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주목해야 할 이슈들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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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7

지금 주목해야 할 이슈들

2020년 봄을 움직이는 이슈. 그에 대한 우리의 시선.


지금 가장 ‘핫’한 포메이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흥행을 이끈 이른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아스널, 리버풀의 ‘빅 4 시대’는 저문 지 이미 오래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공격적 투자로 빛을 본 맨체스터 시티 역시 짧은 독주를 끝냈다. 이제는 안정적 수비와 압도적 화력을 바탕으로 한 리버풀이 30년 만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노리고 있다. 리버풀은 무려 18회나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한 명문이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1992년 이래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박물관 한쪽에서나 볼 수 있던 영광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독주의 중심에 당당히 선 유르겐 클로프 감독이 리버풀에 변화를 안기고 있다. 2019/20 시즌 클로프 감독의 노력은 의미 있는 결과물로 이어지고 있다. 전술의 핵심은 ‘게겐프레싱(gegen-pressing)’이다. 과거 독일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이끌던 시절부터 고수하던 전술이다. 게겐프레싱은 독일어 ‘gegen(~를 향하여)’과 ‘pressing(압박)’이 만나 탄생한 단어다. 전방을 향한 강한 압박을 뜻한다. 공격뿐 아니라 상대에게 공을 내어준 순간에도 더욱 강한 압박으로 최대한 빠른 시간에 공의 소유권을 뺏는 것을 노린다. 사실 도르트문트 시절 클로프 감독은 최전방과 최후방의 간격을 25m 안팎으로 유지하는 방식의 게겐프레싱을 구사했다. 문제는 선수들의 체력적 부담이 크고, 상대가 탈압박으로 역습을 노릴 경우 힘없이 수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자칫 대량 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클로프 감독은 리버풀에서 기존 게겐프레싱의 단점을 보완하고 진화시켰다. 부임 초기까지 공간 위주의 게겐프레싱을 펼쳤다면, 이제는 선수와 패스의 길목을 노리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상대가 공의 소유권을 빼앗기 위해 무조건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공격이 전개될 수 있는 방향을 차단하고 의도적으로 일부 경로를 열어 패스 미스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선수 개개인의 축구 지능과 연계 플레이의 완성도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완벽한 포메이션’이라 불리는 4-4-2 전술의 맹점이 다소 경직된 공격 전개라면, 리버풀은 다이아몬드형 4-4-2, 4-2-3-1 혹은 4-3-3으로 유연하게 변화하며 게겐프레싱을 구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격수들이 상대의 수비 공간에 스스로 갇혀 공격 기회를 제한할 수도 있지만 로버트슨과 아널드라는 빠르고 정확한 풀백으로 단점을 보완했다. 사디오 마네, 호베르투 피르미누, 모하메드 살라로 이어지는 ‘마누라’ 삼각 편대는 최전방의 핵심이다. 후방에서부터 중원을 거쳐 차분한 빌드업으로 공격을 전개할 때도 많지만, 최후방의 트렌트 알렉산더-아널드와 데얀 로브렌이 한 번에 길게 찔러주는 패스에서 창출되는 득점의 기회도 상당하다. 이 경우 최전방의 ‘마누라(마네, 피누미누, 살라)’는 간격을 조절하며 중원 혹은 수비에까지 가담했다가 폭발하듯 한 번에 최전방으로 달려간다. 반대로, 상대가 극단적 수비 전술을 구사할 때도 해법은 있다. 거침없는 과감한 슈팅으로 리바운드 상황을 만들고 상대 수비를 교란한다. 상대 수비가 공을 잡으면 다시 강한 압박으로 공을 빼앗는다. 전술에 대한 이해도, 자신감, 선수 개인의 기량과 90분 내내 이어지는 집중력까지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물론 기본은 체력이다. 리버풀의 스쿼드가 젊게 유지되는 이유다. 지금의 리버풀은 선수와 감독, 전술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원 팀’이다. 클로프 감독의 게겐프레싱은 오랜 경험과 연구,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이미 우리는 지금 가장 ‘핫’한 전술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르면 4월, 우리는 리버풀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 될 전망이다.
“평화로운 축구 말고 싸우는 축구. 그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조용한 노래보다 헤비메탈이 더 좋다.” - 유르겐 클로프

 

김동환 풋볼리스트 기자. 축구와 축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1 메르세데스-벤츠 EQC 에디션 1886.
2 현대자동차 EV 45.


그들이 전통을 들먹이는 이유
얼마 전, 메르세데스-벤츠의 본격적인 첫 양산 전기차 EQC를 시승했다. 그런데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시승차에 붙어 있던 ‘에디션 1886’이라는 엠블럼이다. 에디션 1886은 기본 EQC에 고급 오디오, 360도 주차 카메라, 외부 발판 등 몇 가지 옵션과 특징을 추가한 버전이다. 기존 벤츠 신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에디션 1’처럼 합리적 가격의 강제 옵션 패키지로, 신차 효과의 극대화와 초기 생산 안정화를 도모한다. BMW, 벤틀리, 재규어/랜드로버 등 ‘퍼스트 에디션’도 이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벤츠는 왜 1886이라는 숫자를 붙였을까? 1886년은 벤츠의 첫 차이자 인류의 첫 내연기관 자동차인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세상에 공개한 해다. 즉 자동차라는 물건을 처음 만든 회사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런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미는 전기차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벤츠는 이를 ‘선구자적 정신 표현,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 등 키워드로 설명한다. ‘요즘 전기차가 뭐 그리 신기한 물건이라고, 너무 거창한 것 아냐?’라고 생각하다가 몇 달 전 현대자동차가 공개한 차세대 전기 컨셉카 ‘EV 45’가 떠올랐다. EV 45는 45년 전 현대차가 공개한 첫 고유 모델 포니(컨셉카)를 의미하며, 45년간의 ‘헤리티지’를 담았다는 뜻이란다. 50년 남짓한 역사의 현대차가 이런 허세를 부리니 130년도 넘은 벤츠의 이런 언행쯤은 애교로 보인다. 사실 전기차 전환과 관련해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재규어 E-타입 제로, 애스턴 마틴 DB6 일렉트릭, 클래식 미니 일렉트릭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각 회사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는 클래식 모델로, 전기차 버전으로 제작해 홍보에 쓰이고 있다. 얼마 전 포드는 뜬금없이 대표 모델인 스포츠 쿠페 머스탱의 이름을 차용한 ‘머스탱 마하-E’라는 전기 SUV를 출시했다. 기존 자동차 회사들이 이처럼 ‘전통팔이’에 혈안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신생 회사와 격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과시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테슬라 모델 3가 미국을 넘어 유럽 프리미엄 D 세그먼트 시장에서까지 벤츠 C-클래스를 위협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테슬라가 끝이 아니다. ‘제2의 테슬라’를 목표로 칼을 갈고 있는 중국 전기차 회사가 한둘이 아니다. 완성도도 무시 못할 수준이다. 최근 폭스바겐 그룹 회장인 헤르베르트 디스의 “적응하지 못하면 폭스바겐 그룹도 노키아처럼 될 수 있다”라는 말이 이런 불안감을 설명한다. 폭스바겐은 현재 사업 구조를 전기차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기존 자동차 회사의 이런 전략이 ‘전통팔이’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번 시승에서 ‘1886’이라는 벤츠의 과장이 아쉬웠다. 세심하게 다듬어 완성도가 뛰어난 전기차임은 분명했지만, 무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이라는 이야기를 할 만큼은 아니었다. 프리미엄(한 가격의) 전기차라는 장벽을 넘을 만큼 신선하지도 않았다. 벤츠 전기차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800V 고전압 시스템을 사용하는 모델(EQS로 예상된다)이 나올 때까지 미뤄두기로 했다. 7~8년 전, 테슬라가 모델 S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때만 해도 자동차업계 관계자, 아니 적어도 자동차 기자나 칼럼니스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기차의 가능성을 증명했다는 점이 놀랍긴 했지만, 자동차로서의 가치는 낮았기 때문이다. 우린 기존 자동차 회사가 전기차를 제대로 만들기 시작하면 이보다 훨씬 매력적일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존 자동차 회사들 은 전동화의 흐름에 빠르게 올라타지 않았다. 설계, 생산, 판매, 디자인, 역사 등 그들이 수십 년간 견고히 쌓은 전통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테슬라를 비롯한 중국 전기차 회사들의 약점은 전통의 부재다. 그리고 세상에는 근본 없는 회사의 제품을 믿지 않는 소비자가 많다. 자동차처럼 값비싼 소비재일수록 더욱 그렇다. 기존 자동차 회사들이 발목 잡던 전통을 발판으로 삼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단언컨대, 제2의 노키아는 분명 나올 것이고, 그게 어떤 브랜드가 될지는 적어도 5년 안에 결정될 것이다.

 

류민 수동변속기와 전기모터 모두를 사랑하는 자동차 칼럼니스트.






봄날의 잠을 좋아하세요?
봄은 과연 졸음의 계절인가. 춘곤(春困, 봄날에 느끼는 나른한 기운이라는 뜻)이란 말을 보면 그런 것 같다. 한국, 중국 같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독일에도 춘곤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다. 영어권에선 ‘spring fever’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단어에는 춘곤이란 뜻도 있고, 정반대로 봄의 열정이란 뜻도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현상이 다 나타난다. 봄바람에 마음이 들떠 수업 시간에 산만하거나, 활력이 생겨 봄맞이 대청소에 나서는 건 분명히 스프링 피버의 두 번째 뜻에 해당한다. 반대로, 봄날 햇볕을 쐬다 보면 온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쏟아진다. 사실 봄에만 그런 건 아니다. 추운 겨울날 외출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와도 졸린다. 밤에 자기 전 따뜻한 물로 목욕이나 샤워를 해도 잠이 쏟아진다. 우리의 직관과는 정반대로 몸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피부가 따뜻한 물 또는 공기와 접촉하면 혈관이 확장된다. 피부를 통해 열을 방출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의 중심부 체온이 떨어지면서 수면을 조절하는 뇌의 영역을 자극해 졸음이 쏟아진다. 2005년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피부 체온을 0.8。C만 높여도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26% 단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장년층일수록 이렇게 피부 온도를 높여주는 게 잠드는 시간을 줄이고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연로한 부모님이 온수 매트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일교차가 크고 날씨가 변화무쌍한 봄에는 추웠다가 따뜻해지다 하는 일이 빈번해 졸리기 쉽다. 봄날, 졸린 이유로 호르몬의 변화를 들기도 한다. 일조 시간이 짧은 겨울에는 잠과 관련된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봄볕이 들면서부터 멜라토닌 생산량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밤에 자는 시간이 줄고 낮에 더 많이 움직이게 된다. 이렇듯 더 적게 자고 활동량이 늘어나면 적응하기까지 과도기에는 피곤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춘곤을 느끼게 되는 것. 설득력은 있지만, 증명된 이론은 아니다. 겨울이나 봄이나 실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요즘 현대인에게 통하는 이야기인지도 조금 의문스럽다. 비타민이나 영양 부족으로 봄에 피곤하다는 주장도 있다. 겨울철 식량이 부족하던 과거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지 못해 비타민 C 부족으로 나타나는 괴혈병 증상이 춘곤과 비슷한 양상이었다고 믿는 역사가도 있다. 영양 결핍을 걱정할 일이 없는 요즘은 겨울철 비타민 D 부족이 이삼월 춘곤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역시 근거는 미약하다. 춘곤이란 말은 오래전부터 사용해왔지만, 춘곤증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부터다. 1980년대에는 비타민제가 춘곤증에 도움이 된다는 광고와 함께 더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춘곤증은 의학적 질병도,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증상도 아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반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봄이 오면 들뜨는 사람도, 겨울 동안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지는 사람도, 졸음이 쏟아지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몫이지만 그냥 몸이 적응하도록 두고 따스한 봄날부터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정재훈 약사이자 푸드 라이터. 식품 포장 뒷면의 깨알 정보 읽는 것을 좋아한다. 마트와 편의점, 노포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숨어 있는 요리와 먹기의 과학에 대한 글을 쓴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문화의 계승과 향수
2010년, 일본의 교토/오사카 판 <미슐랭> 가이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교토는 일본 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교토야채(京野菜)의 생산지이고, 다수의 노포가 있는 도시다. 그렇기에 <미슐랭> 가이드에 7곳의 가게가 별 3개로 지정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가이드에 등재되기로 한 교토의 몇몇 식당이 자신의 가게는 가이드에서 빼줄 것을 요구한 것이 화제가 되면서 기사가 난 적이 있었다. 유명한 가이드북에 등재되는 것이 식당의 입장에서 수익을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이로울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정반대의 요구라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식당 주인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이러하다. “가이드북을 들고 가게를 찾는 뜨내기손님들이 늘어나면 지금껏 자신들의 가게를 찾아온 단골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없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교토의 전통적 상인들은 단골이나 단골의 소개로 온 사람만을 상대로 거래했다. 그래서인지 교토의 가게들은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곳일수록 간판이 작다. 아는 사람만 오라는 의미다. 교토의 상인들은 자신의 가게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손님을 상대로 최선의 대접(お持てなし오모테나시, 최고의 환대를 의미하는 일본어)을 하는 것을 상법(商法)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이는 몇 대에 걸쳐 가게 주인과 손님 사이에 쌓아온 하나의 문화였다. 한 손에 <미슐랭> 가이드를 들고 방문하는 뜨내기손님으로 인해 대를 거쳐 만들어온 이런 문화가 무너질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는 유행가 가사처럼 지난 10년을 지나면서 교토의 가게도 크게 변했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거대 자본이 들어오고, 한 해 5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교토를 방문하면서 교토의 상인 문화는 근간부터 흔들렸다. 호기롭게 <미슐랭> 가이드에서 자신의 가게를 제외해달라고 했던 가게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자식들의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전통적 상법을 바꾸는 노포도 생겨났다. 일본의 경제학자 이이오 가나메(飯尾要)은 “어떠한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음미하는 능력을 향수(享受) 능력”이라 정의했다. 향수 능력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애착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 대상을 문화라고 생각해보자. 문화라는 것은 생산자의 창작 활동 뿐 아니라 소비자의 향수 능력에 의해서도 발전된다. 문화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문화를 다시금 생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문화에 대한 향수 능력을 키움으로써 사회는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요구받고 달성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적 연쇄반응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계승이다. 결국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문화의 수준과 계승은 결국 개개인의 문화 향수 능력으로 귀결된다.

 

한승욱 도시와 사람을 바라보고, 그 생각을 글과 스케치로 남기는 도시 연구자. 9년간 교토에서 지낸 시간의 켜가 도시를 깊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게 한 사유의 틀이 되었다.





자꾸 만지고 싶은, 기계식 키보드
입력만 잘되면 되지, 키보드에 뭐 하러 돈을 쓰나 싶기도 할 거다. 한데 기계식 키보드 애호가들은 키보드가 건전하고 좋은 취미라 자부한다. 적어도 피겨나 시계 수집 같은 취미의 세계보다는 저렴해 입문하기 쉬운 데다 실용적이니까. 이전까지만 해도 블루투스 연결이 가능하고 휴대성도 좋으며 일명 ‘갬성’을 지닌 애플의 매직 키보드(가위형 스위치(sissor-switch) 방식의 팬터그래프 키보드)를 아무런 불편 없이 사용하던 나는 타이핑양이 많아지면서 손가락 끝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키가 쑥쑥 깊게 눌리는 기계식 키보드의 재미를 느끼고 나서는 애플 매직 키보드의 맨바닥을 치는 듯한 느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물론 키감은 취향의 영역이라 키감으로 논란이 많았던 맥북의 나비식 키보드를 여전히 선호하는 이도 있다). 결국 여러 스위치를 사용해보고 정착한 키보드는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키감으로 묘사되는 무접점 키보드 ‘해피해킹’이다. 장편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1년 전, 키보드와 더 밀착된 삶을 살게 된 나는 기계식 키보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수는 장비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나는 고수가 아니니까. 그러나 입문자에겐 기계식 키보드의 구매 선택지가 너무나 방대하고 알아볼 것이 많은 만큼 글쓰기로부터의 도피에 충실할 수 있었다. “기계식 키보드, 그거 엄청 시끄러운 거 아냐?”라고 반응한다면 PC방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청축 키보드를 떠올린 것이다. 구분감이 명확하고 짤칵하는 경쾌한 클릭음이 특징인 청축 스위치는 게이밍 키보드의 대표 격이다. 이 외에도 적축, 갈축, 흑축 등 종류가 다양하며, 사무실에서 사용해도 충분한 저소음 스위치도 있다. 짤칵짤칵, 도각도각, 서걱서걱 등 다양한 타이핑 소리와 키압을 포함한 키감은 정답이 없는 취향의 영역이므로 ‘끝판왕’ 같은 수식어가 붙는 키보드는 없다. 자신의 취향에 어떤 것이 맞는지는 직접 만져봐야 알 수 있다. 취향이 명확하지 않은 입문자라면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직접 타이핑해볼 것을 추천한다. 재미 삼아 기계식 키보드 소리나 타자기 소리를 나게 할 수 있는 ‘Qwertick(윈도우 전용)’, ‘Tickeys(맥 전용)’ 같은 소프트웨어도 설치해볼 만하다. 키감은 취향의 영역이니 추천이고 뭐고 하나 마나 한 소리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타이핑양이 많은 환경에 손가락의 피로감만 따진다면 키압이 낮은 리얼포스 ‘30g’ 모델을 추천한다. 손가락을 올려놓고 멍 때리기만 해도 키보드가 눌린다는 저압 키보드다. 대신 키압이 낮은 만큼 기대했던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듯한 명료한 구분감이 없어 심심할 수 있다. 키보드를 애정하게 되면, 더 나아가 키보드를 꾸미는 ‘키캡 놀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알록달록한 색의 키캡부터 정교한 피겨 부럽지 않은 아티잔 키캡, 초심자가 보기에는 이걸 어떻게 쓰라는 건지 싶을 정도로 무각인 키캡까지 다양하다. 키캡 놀이에 빠지면 키보드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된다. 기계식 키보드를 쓴다고 글이 더 잘 써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는 말에는 도움이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타이핑을 즐기게 된 뒤 키보드를 두드리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얼마 전 “스마트폰 전면 카메라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키보드가 보이지 않더라도 손가락의 움직임을 인식해 타이핑이 가능한 가상 키보드가 개발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술이 더 발전해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아도 문자를 입력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키보드는 사라지게 될까? 물리 키보드를 선호해 여전히 블랙베리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듯이 키보드는 타자기처럼 구시대 유물로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최근에 식물 키우는 취미를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자꾸 만지고 싶은데 손의 열기 때문에 잎사귀가 시들어서 만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에 비해 키보드라는 취미는 얼마나 만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지.

 

정대건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키보드 애호가. 영화 <투 올드 힙합 키드>, <메이트>를 연출했고, 장편소설 등단작 <GV 빌런 고태경>이 2020년 상반기 출간 예정이다.






최소한의 집
가족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생겨나고 혼자 사는 세대가 확대되면서 공유주택, 협소주택 같은 작고 효율적인 주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큰 집에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작은 집에 사는 것 아니야?”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의 것만 있는 작은 집은 과연 어쩔 수 없는 선택일까? 최소한의 집 원형을 본다면 오두막이나 동굴이 되겠지만, 그건 너무 먼 이야기인 것 같다. 최소의 집을 이야기할 때 인용되는 건물 중 하나는 1800년대 중반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오두막이다. 소로의 책 <월든(Walden)>의 배경이 된 매사추세츠주 월든 호숫가 옆 오두막은 대략 가로 3m, 세로 4.6m의 작은집이다. 현관을 열면 왼쪽에 침대가 있고, 침대 옆 벽에는 옷 한 벌과 모자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자리한다. 현관 오른쪽에는 조그만 창이 하나 있는데, 그 창 아래 소로가 집필할 때 쓰던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다. 마지막으로 현관 맞은편에는 벽난로와 의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정말 작은 공간이기에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 채 살 수 있었고, 그의 생활이 투영된 사상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삶의 영감을 주고 있다. 근대에 지은 건축물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1965년 8월 프랑스 남부, 자신의 별장 근처 카프마르탱에서 해수욕을 하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직접 설계한 그 별장은 놀랍게도 대략 가로 4.4m와 세로 3.6m의 작은 통나무집이다. 가구로 현관과 내부 공간을 구분하면서 현관 맞은편 벽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장식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 벽면에 사이드 테이블을 사이에 둔 한 쌍의 침대가 있고, 맞은편 벽에는 지중해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창과 그 아래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비록 작은 통나무집이지만 이 집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 중 하나인 ‘모듈’을 적용했다. ‘모듈러(Le Modulor)’는 인간과 공간의 치수 관계를 모듈로 적용한 것인데, 손을 들었을 때 천장 높이는 226cm, 창 상단은 신장과 같은 183cm, 창 하단은 배꼽 높이, 의자는 43cm, 책상은 70cm 등의 기준을 공간에 적용한 것이다. 그는 세계 도처에 훌륭한 건물들을 설계했지만, 이 작은 통나무집을 자신의 휴식처로 선택했다. 한국의 대표적 최소의 집으로는 퇴계 이황이 지은 도산서당을 추천하고 싶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해 1557년부터 짓기 시작해 1561년에 완공했다. 도산서당의 특징은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이다. ‘장수’는 마음을 집중해 공부에 힘쓰는 것이고, ‘유식’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황은 좀 더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소박하고 절제된 세 칸 집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자연과 함께하려는 생활의 균형감을 도산서당이라는 작은 집에서 실천했다. 13년 전쯤 법정스님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사적으로 나눌 기회가 있었다. 스님이 불일암에 기거할 때 주변에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땅에 떨어져 있어 본인의 작은 암자에 가져왔다고 한다. 그곳에 둔 꽃봉오리는 시들 때까지 며칠을 향기와 피고 지는 모습으로 작은 암자를 가득 채웠다고 했다. 그런데 100평 거실에 그 꽃봉오리를 두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셨다. 오래전 일이지만 비어 있음과 무언가를 채우는 것의 의미가 아직까지 머리에 맴돈다. 요즘 작은 집에 대한 관심은 효율과 비용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몸에 잘 맞는 옷은 본인의 많은 것을 대변한다. 집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김대균 착착건축사무소 소장. 인문학을 바탕으로 보편적 세심함을 추구하는 것을 건축적 방향으로 삼는다. 대표작으로 고령성당, 천주교서울대교구 역사관, 이상의 집 레노베이션 등이 있다.






스타트업, 이제 돈을 벌어야 할 때
인공지능, 개인용 로봇, 자율주행차, 디지털 트윈, 가상현실, 증강현실, 빅데이터, 드론, 사물인터넷, 3D 프린팅, 양자 컴퓨터, 스마트 시티, 5G, 클라우드 컴퓨팅,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바이오 테크, MaaS, O2O. 또 무엇이 있을까? 우리를 취하게 만든 단어가. 뭉뚱그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뭔가 멋진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그게 뭔지는 알기 힘든. 알파고가 가져다준 충격은 매우 컸다. 기술이 이렇게 빨리 진화할 줄 몰랐다. 불안한 세계정세와 경제 상황도 한몫했다. 미국과 중국은 패권을 다투며 서로 으르렁거렸다. 그동안 우리 경제를 먹여 살린 IT와 자동차, 조선 산업은 성장이 더뎌졌다. 옛 먹거리는 가고 있는데, 새 먹거리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처럼 주저앉을까 봐 다들 불안했다. 그때 저 단어들이 떠올랐다.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싶으면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알아야 한다. 선지자들은 저 단어가 물길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이게 길이라면 빨리 가야 한다. 스타트업이 먼저 움직였다. 대박을 노리는 투자 펀드가 그 뒤를 밀었다. 기존 기업이 급히 따라왔다. 다들 열심히 달리는데, 나쁜 소식이 자꾸 들린다. 중국 공유 자전거 시장 1위 업체인 오포(Ofo)는 파산 상태에 빠졌다가 디디추싱의 투자를 받아 겨우 목숨을 건졌다. 촉망받던 공유 사무실 기업 위워크(WeWork)는 상장하는 데 실패했다. 더인포메이션의 보도에 따르면, 공유 전동 킥보드업체 라임(Lime)을 비롯해 AR업체 매직리프, 자율주행 트럭을 만드는 스타스키 로봇, 중국 핀테크 업체 통둔(Tongdun) 같은 유명 스타트업 기업도 자금난에 처했다. 그뿐일까. 많은 관심과 투자를 받았지만 파산하거나 위기에 처한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개별 기업이 문제라면 괜찮지만, 위에 적은 마법의 단어 가운데 비즈니스 모델을 증명한 기술은 드물다. AI는 이제야 애플리케이션 형태로 넓은 쓰임새를 찾고 있고, 자율주행차는 사망 사고로 인해 상용화하기도 전에 규제가 먼저 만들어지고 있다. 드론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가상현실과 로봇은 양치기 소년 취급을 받는다. 3D 프린팅은 아예 잊혔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현실에 안착했지만, 관계자가 아닌 사람은 잘 모른다. 이런 상황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승자 독식 구조다. 독점을 위해 처음엔 적자가 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점이 곧 수익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세상에 적자가 나도 좋은 사업은 없다. 적자를 감수하며 어떤 회사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시장을 독점하라고 주는 시간이 아니다. 그사이 ‘비즈니스 모델’을 발견하라는 거다. 그런데 그걸 못했다. 기막힌 아이디어지만, 그걸로 어떻게 돈을 벌지가 빠져 있었다. 기술이 그저 큰 흐름이라면, 물 들어오는 곳은 비즈니스 모델을 가리킨다. 금융 학자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저서 <블랙스완>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구는 뜻밖의 발견을 가져다주고, 그것은 또 다른 뜻밖의 발견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지만 도구가 그 목적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검색엔진으로 시작한 구글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은 광고로 먹고산다. 아마존 매출은 리테일 서비스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수익은 아마존 웹서비스(AWS)에서 70% 이상 나온다. 모바일 게임은 유료 아이템 판매 모델을 개발했다. 애플은 처음에 아이팟 기능이 들어간 전화기를 만들고 싶었지, 스마트폰을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 비즈니스 모델은 항상 기술이나 기기, 서비스가 출시된 뒤 이용자가 특정 기술이나 기능을 선택하고, 이용하고,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기술이 지닌 가능성, 가능성이 보여준 마법에 취해 있을 시간은 끝났다.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이해하고,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스마트폰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카카오톡과 애니팡 같은 킬러앱이 변화를 가져왔다.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다. 이제 이익을 따지는 상인의 눈으로, 냉정하게 꿈을 꿔야 한다. 진짜로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고 싶다면 말이다.

 

이요훈 철학을 전공한 IT 칼럼니스트. 시사・경제・과학 방송에서 IT 분야에 대한 설명을 맡고 있다. 오타쿠가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를 오타쿠라 부른다.






세계 100대 코스는 어떻게 선정되는가?
2020년 미국 잡지 <골프다이제스트>에서 선정한 100대 골프장에 포함된 한국의 골프 코스는 5개다. 사우스케이프(9위)는 한국 골프장으로는 톱 10에 처음 진입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 밖에도 제주에 있는 클럽 나인브릿지(18위), 안양(50위), 잭 니클라우스(54위), 해슬리 나인브릿지(67위)가 포함됐다. <골프다이제스트>는 2년마다 100대 골프장을 뽑는다. 2016년엔 한국 코스가 딱 하나뿐이었는데 2018년 5개로 늘었고, 2020년에도 이를 유지했다. 반면 라이벌 매체인 <골프매거진>에서는 2020년 100대 골프장에 한국 골프장은 나인브릿지 하나였다. 순위는 하위권인 94위였다. 나인브릿지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간판 골프장이다. 2005년 95위로 <골프매거진> 100대 골프장에 진입한 나인브릿지는 2018년 41위까지 올라갔으나 이번 조사에서 무려 53계단이 하락했다. 왜 어떤 잡지의 100대 골프장에는 한국 코스가 5개인데, 다른 잡지에선 하나뿐인 걸까? <골프다이제스트>는 2018년부터 100대 코스를 ‘미국 골프장’과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의 골프장’으로 평가한다. 그러니까 <골프다이제스트> 세계 100대 골프장의 실질적 순위는 100+로 봐야 한다. 그 변화 와중에 한국 골프장이 하나에서 5개로 늘었다. 한국의 골프장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 코스 설계가(혹은 그의 동생, 자녀 등 이름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 설계를 의뢰한다. 미국에선 골프장을 새로 짓는 일이 별로 없어 유명 코스 설계가들은 한국에 적극적이다. 설계가의 이름값도 중요하지만, 골프장을 언제 지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2010년대에 지은 아파트와 1980년대에 지은 아파트의 차이를 생각하면 된다. 새 골프장은 훨씬 세련됐다. 특히 전장이 길다. 오래된 골프장들은 레노베이션을 할 수는 있지만 전장을 늘리기는 어렵다. 땅을 사기도 어렵고, 땅을 어렵게 구했다 해도 전장을 무리하게 늘리다가는 원래 코스와는 전혀 다른 곳이 된다. 아파트 재건축처럼 완전히 부수고 새로 짓는다면, 명문 코스들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사라지는 것이다. 골퍼들의 샷 비거리가 늘고 있기 때문에 전장이 짧은 클래식 명문 골프장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잭 니클라우스는 “선수들의 거리 증가에 버틸 수 있는 코스는 무제한 돈을 쓸 수 있는 오거스타 내셔널뿐”이라고 했다.



1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
2 페블비치 골프 코스. 

그래도 골프장 순위는 잘 변하지 않는다. 두 잡지의 골프장 평가 패널이 미국의 오래된 프라이빗 골프장 회원 위주라서 그렇다. 시네콕힐스(뉴욕 롱아일랜드)나 사이프러스 포인트(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같은, 일반인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폐쇄적인 골프장이 최상위권에 머문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골프장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다. 일단 평가 패널이 한국 코스를 잘 모른다. 너무 멀어 오기 어렵다. 클럽 나인브릿지는 이 핸디캡을 없애려 했다. 2005년부터 WCC(월드 클럽 챔피언십)를 제주에서 개최했다. 명문 골프장 회원의 친선 경기인데, 참가자 중엔 골프장 평가 패널이나 여론선도자들이 있었다. LPGA 투어 나인브릿지 클래식과 PGA 투어 CJ컵도 열어 세상에 골프장을 알렸다. 나인브릿지는 양쪽 잡지 100대 골프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최근 미국에 있는 100대 골프장 컨설턴트를 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후 <골프매거진>에서 순위가 폭락했다. <골프다이제스트> 순위에서도 한국 코스 중 사우스케이프에 밀렸다. 나인브릿지의 순위는 하락할 이유가 전혀 없다. PGA 투어 CJ컵을 개최하면서 코스를 개선했다. 세계 랭킹 1위 브룩스 켑카나 저스틴 토머스같이 뛰어난 선수를 골라낼 수 있는 코스라는 것도 검증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지명도 역시 높아졌다. 이 골프장의 순위가 폭락한 걸 보면 기존 골프장 평가가 주관적인 것을 넘어 매우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골프장 평가와 관련해 2017년 국내에서 희한한 사건이 생겼다. 강원 춘천에 있는 휘슬링락 골프장이 <골프다이제스트>를 형사고소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골프매거진> 한국판에는 휘슬링락이 1위였는데, <골프다이제스트> 평가에서는 1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다. 휘슬링락은 <골프다이제스트>를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기타 위력을 통해 타인의 업무를 방해할 경우 성립되는 업무방해죄로 걸었다. 나는 각각 휘슬링락(<골프매거진>)과 웰링턴(<골프다이제스트>)을 한국 1위로 뽑은 선정 기관에 실망했다. 평가 내용이 황당하다면 선정 기관의 권위가 떨어진다. 그렇더라도 평가는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며, 경찰이 출동할 사안은 아니다. 휘슬링락의 소송은 “왜 너는 짜장면보다 짬뽕을 좋아하느냐”라며 항의하고 경찰을 부른 것 같은 인상이다.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한국의 골프장이 얼마나 코스 평가에 민감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골프장 평가에는 개선점이 많다. 한국을 잘 모르는 패널이 한국 코스를 평가하는 게 적절한지, 외국 잡지가 만든 기준으로 한국 코스를 평가하는 게 적절한지, 한국인 패널 한 명이 어디 선정위원이 돼서 자신과 관계가 좋은 골프장 순위를 확 올려놓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국내 골프장 순위도 패널에 포함된 이익단체가 좌지우지할 여지가 높다. 전문가라서 패널에 포함되겠지만, 전문가라서 더 크고 교묘한 조작을 할 수 있다. 나는 골프 라운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재미있고, 이야깃거리가 있고, 서비스와 관리 등이 좋은 곳이 뛰어난 코스라고 여긴다. 아름다운 골프장이 되려면 기본 재료가 좋아야 한다. 주위 자연환경이 멋져야 뛰어난 코스가 나온다. 명코스는 특히 바닷가에 많다. 옷 잘 입는 사람처럼 코스는 조경이나 관리를 잘해야 한다. 재미있는 골프장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잘 치는 사람은 어려운 코스를, 못 치는 사람은 쉬운 코스를 좋아한다. 사람으로 치면 고담준론을 얘기하는 사람, 가벼운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 같은 것이다. 알리스터 매켄지 등 천재적 디자이너는 양쪽을 다 만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어려운 작업이다. 좋은 코스는 무엇보다 질리지 않아야 한다. 각 홀이 개성 있어야 하고, 칠수록 몰랐던 매력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설계자의 감각이 뛰어나야 하는데, 타이거 우즈는 자연이 만든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이 부분 최고라고 한다. 이야깃거리는 오래될수록 쌓인다. 멋지게 늙은 사람처럼 전통 있는 코스는 오라가 있다. 권위 있는 대회를 개최해 전설적 선수의 향취가 남아 있다면 더욱 그렇다. 클럽 하우스, 요리, 서비스도 중요한 기준이다. 아무나 갈 수 없기에 더 가고 싶은 골프장도 있다. 미국 프라이빗 클럽 일부가 이런 신비주의 전략으로 이른바 베스트 코스 상위권에 올라 있다. 반대로 가격 대비 효율성인 가성비와 근접성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 본다.

 

성호준 중앙일보 골프 팀장. 네이버 보이는TV에서 ‘골프인사이드’를 방송한다. JTBC 골프 LPGA 탐구생활을 진행하며 <골프는 인생이다>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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