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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0

발베니, 장인을 만나다

한국의 장인을 찾아가는 긴 여정의 마무리, 장미라사 수석 테일러 이상범.

좋은 슈트에 걸맞은 삶의 태도를 지니고 부단히 노력하는 테일러 이상범.

새벽 5시. 남자가 자세를 꼿꼿이 한 채 어둠에 몸을 맡긴다. 어둑한 산길을 묵묵히 걷는 남자는 몸이 이끄는 대로,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우며 앞으로 나아간다. 50년 가까운 세월을 재단사로 살아온 장미라사 수석 테일러, 이상범이다. “새벽 산행을 나설 때 일부러 랜턴은 챙기지 않습니다. 어둠으로부터 긴장하여 깨어나는 감각을 유지하려고요.” 네이비 핀스트라이프 더블브레스트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장인의 맑은 눈을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재단사는 예순여덟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슬림한 몸매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좋은 슈트란 무엇인가, 멋지게 나이 든 신사란 어떤 모습인가’를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1956년 제일모직 자회사로 시작한 테일러 숍 장미라사에 수석 재단사 이상범이 합류한 것은 35년 전의 일이다. 그 뒤로 이곳에서 두 명의 전 대통령 슈트를 제작하면서 ‘대통령의 재단사’라는 별명이 붙었고, 러시아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영국 여왕의 부군인 필립 공이 방한했을 때 맞춤 슈트를 선물했다. 지휘자 정명훈을 비롯해 상위 5%에 드는 국내 다수 기업가의 맞춤복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정명훈은 그가 완성한 연주복을 두고 “디테일 선이 너무 예쁘다”고 찬사를 보내며, 오른쪽 팔이 접히는 부분이 뚝 끊어질 정도로 자주 입은 일화로 유명하다. 한 벌에 바느질이 어림잡아 2만5000번쯤 들어간다는 비스포크 슈트를 한 달에 많게는 100여 벌씩 쉼 없이 만들면서도, 그는 균형과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수시로 자연을 찾는다.





왼쪽 이상범은 평소에도 슈트를 입고 작업한다. 오른쪽 예민한 감각적 촉수를 지닌 이상범의 손.

“사람 손이 닿은 것은 억지스러운 게 많아요. 분재만 봐도 그렇지요. 아무리 멋있게 철사로 휘어놓아도 자연 풍광에 순치된 나무만큼 멋있는 기품은 나오기 어렵거든요. 자연의 모습을 자꾸 보다 보면 은연중 제가 만든 슈트에 반영되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커프트(cuffed) 라인, 도감보다 훨씬 선명한 컬러가 다 자연 속에 잠자고 있으니까요.” 그는 얼마 전 태풍이 동해를 덮쳤을 때, 다시 보지 못할 드라마틱한 자연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 국도를 넘어 강릉에 다녀온 참이었다.
수백 명의 고정 VIP가 있을 정도로 단골 고객이 많은 이상범이 자신의 인기 비결로 꼽은 것은 바로 ‘색감’. “네이비, 그레이, 실버 등 단순한 컬러를 세분화해 변주를 주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미세한 색의 차이, 혹은 패턴이나 질감으로 차별화하고요. 고객이 늘 입던 컬러 대신 새로운 색을 권하는 것도 제 철칙 중 하나입니다.” 로로피아나, 제냐, 도멜, 스탠드이븐 등 검증된 해외 명품 원단 브랜드와 오랜 시간 신뢰를 쌓고 거래하며 고객의 개성에 맞는 원단 선택에 많은 공을 들인다. “싱글 몰트를 좋아하는데, 발베니는 특히 빛깔이 아름다워요. 자연스러움에서 오는 고급스러움이 묻어나죠. 향도 은은하게 오래 지속되고요. 시간, 자연이 주는 힘일 거예요.” 이상범은 발베니의 색과 비슷한 원단 차트 위에서 발베니 전용 잔을 이리저리 굴리다 한 모금 삼킨 뒤 말했다. 고객과 만나기 전에는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키지만, 좋은 싱글 몰트 한 잔쯤은 음미할 줄 아는 중년 신사. 균형 잡힌 몸이 좋은 슈트를 만들고, 좋은 슈트가 몸을 균형 있게 긴장시키듯 그의 삶 역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듯했다.





왼쪽 장인들의 삶을 헌신해 완성한 발베니의 작품들. 오른쪽 자연이 빚어낸 발베니의 그윽한 색감과 빛.

“슈트를 맞춘다는 건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엑스레이를 찍듯 첫인상으로 체형과 비례를 파악하고, 설계도를 위해 정교하게 치수를 재고, 그 뒤에는 직업, 라이프스타일, 자주 취하는 자세 등 디테일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걸음 더 다가가지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인의 손을 가만히 보다가, 그의 손을 거쳐갔을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완성된 슈트를 받아 든 순간을, 그 환희의 광경을 상상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찡해졌다.
“굳은살은 미세한 물리적 공간을 파악하는 손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손가락 끝 감각을 더욱 자극한다.” <장인>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리처드 세넷이 말했듯, 장인의 굳은살은 카메라의 볼록렌즈처럼 ‘그 너머’의 것을 본다. 작은 차이를 읽어내는 감각의 촉수. 지난 1년간 만난 발베니가 발굴한 다섯 명의 장인은 제각각 영역은 달라도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손과 눈, 뇌가 그 자체로 현미경처럼 작은 차이를 읽어내는 사람들이었다. 자칫 권태로울 수 있는 반복 작업 가운데 자신만의 리듬을 익혀 아름다움에 마비되지 않고 사는 삶의 미학. 장인들의 삶의 태도는 특정 국가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발베니를 앞에 놓고 한국의 장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결국, 발베니 증류소 장인을 간접경험하는 기회였던 셈이다.

 

에디터 전희란(ran@noblesse.com)
사진 이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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