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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4

스승을 추억하다

스타의 탄생엔 좋은 스승의 오랜 노하우와 가르침이 뒤따른다. 클래식, 스포츠, 사진, 무용, 문학, 건축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 6인이 자신만의 스승에게 전하는 헌사.

건축가 유현준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대학원 유학을 떠났다. 자유의 상징 같은 나라에서 공부하게 됐으니 한층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버드에서 건축설계 스튜디오 수업을 담당한 모리스 스미스(Maurice Smith) 교수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었다. 일반적으로 건축설계 스튜디오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유롭게 자기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이 투철한 교수님은 매번 1시간 정도를 디자인 강의로 채웠다. 뉴잉글랜드 해변의 바위틈을 그린 그림, 쌍엽기의 모습, 나무숲, 인도 사원의 기둥 등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진을 보여주곤 그들의 공통 디자인 요소를 설명했다.
스미스 교수님과는 매시간 충돌이 있었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당시 내가 컴퓨터를 이용해 만드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에 매료된 이유도 크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DDP와 같은 디자인을 하고 싶었던 것. 그런데 교수님은 그런 디자인은 건축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며 깎아내렸다. 내가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파격을 추구했다면, 교수님은 그것을 객기로 치부했다. 내가 고집스럽게 내 스타일로 디자인하면, 교수님은 화를 내며 디자인을 바꾸라고 수차례 요구했다. 교수님이 “이렇게 디자인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나는 “젊은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버릇없게 대꾸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수님은 내게 계속 고집을 부리면 퇴교 처리하겠다는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마침 원래 살던 곳에서 이사 간 나는 그 편지를 받지 못했고, 본의 아니게 교수님의 최후 통첩까지 무시한 패기 넘치는 학생이 되었다.
엉망진창으로 스미스 교수님의 수업을 마치고 방학을 맞아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몇 주간 오래된 도시와 건축물을 둘러보다 교수님이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이후에도 방학에는 중남미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때마다 교수님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말하고자 한 건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디자인의 근본에 대한 이해였다. 디자인은 문제 해결의 결과이며, 환경을 극복하려는 방편이라는 기본적 사실을 가르친 것이다.
만약에 스미스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인간과 동떨어진 멋진 디자인에만 집착하는 건축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춘기도 없이 모범생으로 자란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들었던 스승에게 큰 가르침을 얻었다. 보통은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만 때로는 갈등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고집 센 학생을 보면 속으로 미소 짓고 그들을 ‘리스펙’한다. 어쩌면 그 학생도 언젠가 나처럼 생각이 바뀔 수 있으니 말이다.
Profile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유현준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1 발레리나 강미선   2 첼리스트 문태국

발레리나 강미선
여덟 살 때부터 몸풀기, 에어로빅,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동작을 배웠다. 부모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밤 9시 무렵, 친구들과 놀이 삼아 다양한 무용을 즐겼다. 내 인생의 스승, 김명순 선생님을 만난 건 아홉 살이 될 무렵이다. 1세대 발레리나인 선생님은 어린 소녀들을 위해 특강을 열었고, 선생님 덕분에 전문적 발레 클래스를 시작했다. 발레와 사랑에 빠진 건 온전히 선생님 덕분이다. 당시 선생님은 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놀이로만 생각하던 무용이었지만, 선생님의 엄격한 가르침으로 점점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당시 선생님은 다양한 발레 동작을 가르쳐주었고, 어려운 자세를 힘들게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을 배웠다. 그렇게 용어와 동작을 익히며 발레리나의 꿈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선생님에게 꼬박 3년을 배웠고, 선화예술중학교 3학년 시절 잠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선생님에게 직접 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한 사람도 김명순선생님이었다. 발레리나로 살아가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항상 마음에 품고 공연에 임한다. “미선아, 발레리나의 인생에선 물론 발레도 중요하지만, 가정과 사랑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인생에서도, <오네긴>처럼 무대 위에서 인생의 무게를 그려내야 하는 드라마 발레에서도 선생님의 조언은 힘을 발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담는 연기를 할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이 묻어나도록 노력한다. 선생님은 내게 발레의 기쁨을 알려주었고, 인생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가치를 일깨웠다. 오늘도 김명순 선생님의 조언을 염두에 두며 올바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매진한다.
Profile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부드럽고 섬세한 동작과 진지한 연기력이 그녀의 전매특허다.

첼리스트 문태국
1998년, 다섯 살 때 양영림 선생님을 만난 후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당시 선생님이 교수로 재직하신 대전 목원대학교는 어린아이를 위한 음악 영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양영림 선생님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계속했기에 미처 몰랐지만, 선생님이 목원대학교를 그만두고도 계속 나를 가르치러 오셨다는 걸 한참 후에 알았다. 어린 제자를 위해 수개월간 서울에서 대전까지 오간 선생님의 열정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선생님의 “그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 꼬마는 끝까지 가르쳐야겠다는 책임감이 들더라. 그래서 해뜨기 전 늘 집에서 나와 버스에 몸을 실었지”라는 말씀이 여전히 기억난다. 그래서 서울 근교로 이사한 다음엔 선생님 댁으로 직접 레슨을 받으러 갔다.
한국에서 선생님께 배운 9년 동안, 어린 나이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선생님의 열정과 사랑은 마음에 깊이 남았다. 투정도 부리고 졸 때도 많았는데, 따끔하게 혼내시다가도 어린 나이에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면 금세 마음이 풀려 다독여주셨다. 엄격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보여주셨고, 티칭 스타일도 한 가지 면에 치우치지 않고 내 연주 스타일에 맞춰 주셨다. 기본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람도 선생님이다. 그때 배운 테크닉을 지금까지도 추구할 만큼, 첼로를 연주할 때 필요한 메커니즘과 틀을 확고히 잡아주셨다. 요즘도 연주가 있을 때마다 꼭 선생님을 찾아뵙는다. 선생님 앞에서 연주를 하고 나면, 불안하던 마음이 이내 사라진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첼로를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을까?’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두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같은 첼리스트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의 열정과 사랑을 더욱 실감한다.
Profile
앙드레 나바라 국제 첼로 콩쿠르, 파블로 카잘스 국제 첼로 콩쿠르 등 명망 있는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젊은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연주 실력으로 알려졌다.




사진작가 김도균(KDK)
1993년, 사진을 전공하며 베허(Becher) 부부를 처음 알게 됐다. 이들은 독일 유형학 사진의 토대를 마련한 신화적 인물. 나는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고 꾸준하게 기록하는 이들의 태도에 감명했다. 또 객관화한 시각으로 상황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형식에 깊이 매료됐다. 오랜 시간 정리되고 누적된 이들의 작업에선 형언할 수 없는 오라가 느껴졌다. ‘베허앓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8년 후 나는 독일의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베허 부부의 제자 토마스 루프(Thomas Ruff)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강의실에는 부부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는데, 특히 암실 장비에 붙은 ‘Becher Klasse’라고 쓰인 스티커를 발견하고 얼마나 가슴이 벅찼던지….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2003년 뒤셀도르프 K21 현대미술관에서 베허 부부의 전시가 열린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곳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칸디다 회퍼(Candida Ho¨fer) 등 부부가 길러낸 걸출한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만약 어디선가 폭탄이라도 떨어진다면, 현대사진의 역사를 몽땅 새로 써야 할 판이었다. 독일어가 서툴고 수줍음이 많은 나는 부부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때 용기 내어 인사했다면 어땠을지, 또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다시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 그들의 작업을 나름대로 해석해 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 흐린 날엔 대형 카메라를 들고 나가 구름으로 뒤덮인 회색 하늘을 촬영한다. 반사율이 18%인 중성 회색을 기록하는 작업으로, 베허 부부의 작품 속 배경인 하늘에 대해 생각하며 시작했다.
또 나는 미래에 작가가 될 학생들에게 베허 부부를 소개한다. 학생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베허 부부를 만날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의 영향을 받아 배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베허 부부는 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Profile
서울 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하고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스위스 UBS은행 등 주요 기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소설가 박민정
나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소설가이므로 당연히 누군가에게 문학을 배웠으리라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문학은 타고난 천재나 경험 많은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권위적인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세간의 인식은 문예창작과 출신을 ‘패턴화된 학습자’쯤으로 치부하며 깎아내리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나 자신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그 ‘테크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물론 테크닉을 배우는 일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 생산자 역시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준엄한 직업윤리를 갖고, 남들에겐 없는 테크닉을 연마해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낮은 자세로, 세상 정족수를 채우듯 필요한 자리에서 소설을 써내는 일. 전성태 소설가는 내게 그것을 가르친 스승이다. 그가 대학생인 내게 처음 가르쳐준 것은 그동안 관습적으로 써온 잘못된 표현을 수정하는 일이었다. 그는 빨간 펜을 든 교정자의 자세로 내 작품을 손봐주었는데, 전통적으로 ‘예술계 대선배’의 카리스마로 수업을 이끌어가는 학풍과는 다소 다르게 느껴져 의아하기도 했다. 선생은 내 소설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구절은 ‘지당한 말씀’이라고 칭찬했다. 취향과 호오가 달라도 ‘이건 틀렸다’, ‘잘못 쓴 작품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내게 그런 모습은 깊은 깨달음으로 남아, 훗날 소설 창작을 가르치거나 다른 이의 작품을 볼 때 함부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습관을 길러주었다. 그건 아마 그가 ‘쓰는 사람’으로서 가르쳤기에, ‘필드워크’의 사람이었기에 그랬으리라. 내게 같이 뛰는 스승이 있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벅찬 행운이다.
Profile
2009년 단편소설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로 데뷔,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아내들의 학교>를 냈다.




쇼트트랙 선수 최민정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여러 코치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모두 다 감사한 분이라 한명만 꼽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어릴 적 스케이트를 가르쳐주신 코치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나는 여섯 살 때 취미로 스케이트를 시작했다. 여덟 살 무렵엔 우연히 선수반 언니 오빠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고, 엄마를 졸라 그날 바로 선수반으로 올라갔다. 이때 처음 나운섭 코치님을 만났다.
코치님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코치님이 롯데월드 자유이용권과 운동복을 상품으로 건 줄넘기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나는 열심히 연습했지만 결국 언니 오빠들을 이기진 못했다. 하지만 코치님은 끝까지 최선을 다한 나를 격려하며 특별상으로 하늘색 원피스를 주셨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보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8년 동안 코치님에게 스케이트를 배웠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스케이트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던 것 또한 코치님의 영향이 크다. 덕분에 스케이트가 내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으니.
더불어 쇼트트랙 국가 대표팀 감독님에게도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감독님은 내가 대표팀에 들어간 첫 시즌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분이다. 감독님은 내게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운동선수로서 갖춰야 할 자세까지 가르쳐주셨다. 쇼트트랙 선수로서뿐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성장시킨 스승님이다.
내가 흔들릴 때, 힘들 때 잡아주신 분들이 있기에 평창 동계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를 잘 준비할 수 있었다. 올림픽 기간 여자 쇼트트랙 500m 결승에서 실격 판정을 받으며 고비가 있었지만, 그분들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나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Profile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의 명실상부한 에이스. 2015·2016·2018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과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2관왕을 달성했다. 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제공 유니버설발레단,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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