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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3

텍사스의 예술 신기루

미니멀 아티스트 도널드 저드가 여생을 보낸 도시로 마파에 직접 다녀왔다.

위쪽 프라다 마파 전경.
아래쪽 도널드 저드의 ‘콘크리트로 된 무제 작품 15(15 Untitled Works in Concrete)’ 설치 전경 일부.

마파는 미국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90번 고속도로의 시작점인 텍사스 서부 멕시코 국경지대의 높은 고원지대에 있는 작은 도시다. 어디서든 마파로 향하는 길은 짧지 않은 여정을 동반하는데,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 엘패소에서도 차로 3시간 쉬지 않고 달려야 겨우 도착한다.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가 거쳐 가는 길목이자 유명한 마약 밀매 경로이기도 한 지역에 있는 마파를 찾아가기는 마음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마파는 그런 어려움을 딛고 꼭 한번 방문할 가치가 있는 도시다. 광활하고 황량한 대초원과 메마른 사막지대를 달리다 보면, 저 멀리 흐릿한 신기루처럼 갑자기 작은 도시가 나타나 우리를 반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록 허드슨, 제임스 딘이 출연한 영화 <자이언트>(1956)는 텍사스 사막에 매장된 석유의 가치가 부상하는 동안 일어난 목장주 가족의 서사시로 유명하다.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라면 대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에 등장, 이제는 인스타그램의 인기 스냅으로 더 유명한 상징물이자 대초원 한가운데에 홀로 놓인 엘름그렌 & 드락세트(Elmgreen & Dragset)의 영구 설치 작품 ‘프라다 마파(Prada Marfa)’(2005)로 한 번쯤 이 도시를 접했을지 모른다. 할리우드가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거친 서부영화의 배경으로 마파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쉽게 살아남을 수 없는 황무지, 하지만 그곳에는 완벽하게 순수한 예술이 있다.
예술과 건축, 자연이 하나 돼 선사하는 광경은 마파 전체를 하나의 종합예술로 만든다. 예술의 독자성을 중시한 도널드 저드(Donald Judd)는 예술가 스스로 만든 작품, 작품이 놓이는 공간과 건축물, 나아가 대지와 환경의 관계를 기반으로 예술의 의미와 영역을 광범위하게 확장했다. 그가 장소와 결합한 완벽한 예술의 이상향을 찾아 1971년 마파로 이주하며 그곳에 새로운 예술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널드 저드의 ‘밀 알루미늄 무제 작품 100(100 Untitled Works in Mill Aluminum)’ 설치

저드는 항공기 격납고와 목장 등을 대규모로 매입해 직접 작업하고 전시할 공간은 물론 실제 생활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 개조했다. 마파 시내의 블록 하나를 통째로 차지해 ‘더 블록(The Block)’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공간은 현재 주변 스튜디오 건축물과 함께 저드 재단이 관리한다. 목재와 유리로 만든 회전문은 우아하게 회전하고, 흙과 짚을 섞어 햇볕에 건조한 가벼운 수제 흙벽돌로 지은 건축물은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저드는 1978년에 디아 재단(Dia Foundation)의 도움으로 버려진 육군 기지(포트 DA 러셀) 전체를 인수하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사막의 태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예술 작품을 제작했다. 치나티산맥과 치와와 사막의 황금색 덤불 사이로 콘크리트 블록 작품 15점을 배치하고, 거대한 포병 창고 내부에는 은빛 알루미늄으로 만든 박스 작품 100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각도에 의해 색이 변하는 박스는 대형 유리 파사드를 통해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대초원의 풍경과 함께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경이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1987년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의 거대한 부지에는 저드 외에도 그가 존경하고 교류한 동시대 예술가의 작품이 곳곳에 영구 설치돼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예술적 동지 댄 플래빈(Dan Flavin)을 비롯해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 클라스 올든버그(Claes Oldenburg), 리처드 롱(Richard Long), 로니 혼(Roni Horn), 칼 안드레(Carl Andre) 같은 예술가를 위해 직접 개조한 전시 공간을 제공했다. 특히 군용 막사 6개 동에 대규모로 설치한 플래빈의 작품은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강렬하며 모든 작품은 그것이 자리한 공간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위쪽 존 체임벌린의 작품 25점을 전시한 마파 시내의 옛 양모 공장.
아래쪽 로버트 어윈의 ‘무제, 새벽부터 황혼까지(Untitled, Dawn to Dusk)’ 설치 전경(작품 입구).

특히 2016년 7월에 공개한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의 작품 ‘무제, 새벽부터 황혼까지(Untitled, Dawn to Dusk)’는 작가가 예전 육군병원 부지 전체에 직접 구상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중정의 정원을 둘러싼 건물은 높은 창을 통해 텍사스의 하늘을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며 빛과 어둠을 표현한다. 관람객은 여러 겹으로 교차한 레이어를 통과하며 순차적으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경험을 할 뿐 아니라 실내외, 예술과 건축, 자연과 인공을 모두 융합한 공간을 직접 느낄 수 있다. 한 예술가의 빛과 공간에 관한 오랜 연구를 집대성한 자리다.
1994년 저드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도시는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실현하지 못한 계획은 저드 재단이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지속해나간다. ‘프라다 마파’를 선보인 공간 볼룸 마파(Ballroom Marfa)를 비롯해 크고 작은 갤러리와 서점, 카페, 레스토랑 등이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이전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해마다 도시 인구의 10배가 넘는 방문객이 찾아오지만, 저드는 마파가 예술 관광을 위한 도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도시에 예술이 없었다면 이미 사막에서 불어오는 먼지에 묻혀 황폐화됐을지 모른다.
지난해 가을, 치나티 재단의 아레나 건물에서 열린 리만머핀 마케팅 & 커뮤니케이션 글로벌 디렉터 세라 러빈(Sarah Levine)과 사진작가 윌리엄 레어드(William Jess Laird)의 결혼식에 참석한 전 세계 아트 피플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뜨겁게 달궜다. 그들이 ‘프라다 마파’에서 밤늦게 터뜨린 플래시, 사막 한가운데 캠프장의 빈티지 트레일러와 사파리 텐트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등은 그야말로 예술 유목민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에 품은 예술의 이상향이 있다면, 마파가 그 모습에 가장 가까운 도시가 아닐까? 저드가 마파로 향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마파의 미래가 더욱 궁금하다.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글・사진 이세영(전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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