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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8

을지로의 디자이너들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디자인 그룹 프래그스튜디오와의 만남.

1 프래그스튜디오의 디자인 작품을 진열해놓은 작업실 풍경.
2 프래그스튜디오의 멤버. (왼쪽부터) 최현택, 조민정, 이건희 디자이너.

공예, 디자인, 예술의 상관관계
최근 세운상가에 가본 적이 있는지. 전자·기계·컴퓨터 상점의 본거지였던 과거의 영화가 여전히 잔재하며, 젊은 디자이너의 패기 넘치는 스튜디오와 향기로운 카페도 곳곳에 문을 열었다. 세운상가 뒤편의 오래된 일제강점기시대 건물들은 이제 나이 지긋한 기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이다. ‘을지로에서는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단지 허풍만은 아니라는 것은 오래된 골목을 한 바퀴 돌아보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이렇듯 새롭게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을지로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디자인 그룹이 바로 프래그스튜디오다. 을지로는 이들이 대학 시절부터 철공소와 재료상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찾은 필수 코스였다. 친근한 지역에서 연륜 많은 기술자들의 손을 빌려 일을 처리할 수 있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들의 최근작으로는 아트 북 <워킹 페이퍼 라이트(Working Paper–LIGHT)>, 중부시장 잡지 <바다사막: 멸치>가 있다. <워킹 페이퍼 라이트>는 프래그스튜디오가 책을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시작한 자체 프로젝트다. “아트 북을 수집해왔어요. 우리도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을지로 세운상가라는 지역성을 살려 종이에 전자회로를 삽입한 인터랙션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전도성 잉크로 인쇄해 그림 속에서 스위치를 찾아 반짝 불을 켤 수 있습니다. 펀딩과 페어를 통해 1쇄는 완판됐고, 두 번째 아트 북 <사운드>를 3월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바다사막: 멸치>는 서울시와 함께 재래시장 활성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단순히 예쁜 제품 포장을 추구하기보다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를 개발하고 싶어 만든 잡지다. 서울을 대표하는 건어물 도매시장이지만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중부시장의 맛과 멋을 ‘제1화 멸치’를 통해 소개한다. 독립 서점과 프래그스튜디오 홈페이지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실용적 가치를 담은 디자인을 추구하며 시작했으나 이렇듯 제품, 그래픽, 가구, 환경 등 여러 분야의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다. 재료와 기술의 새로운 방식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기에, 금속공예로 시작한 프래그스튜디오의 독창적 색깔은 장점이자 고유한 특징으로 작용한다.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새로운 재료의 사용이나 핸드메이드 공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튜디오에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제품을 만들 수 있고, 제작 가능 여부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공장 생산의 경우도 완성품의 제작 디테일을 직접 마감하고 수정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제작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안목을 갖추고 있다.
“공예, 디자인, 예술은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기술과 시대가 요구하는 메시지가 급격히 변모하고 있지요. 그 가운데서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유지할지 고민합니다. 특히 클라이언트가 있는 프로젝트는 시간과 비용이 한정적이어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선택할지 빠른 결정이 필요합니다.”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현시대의 특징을 반영해 디자인과 공예, 예술 간 경계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느 지점을 강화할지 주제에 맞게 취사선택하는 것. 다만 예술에 대해서라면 매체와 주제가 너무 다양해서 지금으로서는 감히 논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립박물관 문화재단과 손잡고 만든 <가야본성-칼과 현>전 문화 상품. 가야의 이형토기와 장신구를 메인 상품으로 디자인했다.




3 세운상가에서 접할 수 있는 기술과 재료로 만든 ‘세운메이드-행운 번호 추첨기’ 키트. 랜덤으로 6개 숫자를 조합할 수 있다.
4 중구 대림상가의 옛 간판을 재활용해 제작한 공공 벤치.

2026년, 창립 10주년을 상상하다
“의견 차이로 인한 다툼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초기부터 언쟁하는 일은 없었어요. 가끔 언성이 높아질 때는 있지만, 서로 목표의식이 같아 건설적 이야기가 오갈 뿐입니다.”
처음에는 세 디자이너의 업무에 경계가 없었으나, 요즘은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해서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하게 됐다. 조민정은 2D 디자인, 최현택은 3D 설계, 이건희는 교육 메이킹 키트와 워크숍을 중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프래그스튜디오는 별도 법인 프래그랩을 만들고 디자인과 기술을 결합한 메이커 교육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언어로 배우는 지식도 있지만, 몸으로 배우는 지식도 많습니다. 자전거 타는 법과 같이 몸과 손을 사용해 배우는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가치 있다고 생각해 메이커 교육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정보는 인터넷에서 유튜브만 검색해봐도 상세히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디자이너로서 경험을 통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메이커 문화, 메이커 무브먼트인 것이다.
이들의 교육 프로그램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도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회로나 코딩 도구를 이용한 플립 북과 애니메이션 키트를 주로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전자 얼굴’은 3D 장비를 활용해 개인적 경험을 선사하는 프로그램으로 전자 기기 속 낯선 부품과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귀여운 전자 얼굴 키트다. 교육 프로그램은 직접 운영하기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통해 워크숍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형식이다. 최근에는 한글박물관과 손잡고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꾸미는 새로운 전자 얼굴 세트를 만들기도 했다.
21세기 디자이너에게는 환경에 대한 관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플라스틱, 환경오염 등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알기 어려운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이는 디자이너로서 느끼는 책임감이라기보다는 서울 시민으로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도다. 거창한 디자인 프로젝트보다는 모두가 일상에서 일회용품 사용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플라스틱 재활용이 가능한 기계 데스크 팩토리를 KT&G 상상마당 <플라스틱 러브>에서 전시했으며, 시민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이는 네덜란드 디자이너 다버 하컨스(Dave Hakkens)가 플라스틱 재활용 오픈 소스 ‘프레셔스 플라스틱(Precious Plastic)’을 공개한 것에서 영감을 받아 테이블 사이즈로 제작한 기계다. 커뮤니티 일원을 만드는 다버 하컨스의 탁월한 방법에 감동했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자극을 받았다.
2026년, 프래그스튜디오의 창립 10주년은 어떤 모습일까? 디자이너는 이름이 곧 브랜드다. 하지만 이들은 유명한 브랜드 네임보다는 하나의 건실한 회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지속 가능한 산업 모델을 영위하는 회사를 만들어, 10년 후에도 여전히 다양한 물성과 매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이너로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5 전자 기기 속 부품과 그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자 얼굴’ 키트.
6 그림 속에 숨긴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켤 수 있는 아트 북 <워킹 페이퍼 라이트>. 종이에 인쇄된 전도성 잉크가 전류가 흐르는 길을 만든다.

 

프래그스튜디오
금속공예를 전공한 대학 동문 이건희, 조민정, 최현택이 손잡고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을 통한 디자인을 추구하며 시각, 상품, 가구 등의 디자인 서비스뿐 아니라 예술과 환경, 테크를 융합한 메이커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에디터 이소영(프리랜서)
사진 김정근(인물)   사진 제공 프래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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