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으로 빚은 흑백의 추상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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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1

숯으로 빚은 흑백의 추상

한국 회화를 알리는 '숯의 화가' 이배는 작품을 통해 고유의 관계 맺기를 이어간다.

죽은 듯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머금은 숯. 1989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이배 작가는 30년간 숯을 이용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아가 그에 담긴 한국의 정신성을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2016년 광주 비엔날레를 포함해 유럽, 아시아, 미국에서 40개가 넘는 개인전과 여러 그룹전에 참여하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지난 2월부터 캐나다 피 재단(The PHI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에서 캐나다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배 작가를 4월 경북 청도 작업실에서 만났다.





Brushstroke-216, Charcoal Ink on Paper, 162×130cm, 2020
Photo by Claire Dorn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Gallery

지난 2월부터 캐나다 피 재단에서 작가님의 캐나다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2019년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때 전시를 보러 온 피 재단 디렉터가 함께 전시하고 싶다고 제안했죠.

피 재단에서 작가님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캐나다는 자연이 광대하고 아름다운 나라잖아요. 제가 자연 재료인 숯을 이용해 작업을 한다는 점과 그를 통해 자연에 대한 이미지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고 하더군요.

오는 6월까지 열리는 전시에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40여 점의 최근작을 비롯해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를 열게 된 소감은 어떤가요? 총 7개의 다양한 전시 공간에서 숯을 활용한 회화, 설치, 드로잉, 비디오 작품까지 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우리 삶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자연과 문화를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동양 문화권은 자연과 문화가 융합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죠. 우리 삶과 생각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동양의 자연관과 함께 먹으로 표현하는 한국의 수묵을 알릴 수 있어 기쁩니다.

최근작 ‘Brushstroke(붓질)’을 보는 순간 작가님의 자유롭고 생동하는 에너지에 압도되는 듯했습니다. ‘붓질’은 숯가루를 물이나 기름에 섞은 뒤 서예를 하듯 획을 긋습니다. 획은 그 자체로 신체성을 품고 있는데, 신체가 주는 감성을 획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서예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죠.

오랫동안 서예를 좋아해 작품을 가까이하신 것으로 압니다. 서예의 어떤 점에 매료되어 최근작인 ‘붓질’ 시리즈를 시작하신 건가요? 서예에 항상 관심이 있었는데, 2019년 LA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서 개최한 서예 전시 을 관람한 뒤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추사 김정희, 퇴계 이황을 비롯해 정조, 세종 등 우리나라 선비와 왕들의 글씨를 볼 수 있었어요. 오래전 완성한 작품임에도 방금 전 붓을 뗀 듯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품, 감성, 신체성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세종의 스승이던 퇴계 이황은 학교 선생님처럼 글씨를 반듯하게 썼는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함과 기품이 느껴지죠. 글씨는 단지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격을 수양하고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선비의 정신성을 보여줍니다.





Installation View, , PHI Foundation, 2021
Photo by Richard-Max Tremblay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Gallery ⓒ PHI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

작가님에게 예술을 통한 정신적 수양이라는 가치가 깊이 와닿은 것 같습니다. 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연필로 글 쓰는 일이 많이 줄었잖아요. 서예 작품을 본 뒤 ‘내가 그은 획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작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신체성과 정신성이 합일된 경지에 오르는 것이 작가님이 추구하는 목표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서예 붓은 털이 길고 부드러워 집중하지 않으면 통제하기 어려워요. 서예를 할 때 붓 자루 맨 끝을 잡고 획을 긋는데, 붓끝에 집중해 자신을 담는 거죠. 예전에 정신과 신체가 합일을 이룬 총체성의 시대였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과 신체가 독립적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예야말로 대단한 총체성을 띠고 있어요. 하지만 형식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술은 여행과 같다고 생각해요. 나의 생각을 저 먼 곳으로 보내기도 하고, 자연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저는 숯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해 작업을 하지만 물, 공기 등 무엇이든 좋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자신의 생각, 감성, 근원, 세계성을 어떻게 연결할지가 중요합니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씀하셨죠. 첫 번째 산은 나와 관계없는 산이에요. 알프스나 히말라야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두 번째 산은 나와 관계가 있는 산입니다. 지난여름 멱도 감고 시도 짓던 산. 막연한 것에서 관계성을 구축하고, 그 과정에서 감성을 언어화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초기작 ‘Issu du Feu(불에서부터)’처럼 물성을 드러내는 작품에서 ‘Acrylic Medium(아크릴 미디엄)’과 같이 신체성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아크릴 미디엄’은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거예요.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면 종이가 먹을 완전히 흡수하거든요. 서양에서는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칠하면 밖으로 두꺼운 층이 형성되죠. 서양에 이러한 동양화의 개념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붓으로 숯가루와 도료인 아크릴 미디엄을 섞은 재료로 도형, 선 등 부호처럼 보이는 모티브를 그린 뒤 투명한 아크릴 미디엄으로 덮고 완전히 마르면 그 위에 이미 그려진 모티브를 따라 똑같이 그린 다음 또 다른 아크릴 미디엄으로 덮는 작업을 한 겁니다. 동양화나 마찬가지지만 방법과 재료만 현대적으로 풀어낸 거예요.

‘불에서부터’, ‘붓질’, ‘Landscape(풍경)’ 등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 구체적 장소는 아니지만 너른 대지와 숲 등 자연을 떠올리게 돼요. 저는 이곳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황톳길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산을 누비며 머루도 따먹고 들판의 냉이처럼 자랐죠. 미국 뉴욕이나 섬에서 태어난 사람의 발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구체적 형태는 없지만, 유년 시절 나를 형성한 감성이 작품에 스며드는 것 같아요.





Landscape ch-38(detail), Charcoal on Canvas, 218×291cm, 2002 /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Gallery
Installation View, , PHI Foundation, 2021 / Photo by Richard-Max Tremblay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Gallery ⓒ PHI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

작품 ‘풍경’은 광활한 대지에 부는 거친 바람이 연상됩니다. 정적인 듯하지만 역동적 에너지도 느껴지고요. 어떻게 작품을 구상하게 되셨나요? 제가 농부의 아들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농사지을 때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하죠. 이 작품은 숯가루를 짓이기고 아크릴을 녹여 화면에 두껍게 붙여 대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풍경’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대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현대적 감성을 담아 숯으로 새로운 검은 대륙을 만들었습니다.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실제 땅처럼 울퉁불퉁한데, 대지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인가요? 맞아요.

숯을 재료로 회화부터 설치, 조각, 비디오, 수묵 추상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셨는데,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맞닥뜨릴 때 변화의 계기가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새롭게 준비하는 전시회를 위해 공간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이제까지 했던 전시를 살펴봅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거죠. 이제까지 제게 주어진 많은 기회가 저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줬습니다. 바깥과 충돌이 있어야 변화도 할 수 있어요. 외부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0년간 ‘숯의 작가’로 불렸습니다. 작가님을 표현하는 수식어를 직접 붙인다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다른 단어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숯의 작가라는 수식어 덕분에 이배라는 이름이 주목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숯에 한정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우리 문화권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일까’, ‘한국 작가로서 나는 무엇을 해왔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건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작가로서 끝없이 자기 허물을 벗는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한 뒤 숯가루를 잔뜩 모아 공중에 흩뿌리는 퍼포먼스를 하셨습니다. 숯이라는 물성에 나의 작업을 제한하지 않겠다는 해방의 몸짓이었습니다. 숯을 통해 다양한 제스처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운 작업일 것 같습니다. 숯을 이용해 해보고 싶은 새로운 시도(퍼포먼스)가 있으신가요? 당분간 ‘붓질’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고, 그 작업을 통해 흑백에서 컬러로 변화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색을 머금은 검은색에서 새로운 색을 끄집어내는 거죠. 또 그동안 소나무 숯을 재료로 사용했는데 느티나무, 박달나무 등 다양한 나무의 숯으로 검정이 가진 색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5월에 열리는 홍콩 아트 바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파리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고요. 코로나19 사태로 움직이기 어려워 오히려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웃음) 완전히 다른 작품은 아니겠지만, 어떤 새로운 작업을 해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 중입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최윤정(프리랜서)
사진 김제원(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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