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여지는 한국 근대미술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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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3

다시 쓰여지는 한국 근대미술

단색화'로 대변되는 한국 근대미술은 들여다볼수록 다양하고 폭 넓은 작품과 작가들로 즐비하다.

이중섭의 ‘애들과 물고기와 게’는 1950년대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복에서 청바지로 점프하듯
한 젊은 작가와 한국 근대미술에 대해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필자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재미있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복을 입다가 바로 청바지로 갈아입은 것처럼 행동하잖아요. 분명 그랬을 리 없는데 말이죠. 왜 우리는 한복과 청바지 사이에 무엇을 입었는지 알지 못하죠? 왜 우리는 조선시대에 살다가 갑자기 현대로 온 것 같은 교육을 받았을까요?” 조선시대와 현대 사이, 그러니까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정은 십분 이해가 간다. 일본제국의 통치 아래 억압적이고 이중적인 사회구조를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감내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많은 이가 이 시대를 그저 ‘암흑’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고 만다. 이 시기의 미술을 논할 때 걸림돌도 너무 많다. ‘친일’과 ‘월북’이 대표적이다. 일제가 우리를 통치한 것은 그 치하에서 살아간 사람들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좌우 갈등을 극한으로 몰아가 분단을 고착화한 것도 개인의 선택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시대를 알고 더불어 살아간 사람들에게 친일이나 월북 문제는 부분적으로 용인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지나치게 정치화하면서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쨌든 시대는 바뀌어 이제 한국 문화가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K-팝부터 드라마와 영화, 심지어 한글까지. 그러더니 이제는 예술도 화제다. 2022년 9월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한국 근대미술을 주제로 대규모 기획전이 열린다. 이른바 ‘서구’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 주제전으로는 처음이다. 2023년에는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한국
실험 미술을 주제로 전시를 연다. 그뿐인가. 단색화 열풍에 힘입어 1970년대 이후 한국 작품은 이제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미술관과 컬렉터에게 팔려간다. 미국에서 한국 미술사를 가르치는 한국계 교수들은 미국인 학생들이 이제 일본도, 중국도 아닌 한국 미술을 주제로 택해 리포트를 쓰느라 열심히 구글 번역기를 돌린다고 한다.
현재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아직 1970년대 이후 단색화에 대한 관심에 머물러 있고 한국 미술 시장도 지나치게 이 시대에 한정적으로 폭발적이지만,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았으면 한다. 단색화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복을 입다가 갑자기 청바지를 입은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고희동이 1915년에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종우의 ‘누드 남자’는 1926년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49년 장욱진은 ‘독’이란 작품을 발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희동부터 이쾌대까지
한국 근대미술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 하는 문제부터 논란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19세기 말 미술을 ‘계몽’의 목적으로 활용한 중인 출신 개화파 인사인 오세창, 안중식 등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 세대부터 ‘미술’의 개념을 재설정하고 미술가의 역할도 변모했기 때문이다. 이 세대의 끝자락에 안중식의 제자 고희동(1886~1965)이 있다. 그의 집안이야말로 역관 출신 중인인데, 그의 부친은 중국에서 영어를 배워 그 시절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까지 다녀왔다. 고희동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역관으로 성장했다. 당시 외국어는 외국인이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발음도 아주 훌륭했다. 고희동이 처음 일본에 유학 갔을 때 프랑스어를 잘한다는 사실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1915년 고희동은 조선인 최초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관립 기관으로 당시 최고의 권위를 누린 미술학교였다. 이 학교 학생들은 졸업 작품으로 자화상을 제출했는데, 이때 그가 그린 자화상이 흥미롭다. 조선의 사대부가 사용하는 정자관을 쓴 자신의 모습을 유화로 그린 것이다. 외국인의 눈에는 특이하게 보일 이 모자를 자신에게 씌움으로써 고희동은 두 가지 발언을 한 셈이다. “나는 일본에서 공부했지만, 조선인이다”라는 것과 “나는 중인계급 출신이지만, 일본 최고 학부를 당당히 졸업했으니 옛날로 치면 급제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주장이다. 평생 고희동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이중적 사고의 원형이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고희동이 ‘유화가’로서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사회의 몰이해 속에서 ‘한국화가’로 전향했다.
고희동 세대보다 조금 연배가 어린 1900년대에 태어난 이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서양화가는 많지 않다. 1900년대에 태어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화가는 꽤 많지만, 대부분 중도에 화업을 그만두거나 요절하는 등 여러 이유로 자취를 감추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는 1899년생 이종우, 1901년생 장발, 1902년생 도상봉, 1904년생 김용준, 1906년생 이마동, 1907년생 길진섭 등이 그나마 이름과 작품을 남긴 이 세대 화가다. 이들은 조선 땅에서 처음 ‘서양화단’을 형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작품만 놓고 본다면 동경미술학교의 철저한 아카데믹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전 세대의 노력과 희생을 등에 업고, 한국 근대미술을 꽃피우는 것은 1910년대에 태어난 다음 세대 화가의 몫으로 주어졌다. 이들이 유화를 공부한 시기는 1920~1930년대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였다. 한국에서는 3·1운동 이후 민족 사립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아 미술 교육을 활발히 하면서 고희동, 이종우, 장발, 이마동 같은 이전 세대 화가가 교사로 포진해 있었다. 일본에서는 관립 학교의 지나친 아카데미즘 교육과 차별되는 새로운 사립 미술학교가 많이 생겨났다. 커리큘럼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교들이 1920년대 이후 일본 미술 교육의 지형도를 변화시켰다. 이쾌대와 장욱진은 제국미술학교에서, 김환기와 박고석은 일본대학에서, 이중섭과 유영국은 문화학원에서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단순히 서양이나 일본 문물의 ‘이식’을 넘어, 자신의 고유한 양식과 예술관을 개발하는 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 세대 화가 중 상당수가 해방 후에도 평생 화가로 ‘살아남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나는 누구인가? 유화를 그리는 화가로서 서양인이 그리는 유화와 내가 그리는 유화는 어떻게 달라야 할까?”와 같이 예술의 ‘독창성’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에 답하려는 과정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장욱진은 1949년 ‘독’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그의 관심은 옹기의 듬직한 형태, 까끌까끌한 재질감, 그 소박한 아름다움에 있었다. 유화물감을 가지고 이런 재질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건 서양인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다. 평생 장욱진을 존경한 조각가 최종태는 그를 가리켜 “서양화를 그리면서, 평생 온몸으로 서양화 같지 않은 서양화를 그리려고 했던 화가”라고 표현했다.
이중섭의 작품은 또 어떤가. 그는 일단 캔버스를 쓰지 않았다. ‘장지’라는 얇고 견고한 한국의 토종 종이에 유화물감을 매우 묽게 사용해서 얼핏 보면 수채화와 같은 맑은 인상을 준다. 여러 층의 물감을 중첩해나가다 마지막에 일필휘지(一筆揮之)와 같은 한 번의 붓질로 결판을 내는 방식 또한 그의 독특한 기법이다. 물감을 계속 덧입혀도 아래층이 노출되지 않는 유화와는 완전히 다른 발상으로, 마치 ‘묵화(墨畵)’를 그리는 것 같은 방식을 의도적으로 취한 것이다.
이쾌대가 1940년대 후반에 그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보면 약 30년 전 고희동의 자화상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팔레트와 붓을 손에 든 화가는 ‘그림 그리는 화가’로서 자의식을 확실하게 표출하고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와 표정도 당당하기 그지없다.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중절모를 쓰고 있는 화가의 뒤쪽으로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조선의 산야’를 그려 넣었다. 화가는 둥글둥글한 낮은 산, 자연스럽게 난 굽은 길 등 조선 고유의 풍경을 의식적으로 담아냈다. 그것이야말로 화가로서 자신이 앞으로 그려야 하는 ‘조선의 멋’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윤형근, 무제, Oil on Cotton, 126×94.7cm, 1972. ⓒ Yun Seong-ryeol Courtesy of PKM Gallery





이쾌대가 1940년대 후반에 그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근대미술에서 단색화로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1910년대생 근대 화가들은 주로 1930년대에 태어난 단색화 작가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문제의식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단색화 작가야말로 어떻게 하면 현대 회화에 동양의 정신을 접목할 수 있을지 고민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 방법을 단순히 재현하는 대상의 ‘소재(모티브)’와 같은 1차원적인 것에서 취하지 않고 재질, 물성 등 회화 자체의 고유한 요소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구했다는 사실이 특별할 뿐이다. 단색화 작가들은 사고의 원천을 도가 사상, 선(禪) 사상, 추사 김정희의 서체나 수묵화 등에서 끌어온다. 그러나 막상 이들도 이전 세대인 근대미술 선구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사가들이 시대를 어떻게 칼질하듯 나눈다 해도 사람과 사람은 끊임없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단색화에 관한 대표적 이론가이자 화가 이우환(1936~)은 어린 시절 자신의 집에 유숙한 유랑 화가 황현룡(1883~1960)을 통해 처음 예술을 접했다. 황현룡은 산수, 모란을 특이하게 그린 한국화가지만, 그에게 익힌 ‘서예’를 통해 이우환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데 일종의 ‘힌트’를 얻었다고 말한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람’과 같은 세계를 화폭에 옮긴다는 점에서 이들의 세계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윤형근(1928~2007)은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를 통해 화가의 길을 열었다. 마치 한지를 옮겨온 것처럼 캔버스 면에 ‘번지기’ 효과를 실험하는 기법적 측면 역시 두 사람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다만 그와 동시에 윤형근은 평생 김환기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환기가 푸른 하늘과 우주를 그렸기에 윤형근은 반대로 자신이 발 딛고 선 땅과 뿌리 깊은 나무를 그린 것이라고.
‘물방울 작가’ 김창열(1929~2021)도 첫 스승인 이쾌대와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구사했지만, 예술을 대하는 진지하고 끈질긴 태도만큼은 스승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작고 전 인터뷰에서 김창열은 ‘누가 이젤 앞에서 더 오래 버티나’ 마음속으로 내기를 하면서 이쾌대에게 ‘성실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잇는 무수한 접점이 존재한다. 그 접점은 때로 작품이 추구하는 ‘미학’의 문제이기도 하고 기법과 재질의 문제, 단순하게는 예술가의 태도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가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자꾸 근대미술을 재소환해야 하는 이유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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