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2시의 이엘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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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9

토요일 오후 2시의 이엘

나른하고 우아하게 풀어진 유일무이한 그녀.

화이트슈트 Eenk, 블랙 뷔스티에 톱 Recto.

영화 <황해>에서 처음 그녀를 봤다. 나홍진이 그려놓은 지옥도에서 그녀는 선이 또렷한 연기를 했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눈빛과 목소리였다. 영화 <내부자들>에서도 비슷했다. 이병헌과 조승우, 백윤식이라는 당대 최고 남자 배우의 틈바구니에서 그녀는 능숙하고 처연하게 주은혜를 연기했다. 세상만사에 통달한 듯한 염세적 눈빛과 건조하지만 집중하게 만드는 목소리, 중성적 느낌의 짧은 머리는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였다. 특히 선혈이 낭자한 하드보일드 장르에서, 그녀는 장치로서가 아닌 가담자로 참여 가능한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하나다. 마치 <매그놀리아>의 줄리앤 무어나 의 킴 베이신저처럼 비밀스럽고 고혹적이며 강인하다. 그리고 분량이 중요치 않을 만큼 존재감이 확실하다. 그 복합적 이미지가 이엘이 쌓아온 필모그래피다. 그렇다고 센 느낌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 <바람 바람 바람>에선 매력적이지만 귀여운 제니를,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선 현실적인 진유영을 연기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계속 확장하고 있다. 올해에도 스릴러 <콜>과 액션 장르 <야차> 두 편이 개봉을 기다린다.






다크 그레이 보디슈트 Lemaire, 이어링 Alexander McQueen.

유난히 더운 날이다. 이제 여름 같다. 여름을 좋아한다. 땀이 많은 편이라 촬영할 땐 힘이 들긴 한데, 산이나 바다 가서 노는 게 좋다. 요샌 계절 중 여름이 가장 좋다.

얼마 전 SNS에 등산 다녀온 사진을 게시했다. 산에 재미를 붙이려 노력 중이다. 원래는 물놀이만 했는데, 여름 산에 매력을 느꼈다. 푸르고 싱싱한 것, 그리고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맛을 알았다.

토요일 오후다. 말만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시간. 보통 토요일 오후엔 뭘 하나? 직업이 배우다 보니 공휴일에 큰 감흥은 없다. 오히려 금요일 저녁이 더 설렌다. 평일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누구를 만나야 할 것만 같다. 주말엔 오히려 집에 있는 편이다. 금요일 저녁이면 어디서 와인 마시고 있겠지.(웃음)

보통 여배우를 촬영할 때 스태프들이 ‘예쁘다’ 같은 환호나 칭찬을 해준다. 이엘을 촬영할 땐 그런 게 없더라. 창피해서 그런 소리 잘 못 듣겠다.(웃음) 난 오히려 움츠러든다. 유난스러운 것 같기도, 좀 쓸데없는 말 같기도 해서.

고양이 집사다. 평생 강아지들과 살아서 고양이의 매력을 몰랐다. 집을 나와 혼자 생활하다 보니 쓸쓸하더라. 고양이는 외로움을 덜 탄다는 바보 같은 말을 믿고 입양했다. 처음엔 보호소에서 안락사를 기다리는 애들 중 누구 하나라도 구해오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세 마리가 됐다.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 요새는 고양이가 더 매력적이다. 각자의 여유를 즐긴다고 할까. 그러다가도 자기가 필요하면 다가와 애정을 갈구한다. 사랑을 받았다 싶으면 또 떠나고. 그런 재미가 있다.

요새 근황은? 최근 송정보호소에서 세 번째 고양이를 입양했다. 이 아이 키우는 맛에 요새는 집 밖으로 잘 안 나간다. 매일 휴대폰 들고 쫓아다니면서 사진 찍고 영상 촬영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다. 촬영에도 차질이 있겠다. 다행히 영화 <야차> 촬영을 잘 마쳤다. 그런데 쫑파티는 취소됐다.(웃음) 지난해 연말부터 올 2월까지 대만에서 촬영이 있었는데, 귀국하고 사태가 확산됐다.

영화 <콜>의 개봉 일정은 잡혔나?(당초 3월 개봉 예정이었다) 아직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다. 언제 개봉해도 좋은 반응을 얻을 거라 믿는다. 다만 극장가의 전반적 분위기가 침체돼 있어 그게 속상하다. 빨리 정상화되면 좋겠는데, 좀 먼 이야기인 듯하다.

필모그래피를 보니 무대에도 섰더라. 장진 감독의 연극이나 뮤지컬도 했다. 데뷔는 무대였다. 학교 다닐 땐데, 2003년에 뮤지컬 <그리스>로 시작했다. 뮤지컬의 ‘뮤’자도 모를 때 앙상블로 무대 위에 올랐다.(웃음) 2005년과 이듬해까지 다시 같은 배역으로 무대 위에 섰다. 무대 경험이 많다고 하기엔 창피한 이력이다.

이엘의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 어떨까 궁금하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영상이 없더라. (단호하게) 노래 못한다. 그래서 합창만 하는 배역으로 출연했다.(웃음) 오히려 춤추는 건 좋아한다. 그때도 군무에 맞춰 춤추는 걸 워낙 좋아했다. 몸을 쓰는 건 편하고 자신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 영화 <야차>를 하면서 즐거웠다.






체크 시스루 셔츠와 베이지 퀄팅 쇼츠 모두 Fendi, 슈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액션 배우를 꿈꿨다는 인터뷰를 봤다. ‘나는 액션 배우가 될 거야!’ 한 건 아니지만, 꼭 해보고 싶은 장르 중 하나다. 전에 영화 <60 Seconds>에서 앤젤리나 졸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 멋있는 캐릭터였다. 그때부터 <툼 레이더>나 <솔트> 같은 영화를 보고 홀딱 반했다. 또 밀라 요보비치가 출연한 액션 영화도 좋아한다. 그런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까지 고르게 출연 중이다. 개인적으론 굉장히 영화적인 배우라고 생각한다. 어떤 장르가 가장 맞다고 생각하나? 하나만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드라마는 아직까지 어렵다. 영화나 무대는 책 한 권 안에서 고민하면 된다. 캐릭터 표현이나 감정 같은. 그런데 드라마는 매주 새로운 대본이 나온다. 내가 맡은 역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는 상태니 그 두려움이 아직 크다. 순발력이 안 좋은가 보다.(웃음)

드라마를 어려워하는 배우들은 대개 캐릭터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하는 타입이다. 준비가 철저한 배우 같지는 않지만, 시간이 필요하긴 하다. 그 변화를 계속 따라가는 게 어렵더라.

감독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이 있다. 작품을 같이 하고 싶은 배우가 누구냐는 건데, 최근 가장 많이 언급된 배우가 이엘이다. 그런데 왜 시나리오를 하나도 못 받을까?(웃음)

감독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도 강한 존재감 때문이 아닐까? 외모나 목소리, 눈빛, 풍기는 분위기가 드라마틱하다. 좋게 표현해줘서 고맙다. 나는 그저 특이해서라고 생각했다. 전형적인 여자의 모습은 아니고, 목소리가 독특한 데다 약간 선머슴 같은 느낌도 있고.(웃음) 정형화되지 않은 배우인 것 같다.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건조하게 뱉는 데 거기 담긴 감정의 폭이 크다. 예전엔 목소리가 콤플렉스였다. 20대 초반엔 만나는 감독마다 “그 목소리로 어떻게 연기 할래?” 하고 말했다.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땐 낭창낭창한 예쁜 여자 목소리가 유행이었으니까. 내 목소리는 가라앉은 데다 허스키라 고민이 많았다. 그런 소리도 들어봤다. “너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은 배우의 개성이나 다양성을 좋게 봐줘서 나도 쓰임이 있는 듯하다.

특이하다고 다 쓰진 않는다. 여배우 같은 경우는 더더욱. 이엘의 현재 포지션은 독특하다. 전형적인 한국 여배우의 필모그래피와 다르다. 내가 세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닐까.(웃음) 세긴 한데, 그게 기가 세다는 건 아니다. 필터가 별로 없다. 말하고 행동하는 데 제약이 없다. 그래서 세게 보인다. 짧은 스커트나 파인 셔츠를 입어도 움직일 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웃음) 노출 신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필요하면 할 수 있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내게도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게 편하다.

보통 센 걸 하면 다음엔 밝은 작품을 한다. 이엘의 필모그래피엔 그런 전략이 없다. 그게 오히려 전략인 것 같다. 사실 난 가려서 작품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황해>도 <내부자들>도 그렇고, 출연 제안만으로도 감사했다. ‘왜 매번 이런 것만 들어와?’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대신 ‘아, 이게 내 장점이구나’, ‘이게 내 셀링 포인트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바람 바람 바람>의 제니가 신선했다. 편해 보였다. 나에겐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이었다. 감독님이 자유롭게 풀어줬다. 내 촬영 분이 선배들 이후였다. 그래서 사전에 제주도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먼저 익혔다. 덕분에 편하게 연기했다.






체크 트렌치코트, 베스트, 버뮤다팬츠 모두 MaxMara, 체인이어링 Tatiana.

언뜻 천진하고 순수한 모습이 보였다. 세상을 통달한 것 같은 여인이 알고 보면 허당인 경우라고 해야 할까? 나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 같다. 20대 초반부터 알고 지내는 선배가 얼마 전 “넌 이미 세상을 너무 잘 알아서 지겨워하는 게 보인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좋은 것만 얘기해주고 싶다고. 난 사실 좀 헐렁한 사람이다. 친한 친구들은 허당 이엘의 모습을 안다.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선 일상적 생활 연기를 했다. 그 모습도 잘 어울렸다. 너무 좋았다. 줄곧 격정적인 역만 맡다가 소소한 이야기를 하니 행복했다. 동네 마트에서 호박을 사다 마주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면 했다.

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진한 멜로 한번 해보고 싶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랑. 성인 멜로같이 진한 것.

한 해에 3~4작품씩 했다. 지치진 않는지. 행복한 시간이다. 그런데 계속 내가 가진 것만 꺼냈지, 채울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요새의 틈이 반갑다. 집안일을 하거나 고양이들과 보내는 시간.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혼자 집에서 멍하니 있는 걸 좋아한다.

배우가 다시 채운다는 건 어떤 공부나 영감을 받는 과정 같은 건데, 어디서 그런 걸 얻나? 나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 저마다 특유의 말투나 제스처 같은 게 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게 좋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얻는 에너지도 있고. 요즘은 어렵지만,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에게 힘을 받는 타입은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 받는다. 어릴 때는 그랬다.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많이 싸웠다. 지금은 조금 물러서서 모두 다른 걸 인정하는 편이다. 크게 담아두려 하지 않고 사정이 있겠지 한다.

요새 배우들은 신체 단련도 열심이다. 필라테스를 한참 열심히 하다 다시 요가로 돌아왔다. 운동만이 아닌 차분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내 상태에 대한 점검. 하루에 한 시간씩은 하려고 한다.

남자들이 이엘을 어려워하지 않나?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웃음) 무섭게 생겨서 그런가? 차가울 것 같다는 이야기는 좀 들었다. 대체 왜일까?

특유의 오라가 있다. 무섭거나 차갑다기보다는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 같은 느낌? 나는 대인 관계에서 능동적인 편이 아니다. 선배들이 “주위에 너 좋다는 애들 많은데, 왜 연애를 못하니?” 하고 묻는다.(웃음) 그러면 제발 나한테 직접 말 좀 해달라고 한다. 먼저 나서서 감정 표현하는 걸 어려워한다.

다시 짧은 머리가 됐다. 이제는 시그너처같이 느껴진다.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 편하다. 그리고 짧은 머리를 했을 때 풍기는 중성적 느낌을 좋아한다. 그런데 얼마 전 TV에서 긴 머리일 때의 모습을 보니 다시 기르고 싶어졌다.(웃음) 언제 기르지?

요즘 배우들은 연기만 하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쓰거나 직접 연출을 맡는 경우도 있다. 하나라도 잘해야지. 나는 아직 뭔가를 더 펼치기보다는 연기로 자리를 잡는 게 먼저 같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목정욱
헤어 박의환(이경민포레)
메이크업 안미나(이경민포레)
스타일링 현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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