초기 작품은 전통적 동양화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종이, 수묵 등 재료와 표현 기법 면에서 동양화의 영향이 보이나 색채와 선의 사용, 구도와 주제에서는 전위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단아’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바닷가의 환상’이라는 작품으로 195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수상하면서. 서구의 초현실적 화풍과 한국화의 결합은 당대 화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에도 그는 한국화의 모더니즘을 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1960년대 이후 그의 관심사는 종이, 즉 한지의 사용이었다. 한지를 찢고, 뜯고, 바르고, 켜켜이 쌓는 수행적 태도로 작업에 임한 결과 탄생한 것이 단색화의 시조인 백색화. 그가 구축한 한국적 추상회화의 새로운 형태는 당대 화단에서 비난을 사기도 했다. 먹과 붓을 사용하지 않는 그의 작업을 회화 그리고 한국화의 영역에 들일 수 없다는 것. 그런 비판적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의 화가는 묵묵히 종이를 붙여나가며 독자적 리듬감과 조형미를 불어넣은 추상회화 세계를 만들어갔다. 1970년대 말 그는 종이로 이룩한 회화에 과슈와 먹을 활용해 채색회화로 회귀한다. 반복적 행위의 결과물 위에 단색조의 색감을 입혔다. 종이의 화가가 단색화의 선구자가 된 순간. 동양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파리 퐁피두 센터가 그의 작품을 영구 소장할 만큼 당대보다 오늘날 더욱 주목받는 작가 권영우. 생전에 남긴 “작업을 안 하면 살 이유가 없다”라는 말은 그가 많은 수식어에 앞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그저 작가’임을 상기시킨다.





동양에서 온 에콜 드 파리, 이성자
(1918~2009)


눈 덮인 보지라르 거리, 캔버스에 아크릴릭, 73×116cm, 1956, 개인 소장
이미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누군가 그랬다. 용기란 겁이 나도 하는 것이라고. 1951년 혈혈단신으로 프랑스 파리를 향하던 그 순간, 이성자 화백의 심정이 그랬을까? 12년 결혼 생활 끝에 그녀가 마주한 것은 남편의 외도 그리고 세 아들과의 이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가 일었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슬픔과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파리행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다시 태어나고자 했다. 일본 짓센 여자대학에서 공부한 가정학 전공을 살려 의상디자인학교에 입학했지만, 주변에서도 알아볼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다. 1953년 그녀는 파리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모더니스트 앙리 고에츠(Henri Goetz), 이브 브라예(Yves Brayer), 오시 자킨(Ossip Zadkine)을 사사하며 추상화와 구상화, 조각을 익혔다. 무엇보다 일본과 한국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동양적 유산 위에 그녀가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성자는 구상보다는 추상화에 관심이 많았다. 1958년 파리 라라 뱅시 갤러리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1960년대 말까지 제작한 ‘여성과 대지’ 추상화 연작은 당대 파리 화단에서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평론가 조르주 부다유(Georges Boudaille)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파리에 모인 외국인 예술가 집단과 파리의 예술적 전성기에 기여한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의 부활이라고 호평했을 정도. 당대 프랑스의 유명 갤러리인 샤르팡티에 갤러리와 생테즈 갤러리의 관심과 인정 속에서 개인전 개최로 이어졌다. 도불을 결정한 후 불과 5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고, 10년 차에 들어서며 프랑스 화단에 단단히 뿌리내린 이성자 화백에게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전통과 현대 등의 대립 요소와 조화는 단순히 작품의 주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생을 쫓아다닌 질문거리였고, 정체성을 탐구하고 정립하기 위한 지난 시간의 시각적 결과물이었다. 국적도, 정체성도 그 경계가 무의미해진 오늘날, ‘은하수’라는 작업실 이름처럼 먼 우주로 돌아간 그녀가 또 어디서 유목민적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일상의 낭만, 장욱진
(1917~1990)


가로수, 캔버스에 유채, 45.5×27.3cm, 1957
이미지 제공 현대화랑





길, 캔버스에 유채, 30.5×22.8cm, 1975
이미지 제공 현대화랑

“나는 심플하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표적 미니멀리스트로 꼽히는 화가 장욱진의 그림에는 친근함과 소박함이 묻어난다. 집, 가족, 나무, 새, 소 등 자연과 일상 소재를 작은 화폭에 담은 그의 그림은 자칫 마냥 단순하고 쉬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장욱진은 일제강점기에 명문 미술학교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니고,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서 수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졸업한 후에는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 1세대 서양화가의 계보를 이어 2세대 서양화가의 대표 주자로 주목받았다. 해방 이후 1947년에는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등과 함께 최초의 추상미술 그룹 ‘신사실파(新寫實派)’를 결성, ‘새로운 사실(寫實)을 표방한다’는 기치 아래 1952년까지 여러 차례 동인전에 참여했다. 또 국전 추천 작가부터 초대 작가, 심사위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는 등 한국 현대미술 격변기의 중심에 서 있던 핵심 인물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 부와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다. 1960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그는 화가 장욱진의 삶으로 돌아갔다. 특히 화가로서 그의 생은 화실을 짓고 머무른 양주 덕소, 서울 명륜동, 충북 수안보, 용인 마북동을 따라 구분하는데, 어느 시기에나 집과 가족, 자연과 동물을 그림에 등장시켜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이상향을 추구했다. 그의 그림 속 일상적 이미지는 재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불필요한 것은 덜어내고 최소한의 선, 면, 색으로 대상의 정체를 파헤쳤다. 소박한 구상과 조형적 추상 사이를 오가며 감정과 마음을 손바닥 크기의 화폭에 압축했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서 다 써버릴 작정이다”라는 삶의 소회와 화가로서 다짐은 물질과 자본에 잠식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독자적 채색화의 길, 천경자
(1924~2015)


생태, 종이에 채색, 51.5×87cm, 1951,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미지 제공 서울특별시





여인의 시 II, 종이에 채색, 60×44.5cm, 1985,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미지 제공 서울특별시

비록 20세기 한국의 현대미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녀’와 얽힌 ‘미인도’ 위작 스캔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터.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의 이야기다.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녀의 본명은 천옥자(千玉子). 오늘날 알려진 경자(鏡子)라는 이름은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스스로 지은 것이다. 당시 일본 열도를 휩쓴 서양화와 추상미술의 열풍 속에서도 그녀는 일본화 전공을 선택했다. 특히 일본 인물 화가 고바야카와 기요시의 지도 아래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섬세한 인물 채색을 수학했다. 활동 초기에 그녀는 일본화풍으로 그린 인물 구상회화를 주로 선보였는데,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선한 ‘조부(祖父)’와 ‘노부(老婦)’가 대표작이다. 일본화풍은 차치하더라도 그녀가 인물화와 채색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광복 이후 그녀의 그림은 일본색이 짙다는 이유로 주류 화단에서 배격되곤 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녀는 새로운 한국적 채색화 정립을 위해 다양한 시도와 경험에 나섰다.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 동문인 우향 박래현이 이끄는 백양회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남태평양, 유럽, 미국을 여행하며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1972년에는 베트남전 종군 화가로 맹호부대에서 머무르며 전쟁과 전쟁터의 풍경을 담았다. 작품의 소재도 남달랐다. 재현과 상상 그리고 상징의 경계 위에서 뱀, 꽃, 담배, 여인을 등장시키며 작가의 시선, 내면의 욕망과 의식, 환상적이지만 서글픈 삶의 정서를 그렸다. 이렇듯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 화풍을 이룩한 천경자의 작품 세계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 중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시선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향해 있기보다 여전히 위작을 둘러싼 진실 공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20세기 미술계의 주류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과 세계를 꾸준히 개척한 천재 화가의 작업적 성과를 이제는 먼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이정훈(미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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