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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8

요즘 한국 영화

보통의 관객들이 근래 서사에 부치는 아주 개인적인 사담.

겨울이라는 말이 무색한 미적지근한 저녁이었다. 가벼운 비가 눈처럼 흩날렸고, 옷깃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내며 한 명씩 대치동 소재의 고깃집으로 모였다. 근래 조연으로 자주 보이는 남자 배우 A와 지난해 영화 한 편 올리지 못한 제작사 실장 B, 그리고 타 매체의 기자 C와 나였다. 넷은 며칠 전 영화 <남산의 부장들> 시사회에서 마주쳤다. “언제 한번 뭉칩시다”라는 인사치레를 하고 헤어졌는데, 눈치 없는 실장이 단체 메시지방을 만들면서 자리가 성사됐다. 퍽퍽한 고기를 씹으며 밋밋한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대상은 물론 <남산의 부장들>이었다.
“이성민, 이병헌 선배 연기 좋던데요? 연출도 쫀쫀하고.” A가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물론 좋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좋은 배우들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병헌이 아니었다면,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김규평을 누가 연기했을까(그의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고뇌가 이 영화의 갈등이자 드라마다). 연출도 흠잡을 데 없었다. 자칫 늘어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잘 끌고 갔다. 주된 평이 그랬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뭔가 꺼림칙했다. “그런데 지금 굳이 이걸 왜 찍었을까요?” C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영화를 보는 불편함의 이유는 그거였다. 왜 지금 10・26을 꺼내 든 걸까? “한국엔 아직 이런 정치 스릴러가 없으니까.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걸 만들고 싶었겠지. 검은색 정장 입은 국가 리더들이 거대한 정책을 논의하고, 비리나 음모 같은 민낯도 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기엔 10・26이 딱이잖아.” 소주잔을 비운 B가 말했다. 확실히 우리나라엔 정치 영화가 적다. 이토록 정치에 미친 나라건만 손에 꼽을 편수라니, 이상할 정도다. “영화가 별로라는 게 아니고 지금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거죠. 이건 한국사에서 엄청 중요한 사건이잖아요. 그래서 영화나 소설, 드라마로 여러 번 다뤘고. 그런데 새로운 앵글이 뭐냐는 거예요.” 그의 말에 전부 동의할 순 없었지만, 제작이 결정됐을 때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회적으로 협의된 팩트가 많은 사건을 다루는 건 위험한 일이다. 창작자의 시선이나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 이미 수십 번 재현한 10・26이란 사건에서 낯선 앵글이 나올 수 있을까? 더군다나 임상수 감독은 15년 전 <그때 그 사람들>에서 “겨우 이까짓 것들이 사사롭게 국가를 운영했다”라며 이 모든 걸 촌극으로 규정했다. 그걸 넘어설 수(혹은 빗겨갈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있었다. 결국 <남산의 부장들>은 그 벽을 넘지 못했다(넘을 생각이 없었던 것도 같다). 영화는 역사를 충실히 재현한다. VIP를 본떠 분장한 동그란 귀와 영화 말미 차 바닥에 박하사탕을 버리는 디테일까지, 그 시절의 증언과 사실을 따라갈 뿐이다. 임상수 영화와 다른 점이라곤 기술적 진보로 화면이 더욱 매끈해졌다는 것 정도. 이야기는 때때로 명분을 필요로 한다. 현실을 스크린으로 끌고 들어갈 땐 더더욱. 결국 C의 질문인 “왜 지금 이걸 찍었을까?”에 대해선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동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트렌드니까. 반려동물이다, 보호다 관심 많잖아. 디즈니가 <닥터 두리틀> 을 제작하기도 했고. 걔들이 하면 되거든. 그 흐름에 올라타려고 한 것도 있겠지.” 영화 <해치지 않아>와 <미스터 주: 사라진 VIP>가 잇달아 개봉(애니메이션 <슈퍼 베어>도 있었다)한 것을 두고 B는 ‘기획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닥터 두리틀>을 선택하자 충무로엔 동물과 관련한 시나리오가 몇 편 돌았다. 이야기는 어떤 흐름을 갖는다. 시대가 원하는 서사가 있다. 그러나 그 흐름이 꼭 흥행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세 편의 영화는 모두 국내에서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닥터 두리틀> 160만 명, <해치지 않아> 120만 명, <미스터 주: 사라진 VIP> 50만 명). “아이나 동물이 나오면 영화가 잘된다는데, 한국은 아닌 것 같아요. 동물 나와서 잘된 영화가 없어요.” C가 씁쓸하게 말했다. 분명 선뜻 떠오르는 영화가 없다(물론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같은 좋은 영화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관객의 취향인지, 아니면 만듦새의 문제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그래도 <해치지 않아>가 제일 좋지 않았어요(<닥터 두리틀>은 논외로 치자)? 제작 초기만 해도 배우의 무게감이나 이슈 면에선 ‘미스터 주’가 유리할 것 같았는데, 까보니 완성도가 달라요. ‘미스터 주’는 보기 불편했어요.” A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해치지 않아>와 <미스터 주: 사라진 VIP>는 공통분모가 많다. 비현실적(?) 이야기가 소재고 CG를 가미했다. 장르는 코믹 휴먼 드라마 정도? 하지만 정도와 디테일에서 다르다. “결국 뭐가 주(主)인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미스터 주’는 계속 어색했어요. 몰입이 자꾸 끊기더라고요. 반면 <해치지 않아>는 수용이 가능했다고 할까요.” A의 말처럼 결국엔 완성도의 문제다. 현실과 비현실이 납득과 거부감을 뜻하진 않는다. 우리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을 때는 허깨비나 말하는 동물이 등장했을 때가 아니라 어색한 감정의 부딪힘, 논리의 비약, 부실한 사유 같은 불협화음을 느낄 때 발생한다. “그래도 두 편 다 국내에선 낯선 장르라 반가웠어요. 한국 영화는 소재가 한정적이니까. 그런데 잘됐더라면 또 한동안 스크린에서 동물만 보겠구나 싶어 씁쓸하더라고요.” C가 우려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치킨에서 대만 카스텔라로, 벌꿀 아이스크림에서 매운 떡볶이 집으로 조금만 인기가 있다면 창궐하듯 몰리는 국내 요식업처럼, 영화판도 비슷하다. 누군가 대박을 치면 모두가 그 깃발을 향해 달려간다. 비슷한 소재와 설정이 난무하고, 심지어 오리지널 스코어나 포스터까지 닮게 제작한다. 마블이 성공을 거두고 국내에 쏟아진 무수한(무성의한) SF 영화나 아직까지 상당수 작품을 잠식 중인 범죄물은 이야기 쏠림 현상이 얼마나 심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건 한국 영화가 안고 있는 과제다. “이 판 사람들, 생각보다 사고가 협소해. 양은냄비처럼 금세 끓었다 식어. ‘되는 이야기’라는 인식이 있는데, 가만히 보면 잘 만든 영화가 되거든. 한국 관객은 충분한 소비력이 있는데도 신선한 이야기를 만날 기회가 적어.” 결국 이야기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 그러려면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이야기를 가져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웹툰은 곳간이나 다름없다.
“웹툰 원작 영화 중에선 <시동>이 제일 좋았어요. 캐릭터 좋고 이야기 깔끔하고. 박정민이나 마동석도 좋은 필모그래피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핏이 맞았어요.” <시동>은 원작과 영화가 어떻게 시너지를 내는지 보여준 좋은 사례다. 일단 작가 조금산의 원작이 원체 좋았다. 웹툰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동>은 원작에 충실한 영화다. 그러나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은 결코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결국 이 모든 공은 영리한 감독과 좋은 배우의 몫이다. <시동>의 이야기는 평범하다. 나라의 수장이 살해당하거나 동물과 대화하는 상황에 빗대면 아주 사사로운 이야기지만, 대중과 만나는 접점은 훨씬 넓다. 생활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다. 거기서 울림이 나온다. B도 그런 의견이었다. “딱 봐도 화려한 영화는 아니잖아. 관객도 엄청 큰 영화적 체험을 기대하고 오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간이 딱 맞는 영화인 거지. 입소문에 상영관도 늘어났고. 요샌 관객이 흥행을 결정해. 전처럼 마케팅 힘이 세지 않거든.” <시동>은 <백두산>과 <천문>, <포드 V 페라리>라는 공룡의 틈바구니에서 손익분기점을 가뿐히 넘었다. “반면 <히트맨>은 아쉬웠어요. 웹툰을 소재로 쓰는 방식이라 신선할 것 같았어요. 그럭저럭 킬링 타임용 오락영화론 괜찮다 했는데 마무리가 너무 산만했어요. 다 보곤 ‘내가 뭘 봤지?’ 싶더라고요.” 몇 년 전 연출을 맡은 최원섭의 독립 영화 <불타는 내 마음>을 봤다. 다소 과한 설정이긴 하지만 장점이 많은 영화였다. 극을 이어가는 뚝심과 캐릭터를 빚는 능력 그리고 독특한 코드의 코미디가 있었다. 그가 입봉한다고 했을 때 제2의 이병헌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 아쉽지만, 그 기대는 차기 작품까지 미뤄두기로 했다. 마이너한 코드의 창작자와 대자본은 상당히 산만한 불협화음을 냈다. <히트맨>은 몇 줄로 정리 가능한 단출한 플롯을 지녔다. 영화적 야심보다는 유머와 액션으로 원초적 쾌감을 주는 데 주력한 영화다. 중반부까진 적절한 위트와 호흡을 유지하지만, 후반에 자멸한다. 그게 장점을 전부 묻어버렸다. 기발한 설정이 이야기를 책임지진 않는다. 아무리 기가 막힌 상황과 캐릭터를 만들어도, 이야기는 정갈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이야기란 관객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최원섭은 그걸 놓쳤다. “그래도 권상우 선배는 좋던데요? 자기 캐릭터가 확고히 생긴 것 같아요. 생각보다 호감으로 보고 편안히 받아들이는 관객이 많았어요.” A는 부러운 듯 말했다. 확실히 40대의 권상우는 물이 올랐다. 그는 송광호나 정우성, 박정민이 못하는 캐릭터를 구축했다. 대중에게 소구력 있고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가 한 명 탄생했다는 건 관객으로서 반가운 일이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일러스트 최익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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