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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6

예술가들이 을지로3가역으로 모인다

을지로3가역은 젊고 실험적인 한국 예술 세계의 통로가 되었다.





쉬프트에서 1월 21일부터 2월 7일까지 열린 정인지 작가의 전 전경.

을지로 한복판, 족히 40년은 넘어 보이는 오래된 건물의 파사드를 현란하게 장식한 인쇄소, 공업소의 낡은 간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빈틈을 비집고 들어선 신선한 타이포그래피가 눈에 띈다. SNS의 위치태그와 해시태그를 점령한 카페, 바, 식당과 ‘힙(hip)’이라는 접두어를 사이좋게 공유하는 예술 공간들의 이정표다. 을지로와 그 일대가 ‘힙지로’로 불리기 전부터 이 동네에 정착한 갤러리, 작업실을 겸하는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들은 도시 생태계에서 순환처럼 작동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마수에서 살아남아 존재감을 가진 공간으로 정착했다.

2017년 3월 이화빌딩 3층에 문을 연 ‘공간 형(@artspace_hyeong)’도 힙지로 시대 이전에 을지로를 발견한 원년 멤버 중 하나다. 공간 형을 운영하는 장성욱 대표는 예술 공간이 갓 유입되기 시작한 그때를 지금의 ‘을지로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준공업지구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을지로의 낡은 건물들은) 작은 면적, 비좁은 통로 등 전시 공간의 입지로 유리한 환경은 아니에요. 하지만 낮은 임대료와 도심 한복판이라는 뛰어난 접근성이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합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실험적 공간을 추구하는 공간 형은 새로운 작가를 찾아 소개하고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대관료, 전시 관람료 없이 운영하는 비영리 공간이다. 대안예술 공간의 한계(짧은 생명력)를 뚫고 자생에 성공한 장성욱 대표는 지속 가능성을 위한 모색의 일환으로 2019년 10월 같은 건물에 영리 전시 공간 ‘쉬프트(@shift_artspace)’와 반기별로 새로운 작가와 협업 전시를 선보이는 디자인 카페 ‘도록’을 열었다. 한 빌딩 안에서 각기 다른 정형으로 운영하는 세 공간은 필요에 따라 함께, 혹은 따로 움직이며 예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3월엔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기법의 변주를 통해 ‘움직임’을 2차원의 정지 화면에 표현하는 박광수 작가의 전시가 공간 형, 쉬프트의 여백을 채울 예정이다.





상업화랑에서 선보인 정재호 작가의 개인전 <창과 더미> 전경.

이화빌딩에서 을지로4가 방향으로 600보가량 걸어가면 나타나는 ‘상업화랑(@sahngupgallery)’ 역시 2017년부터 예술지구 을지로의 첫 움직임을 만들어낸 곳이다. 이곳의 전시 기획자 김명진은 상업화랑의 출발을 ‘미술인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짚는다. “대부분의 미술가가 재료를 구매하거나 작품 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도움을 받기 위해 을지로를 즐겨 찾아요. 그런데 왜 전시 공간은 별로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럼 예술가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갤러리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이 동네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미술의 사회적 가치와 산업적 역할에 주목하는 상업화랑은 10여 명의 전속 작가를 중심으로 한국 컨템퍼러리 미술의 흐름을 조명한다. 대안예술 공간 특유의 실험적이고 다원적인 작품은 2019년 문래창작촌에 문을 연 상업화랑 문래점이 담당하고, 지난해 12월엔 계간 웹진 <-UP>(www.sahngupgallery.com/webzine)을 창간해 미술·문화계의 담론을 접할 수 있는 장을 열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대안예술 공간 가삼로지을의 로고.

상업화랑 뒤편, 우일집 골목 막다른 모퉁이에 위치한 ‘가삼로지을(@gasamrojieul)’은 을지로를 예술지구로 만든 기획자와 아티스트들이 입을 모아 관심을 표하는 곳이다. 5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경진빌딩 305호에 자리 잡은 이곳은 자신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숨긴 30대 작가 셋이 의기투합해 문을 열었다. “미술 작가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수많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두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장소”를 꿈꾸며 만든 곳답게 ‘익명’과 ‘가명’을 전제로 한 전시를 선보인다. 세 작가는 2018년 12월 개관전 이후 1년 동안 각자 8개의 페르소나로 24개의 전시를 선보이는 실험에 성공했다. 지난해에 이어 2021년에도 공모를 통해 이름을 지우고 등장한 기성 작가들의 발칙하고 낯선 페르소나를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겨울 엔에이에선 전이 펼쳐졌다.

철공소 거리, 공업사의 절곡기를 호위무사처럼 거느린 흰 문을 열면 갤러리와 아트 숍, 커피와 술을 마실 수 쉼터를 아우른 복합 문화 공간 ‘엔에이(N/A, @nslasha.kr)’가 나타난다. 사진작가 박진우와 오진혁은 이곳을 대중이 힙지로에 기대하는 날것의 풍경과 세련된 감성, 상업적 기능으로 영민하게 채웠다. “엔에이는 사진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판매하는 숍이자 다양한 장르의 전시를 만날 수 있는 갤러리예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작품 구매가 일부 특권층의 놀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해외에선 작은 갤러리가 젊은 작가의 작품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이곳에서 20~30대가 작품을 사고 소유하는 재미와 즐거움을 경험했으면 해요.”





1월 26일까지 아웃사이트에서 열린 허니듀의 <친애하는 공포에게>전.

젊고 실험적인 현대미술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상업적 기능 사이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줄타기를 해온 을지로 일대의 일명 ‘아트 디스트릭트’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대한 우려 속에서 일찌감치 자리 잡은 공간들을 통해 그 영역을 점점 확장하고 있다. 2017년, 미술 작품을 쇼룸이라는 방식으로 소개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을지로 1세대 소쇼룸은 지난해에 ‘소쇼(@sosho_club)’로 상호를 바꾼 후 종로구 북촌으로 이전해 ‘멤버십 클럽’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관람 콘텐츠를 제안한다. 그 옆, 혜화동과 삼선교 일대 역시 국립현대미술관, 사간동이라는 제도권의 변방에서 공고한 대안예술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아웃사이트(@out_sight)’는 개념미술가 김상진의 작업실에서 출발한 공간으로 한시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설치, 퍼포먼스, 미디어 작업을 통해 정형화된 제도의 바깥을 모색하는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전시를 선보인다.

을지로와 구도심 일대의 젊은 예술 공간들이 정권에 따라 바뀌는 문화 정책과 임대료 상승, 도시 재생 사업이라는 난관을 넘어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가는 건 예술, 콘텐츠의 유통과 상업화에 대한 고민을 현실로 빠르게 구현하는 데에 그 답이 있다. 엔에이의 박진우 대표는 을지로의 젊은 대안예술 공간과 신진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세계를 소비하는 고객과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가는 시작점에 서 있다고 했다. 김상진 작가 역시 실험적 전시 공간이 상업화와 상생하기 위한 모색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한다. “대안예술 공간의 실험적 제스처는 종종 상업적 미술과 자본의 접근에 흡수되고 또다시 거기서 일탈하는 순환을 반복합니다. 이런 반제도적 시도가 새로운 경계 바깥을 만들어내며 동시대 예술이 빠르게 변화해왔죠.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흐름이 제도화, 상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순환이에요. 그 고리 속에서 을지로와 그 일대의 예술 공간들이 지속성을 가지려면 상업화와 상생의 시너지를 모색하는 동시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류진(프리랜서)
사진 제공 가삼로지을, 공간 형, 상업화랑, 아웃사이트, 엔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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