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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0 FEATURE

지금 주목해야 할 이슈들

  • 2020-01-17

2020년의 첫 질문들과 일곱 명의 시선.



경쟁 시대의 종말
Mnet 프로그램 <프로듀스×101> 순위 조작 사건의 여파가 만만찮다. 팬덤으로부터 시작한 문제 제기는 CJ ENM의 고발 및 경찰 조사로 이어져 <프로듀스×101>과 <프로듀스48> 담당 프로듀서의 구속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 듯하다. <프로듀스>의 모든 시리즈뿐 아니라 <쇼미더머니>와 <슈퍼스타K> 같은 종영 프로그램에도 새삼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 사실 상징적 음악 채널인 Mnet의 정체성이 오디션 음악 프로그램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1995년 한국 케이블 방송 시대와 함께 문을 연 Mnet은 2009년 <슈퍼스타K> 시즌 1의 성공을 기반으로 현재의 정체성을 쌓았다(<슈퍼스타K>는 2016년 시즌 8까지 이어졌다). 이 외에도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2012년의 <보이스 코리아>와 <쇼미더머니>, 2015년 <언프리티 랩스타>와 2017년 <고등래퍼>까지 다양한 실험이 이뤄진 것과 더불어 2016년 <프로듀스×101>의 성공으로 아이돌 연습생을 출연시키는 포맷이 2016년 <소년 24>와 2017년 <아이돌학교>로 이어졌다. Mnet을 오디션 프로그램 방송사와 동일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경쟁이 바탕이 됐다. 토너먼트 방식의 경쟁으로 우승자를 가리고 그를 기반으로 음악 활동을 보장받는다. 오디션이 데뷔를 목표로 한다면, 경쟁은 지속 가능한 활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많은 사람이 이 경쟁 구도 자체를 문제 삼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쟁이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발전에 일부 기여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공정성’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도 공정성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Mnet 입장에서는 브랜드의 신뢰도까지 무너진 셈이다. 쉽게 회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동시에 공교롭게도 <슈퍼스타K>가 시작된 지 10년 만에 경쟁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도 든다. ‘경쟁 시대의 종말’에 대한 징후는 지난여름 방송한 <컴백전쟁: 퀸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활동하고 있는 걸 그룹이 출연해 컴백 이벤트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는 컨셉은 시작 전부터 논쟁이 되었다. 나조차 ‘뭘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이런 우려와 논란보다 출연한 걸 그룹이 무대를 대하는 태도가 부각되었다. 그 와중에 섹시 스타 이미지로 각인된 AOA의 설현, 청순 소녀 타입 이미지로 고정된 오마이걸, 러블리즈 같은 걸 그룹의 멤버가 하고 싶은 음악과 꾸미고 싶은 무대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인터뷰를 공개하며 <퀸덤>은 기존 경쟁 프로그램과 조금 다른 관점을 얻었다. 아이돌 시장에서 걸 그룹의 위치를 재고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퀸덤>은 경쟁하지만 경쟁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출연한 걸 그룹은 우승보다는 개성적 무대를 선보이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AOA가 마마무의 ‘너나해’를 멋지게 커버한 무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다 <프로듀스> 시리즈의 순위 조작 사건이 불거졌으니, 새삼 <퀸덤>의 의미가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경쟁 프로그램의 종말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비전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작년과 올해 벌어진 모든 일, 버닝썬 사건으로 촉발된 연예계의 미투 운동, YG엔터테인먼트의 신임 대표를 맡은 황보경 대표로 상징되는 여성 리더십의 기대, AOA의 재기, 트와이스가 만드는 걸 그룹의 새로운 활동 방식 등 이제껏 업계 관행처럼 여겨지던 많은 것이 무너졌다. 브랜드의 관점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마케팅이나 광고로 상품을 부각시키던 시대는 끝났다. 매스미디어가 주도하던 시장도 막을 내리고 있다. 10년 후쯤 우리는 2019년을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차우진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저술가로 <청춘의 사운 드>, <대중음악의 이해>, <아이돌> 등을 출간했다. 현재 ‘스페이스오디티’라는 스타트업에서 팬 문화와 콘텐츠, 미디어의 연결 구조를 고민 중이다.




자동차 회사는 왜 사용자 경험에 목을 맬까?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 요즘 자동차 회사에서 신차나 컨셉카 인테리어 전략을 소개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새로운 경험’, ‘특별한 경험’ 등 좀 더 친근하게 표현하는 회사도 있지만, 결국 의미는 같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아예 특정 시스템에 이 단어를 그대로 붙였다. 신형 GLE를 통해 선보인 새 인공지능 음성인식 플랫폼 MBUX가 바로 ‘메르세데스(M)-벤츠(B) 사용자(U) 경험(X)’의 줄임말이다. 자동차 회사에서 왜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용자 경험은 사용자가 제품, 서비스, 시스템 등을 이용하며 겪는 모든 경험을 뜻한다. IT업계에서 쓰기 시작한 말이라 전자 시스템의 사용자 환경(UI)에 한정된 것처럼 쓰이는데, 사용자 경험의 범위는 훨씬 넓다. 자동차에선 강력한 가속 성능, 짜릿한 핸들링, 뛰어난 연비, 고성능 오디오, 고급 마감재 등 다른 제품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 그 자동차만의 사용자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는 사용자 경험을 주로 인테리어, 특히 인포테인먼트 같은 시스템 측면에서 강조한다. 그들이 단어의 속성을 몰라서 그런 걸까. 정반대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IT업계 단어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들이 이런 전략을 펼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요즘 공산품은 성능이나 만듦새로는 차별화하기 어렵다. 기술 평준화 때문이다. 게다가 독자적 디자인도 수명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애플 아이폰을 성능이나 품질 또는 디자인 때문에 샀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아이폰의 경쟁력은 이제 고유의 OS다. 자동차 회사가 공업 용어 같은 사용자 경험이라는 말을 써가며 각종 시스템을 포함한 인테리어 전략을 부각하는 배경에는 이런 흐름이 있다. 인테리어는 브랜드와 자동차 고유의 가치를 가장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요소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점점 심화될 것이다. 전동화와 완전 자율주행 기술 상용화로 인해 자동차 회사 간 성능과 주행 특성의 차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 엠블럼 말고는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완전 자율주행 기술은 자동차의 이용 형태도 바꾼다. 필요할 때만 부르는 자율주행 공유차에서는 인테리어와 시스템 말고는 브랜드에 따른 고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요소가 없을 것이다. 고객이 차에 탔을 때, ID 또는 스마트폰의 정보를 읽어 고객에게 얼마나 맞춤화된 환경을 제공하느냐가 그 브랜드의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몇몇 자동차 회사가 ‘용산표 조립식 컴퓨터’처럼 프로그램과 인테리어를 뺀 깡통차를 파는 ‘플랫폼 제공업체’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금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사이 사용자 경험은 다른 용어로 대체될 수도 있다. 하지만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 회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술 평준화로 인한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기아자동차 스팅어의 성능은 BMW 3시리즈와 견줄 정도고, 현대자동차 그랜저 실내는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와 별 차이가 없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사전에 전기모터는 없다”라고 힘주어 말하던, 자존심 센 포르쉐가 디지털 계기반을 단 고성능 4도어 전기차를 내놓은 이유가 자동차 제조에 뛰어든 지 10년 남짓 된 신생 회사 테슬라 때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류민
자동차 칼럼니스트. 수동변속기와 전기모터 모두를 사랑하는 이중인격자다. 넓은 시각으로 핵심을 꿰뚫는 글을 쓰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년 후, 그래도 당신은 외로울 거야
코끝을 간질이며 하는 키스를 좋아한다. 사실 키스보다 키스하기 전 속삭이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그런 느낌을 기술이 대신할 수 있을까? 설마, 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VR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우연히 보게 된 가상현실 영상에 생각이 바뀌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데, 나도 모르게 키스하듯 눈을 감았다. 맙소사, 이런 것에 마음이 두근거리다니. 이거야말로 역메타픽션 아닌가. 얼마 전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리얼돌 수입 허가 금지 요청’ 글을 두고 작은 논쟁이 있었다. 대법원에서 ‘리얼돌’ 수입 허가 판결을 내리자, 사람과 비슷한 성인용 인형의 수입 금지 요청 청원이 올라왔다. 수입 여부에 대한 찬반을 떠나, 리얼돌은 점점 널리 퍼지는 추세다. 스위스 루체른, 미국 네바다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실제 여성 대신 리얼돌이 있는 가게가 문을 열었다. 스스로 리얼돌을 구매하는 소비자도 꽤 있다. 리얼돌은 점점 로봇으로 진화하고 있다. 외모는 포토샵을 거친 사진과 비슷할 정도로 정교해졌다. 중국 성인용 리얼돌 회사 ‘AI-AI tech’는 숨 쉬는 것처럼 가슴이 움직이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로봇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리얼보틱스(Realbotix)에서 출시한 ‘하모니’는 조만간 AI 눈을 가질 예정이다. 가상현실에 마음이 끌린다면, 리얼돌이라고 안 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리얼돌과 함께 ‘사는’ 남자가 꽤 있다.
리얼돌이 진화하면 로봇에게 사랑을 빼앗길까? 가능성은 크다. 우선 남녀 가리지 않고 혼자 사는 이가 늘고 있다. 통계청이 2017년 발표한 ‘혼인 상태 인구 구성비’ 보고서에 따르면, 2035년에는 남성 생애 미혼율이 29.3%에 달할 것이다. 인간관계에 지쳤거나 미숙한 사람에게도 좋다. 로봇은 사람처럼 복잡하게 따지거나 캐묻지 않는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에겐 분명 로봇이 필요하다. 로봇이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가오는 순간, 인간관계가 바뀔 거라 말하는 이도 있다. 러브돌이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나를 인정해줄 때,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늘어날 거라고. 많은 이가 사람과는 플라토닉, 로봇과는 에로틱한 관계를 맺게 될 거라는 말이다. 2020년 출시될 ‘러봇(LOVOT)’이란 애완 로봇은 ‘그저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한다. 강아지처럼 사람에게 안기는 이 로봇은 가격이 비싼데도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매진됐다. 러브돌이 ‘러봇’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모든 관계에는 ‘애증’이 존재한다. 좋은 부모라도 아이를 혼낼 때가 있고, 싸우지 않는 연인은 별로 없다. 갈등이 있어야 정도 들고 믿음도 생긴다. 러브돌이 진화한다 해도 그런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쓸데없는 말이다. 이미 세상은 변했다. 관계는 넓고 얕아졌다. 마음에 안 들면 쉽게 “나는 너를 캔슬하겠다”라고 말한다. 이런 시대에, 러브돌은 조만간 훌륭한 동반자가 될 자격을 갖췄다. 그때가 와도, 외롭긴 외로울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요훈
철학을 전공한 IT 칼럼니스트. 시사・경제・과학 방송에서 IT 분야에 대한 설명을 맡고 있다. 오타쿠가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를 오타쿠라 부른다.




‘핫’한 여행에 대한 뜨거운 질문
“요즘 어느 도시가 핫해요?”, “그 도시에 가면 뭘 해야 해요?” 어릴 때부터 혼행(혼자 하는 여행)을 즐긴 데다 여행 전문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까닭에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가끔은 그 도시를 속성으로 둘러볼 수 있는 알짜배기 루트를 짜달라는 다소 황당한 요청도 받는다. 그럴 때면 잘 아는 여행지라도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듯하다. 모든 사람에게 정답인 여행이 있던가? 내가 좋아하는 곳이나 여행 방식을 이 사람도 좋아할 거란 확신이 있나? 그나저나 핫하다는 게 대체 뭐람? 관광객이 들끓는 도시에서 시끄러운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과연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에 이른다. TV, 넷플릭스, 유튜브 등 각종 매체에서 여행지를 소비하는 방식을 보면 나 스스로도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기 안 가봤어?”, “이거 처음 먹어봐?”, “그래도 이 정도는 알지?” 굳이 남을 깎아내리지 않고도 우월감을 느끼는 방식은 다종다양하다. 여행 목적이 ‘남들 다 해본 거 나도 해봐야 하니까’, 과업 혹은 스펙처럼 된 요즘 세상이 별로 놀랍지는 않다.
반드시 따라야 할 여행의 바이블이라도 있는 건지, 마치 십계명처럼 여행지를 결정할 때 흔한 수순이나 패턴이 있다. 유럽의 첫 관문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의 ‘본진’이어야 하고, 나를 성찰하고 싶을 땐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 속이어야 할 것. 돌아와서 밤새 무용담을 떠들고 싶다면 ‘세계 7대 불가사의’ 같은 그럴싸한 수식어가 붙은 곳으로 고행길을 떠난다. 요즘 여행깨나 한 사람들과 대화하려면 베트남 다낭이나 나트랑,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눈여겨봐야 한다. 능동적 ‘인싸’로 인정받고 싶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기를. 최근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으로 신음하는 여행지는 앞에 열거한 리스트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오버투어리즘은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설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관광객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을 말한다(네이버 지식백과 발췌). 국제연합 세계관광기구(UNWTO)는 최근 오버투어리즘의 심각성을 알리는 보고서에서 베네치아, 루체른, 케임브리지, 프라하 등 11개 도시를 오버투어리즘 현상이 심각한 곳으로 언급했다. 물론 그 밖에도 많다.
부킹닷컴은 최근 발표한 ‘2020년 주목해야 할 8대 여행 트렌드’의 첫 번째 트렌드에서 오버투어리즘을 언급했다. 전 세계 여행 신을 뒤흔드는 이 단어가 세상에 나온 건 고작 3년 반 전의 일이다. 미국 여행 전문 미디어 <스키프트(Skift)> CEO 라팟 알리(Rafat Ali)는 아이슬란드 관광의 영향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서문: 다가오는 과잉 관광의 위험(Foreword: the coming perils of overtourism)’이라는 제목을 붙였다(<Skift> 2016년 8월 기사). 4년 전만 해도 검색조차 되지 않던 이 단어가 2019년 6월에는 구글 트렌드 관심도 100%를 기록하면서 여행 시장의 중심추가 달라졌다. 소비의 키를 쥔 여행자 중심에서, 현지인과 여행자가 상생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 자명한 사실.
여행자를 유혹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각국의 관광청조차 오버투어리즘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정부 차원의 광고를 전면 중단했고, 2020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비싼 관광세를 부과할 예정이다. 페루 마추픽추는 입장권을 예약제 방식으로 변경해 성수기 시즌 수용 인원을 제한하고, 최대 체류 권장 시간을 정해놓았다. 하와이 관광청은 최근 발표한 ‘쿨리아나’ 캠페인을 통해 여행자의 책임이나 전통문화 존중을 강조하며 우회적으로 오버투어리즘의 심각성을 알렸다. 핀란드 관광청 역시 공식 사이트에 ‘지속 가능한 핀란드를 위한 선서’ 페이지를 만들어 핀란드를 방문하는 기간 현지 문화, 주민과 자연환경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관광객의 서명을 받고 있다. 스위스, 프랑스 관광청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홍보하면서, 여행자 패턴을 세분화해 천편일률적 여행 대신 자신만의 여행법을 따를 것을 권한다. 한국은 어떨까? 지난 10월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 문체부 소관 법률 제・개정안에 따르면 과잉 관광을 제한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삶과 관광이 상생하는 ‘지속 가능한 관광’을 실현하고자 관광진흥법을 개정했다. 관광객이 무조건 환영받는 시대는 지났다. 누군가가 핫한 여행지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라고. _ 에디터 전희란




저탄고지, 어디까지 맞나
간단한 설명, 복잡한 설명이 있다.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소화 과정에서 인슐린이 더 많이 분비된다. 인슐린은 체중을 증가시킨다. 그러니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면 살이 빠진다. 저탄수화물 다이어트 이론이다. 황제 다이어트, 애킨스 다이어트, 팔레오 다이어트가 이에 해당한다. 탄수화물은 줄이고 지방은 적당히 먹는 대신 육류, 생선 같은 고단백질 식품을 많이 먹는다. 복잡한 설명에는 케톤이란 전문 용어가 등장한다. 저탄수화물이라는 공통분모는 비슷하지만, 단백질은 근육 손실을 막는 정도로 하루 섭취 열량의 20~30%를 먹고 지방 섭취를 70~80% 수준으로 늘린다는 면에서 기존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와는 차이가 있다. 탄수화물 섭취를 최소화해 하루 섭취량의 5% 이하로 줄이면 에너지원으로 소비할 당이 모자라 지방을 태운다. 이렇게 되면 지방을 대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케톤이라는 물질이 인체의 주 연료로 사용되면서 체중이 더 쉽게 빠진다. 케토제닉 또는 저탄고지 다이어트 이론이다. 여기까지는 이론이고, 중요한 건 실제다.
저탄고지 다이어트는 정말 효과가 있을까? 2016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케빈 홀 박사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영화 <올드보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17명의 과체중 또는 비만인 참가자를 병원에 머물게 하고 4주는 고탄수화물 식단, 다음 4주는 열량은 2400kcal 정도로 동일하게 하되 하루 탄수화물 섭취를 31g으로 제한하고 지방을 212g 섭취하는 엄격한 저탄고지 식단을 따랐다. 단백질 섭취는 두 경우 모두 동일했다. 저탄고지 식단을 따르자 인슐린 수치는 떨어졌고 계속 낮은 수준을 유지했지만, 에너지 소비는 그렇지 않았다. 첫 주에는 대사량이 하루 100kcal 증가했지만, 이후에는 줄어들어 나중엔 고탄수화물 식단과 차이가 거의 없는 정도였다. 저탄고지 식단만 따르면 하루 300~600kcal의 열량을 더 소모한다는 주장과 거리가 있는 연구 결과였다. 게다가 저탄고지 다이어트 기간 중 지방 감소는 더 느려지고 근육 손실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실험 결과 하나로 저탄고지에 효과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 먼저 고탄수화물 식단으로 식사했을 때 살이 빠졌으니 나중에 저탄고지 다이어트를 해도 효과가 없었던 게 아니냐 반문할 수 있다(그렇다. 고탄수화물로 하루 2400kcal만 먹어도 체중이 줄었다). 하지만 저탄고지 다이어트에 다른 식단을 압도할 정도의 신비한 대사 촉진이나 체중 감량 효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한 실험 결과다.
그럼에도 주변에 저탄고지 다이어트로 살을 뺀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크리스토퍼 가드너 박사팀이 2018년 2월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저탄수화물 다이어트는 효과가 있다. 딱 저지방 다이어트만큼. 609명의 비만 또는 과체중 참가자를 대상으로 무작위로 저탄수화물 또는 저지방 다이어트에 배정하고 1년 동안 해당 식단을 따르게 한 결과 양쪽 그룹의 체중 감소에 통계적으로 유의할 만한 차이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평균 5~6kg이 빠졌다. 유전자형이나 인슐린 분비량도 다이어트 성공률과 별 관계 없었다. 그렇다. 다이어트에 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다이어트든 지속할 수만 있다면 성공적이라니, 연초부터 얼마나 희망적인가.

 

정재훈
약사이자 푸드 라이터. 마트와 편의점, 노포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숨어 있는 요리와 먹기의 과학에 대한 글을 쓴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적폐적 작가와 적폐적 작품은 같은 것일까
문학, 예술 영역에서 벌여온 오랜 논쟁 중 하나가 작가와 작품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무슨 얘기냐고? 간단히 말해, 작품과 작가를 어느 정도 동일시할 것이냐 하는 문제 말이다. 이 얘기는 별생각 없이 들으면 싱거운 질문 같다. 당연히 작품은 작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쓴 시인이나 그로테스크한 시각적 세계로 일관한 작가는 그의 정신세계 또한 그럴 거라고. 한 시대가 합의한 윤리적 기준이나 정치적 관점을 훌쩍 벗어난 작품을 쓴 작가의 정신세계도 이상하게 보기는 매한가지다. 예컨대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강박적 반복 문장으로 일관한 타이포그래피적 시를 쓰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를 주고받는 연인의 관계가 묘사된 문장을 연애소설이랍시고 쓰는 1930년대 이상 같은 작가를 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쓴 작품으로 인해 그의 인간성은 ‘또라이’나 ‘변태’로 규정된다. 설령 그를 이해한다는 비평가들이 ‘천재’라 부른다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어쨌든 그를 ‘정상인’으로 보지는 않으니까. 현대 철학자의 화가라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또 어떤가. 베이컨은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괴상한 얼굴, 돼지나 소의 어떤 부위를 푸줏간에 걸어놓은 고깃덩이 같은 육체의 표현을 통해 ‘인간’ 탐구에 집중했다.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의견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운 까닭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작품이 지닌 ‘가상성’, ‘허구성’의 문제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작가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그것은 실제 현실 자체는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이상적인 것’을 상상해보기 위해 작품 행위를 하는지도 모른다. 예술적 가상성의 정도가 매우 높은 소설의 경우는 물론, 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허구적 가공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에 비해 일인칭 화법으로 진술되는 시는 시인과의 밀착성이 상대적으로 큰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흔히 독자들은 작가가 화자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예컨대 연애시의 일인칭 화자는 곧 현재 열애에 빠진 시인 자신은 아닌가, 감수성 예민한 여성 화자가 등장한다면 시인도 여성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다 심층적 반론을 이유로 댈 수도 있다. 작품을 쓰는 그 ‘순간’ 작가와 평상시의 작가가 같은 존재인가 하는 문제다. 이를 한 인간으로서 작가의 분열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작품의 심층무의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작품은 평소 평범한 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른 ‘작가적 시간’ 속 산물이다. 작가는 자기가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작품은 작가보다 더 큰 시간과 미지의 세계를 포괄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비평을 하면서 ‘작품이 작가보다 더 크다’는 말을 하곤 한다. 문학작품, 예술 작품에서 ‘해석’이라는 고유한 영역이 발생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얘기를 조금 다른 차원, 다른 각도에서 해볼 수도 있다고 본다. 어떤 작가가 그가 처한 역사적 현실에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어떤 과오를 범했다고 치자. 대체로 이런 사태에 직면할 때 그의 ‘(부분적) 행위’에 의해 그의 존재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부정당하기 십상이다. 그의 행위는 그의 모든 존재, 그의 정체성 전체를 규정하고 비난받는다. 그는 ‘모든 순간’에서 나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전체 부정 상황이 인간 현실의 대체적 상황이라는 걸 어쩔 수 없이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한 작가와 작품의 상관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이것 또한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역사와 정치가 그의 예술적 가상이 이루어놓은 찬란한 고성 자체를 완전 부정하는 사태 말이다. 최근 2~3년간 이 사회에서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문학에서는 ‘친일 작가’들이 주로 거론되었고, 미투 등 페미니즘 차원에서 비난받은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친일적 정치 행위’와 ‘작품의 친일성’은 동류의 사실이 아니다. 작가가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는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그와 무관하게 창작된 작품을 비난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작가 자신조차도 이미 넘어서 존재하는 그의 작품, 어쩌면 한 시대 공동체 전체를 뛰어넘어 그 역사가 도달하려 했을지도 모를 이상적 빛, 행복의 가상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지혜로운 일이며,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함돈균
문학 평론가.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운영했다. 지금은 세상에 없던 교육을 펼쳐내는 사회적 학교 ‘미지행’을 운영 중이다.




경계 없는 건축, 투명한 통창에 대한 로망
주택을 설계할 때 넓은 거실의 커다란 통창, 그리고 아파트 거실 한 벽면을 큰 창으로 만들어 밖의 풍경과 빛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은 모든 이의 로망이다. 그렇다면 이런 통창이 왜 사람들의 로망이 된 것일까? 오래전부터 창과 외부 풍경의 관계 설정을 동아시아에서는 ‘차경(借景)’이라고 말해왔다. ‘차(借)’는 ‘빌리다’는 뜻으로 이곳에 있지 않은 것을 저곳에서 가져오는 것, ‘경(景)’은 ‘바라보는 대상’을 의미한다. 즉 ‘차경’은 이곳에 있지 않는 어떤 대상을 이곳으로 가져와 취득하는 것으로, 멀리 있는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을 이상향으로 여기는 동양사상은 생명을 가장 신비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동양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묘(妙)’다. 그림이나 좋은 디자인을 보면 빛깔이나 형태에서 묘한 심미적 감정이 일어난다. 기교를 넘어 생명은 없지만 생명력이 느껴지고 움직임이 없지만 무한한 변화의 에너지를 느낄 때 ‘묘’하다는 표현을 쓴다.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의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내부 공간에 무한히 변화하는 ‘묘’한 자연의 풍경을 가져오는 것은 동아시아 건축의 핵심 중 하나다.
그럼 서양 건축에서 통창은 어떤 의미일까? 19세기 서양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철학과 과학 연구가 주축을 이뤘다. 대표적 예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건축과 예술에서도 안과 밖이라는 이분적 공간 관점에서 벗어나 ‘공간의 상호 관통과 침투’라는 공간 개념이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네덜란드의 데 스틸(De Stijl, 신조형주의)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표된다. 또 철골과 유리라는 근대 재료와 공법은 건축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벽돌이나 돌로 지은 기존 건축은 큰 창을 만들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근대 이전 성당의 창이 세로로 긴 이유는 구조적으로 가로로 긴 창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정의한 건축의 5원소 중 하나인 ‘가로로 긴 창’은 당시 건축의 방향을 축약해 말해준다. 공간의 상호 관통과 침투라는 공간 개념은 경계 없는 공간의 확장과 같은 개념의 투명성으로 발전한다. 투명성은 단지 건축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조각, 회화, 타이포그래피 등 근대 디자인 전반에 걸쳐 새로운 조형 언어로 발전했다. 이후 1960년대 투명성은 히피 문화와 접목되면서 유동적이고 유목적 형식의 표현으로 이용되었다. 2000년대 일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Sejima Kazuyo)는 가벼움이나 위계 없는 공간으로 투명성을 재해석해 세계적 건축가로 주목받았다.
경계 없는 건축의 로망은 동양에서는 자연과 관계 설정의 방식으로, 서양에서는 근대 새로운 공간 개념의 실현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근대까지 서양에서 ‘집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도시는 들어가서 사는 곳이 아니라 함께 모여 사는 곳이다. 투명성과 경계 없는 건축은 앞으로 도시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대균
착착건축사무소 소장. 인문학을 바탕으로 보편적 세심함을 추구하는 것을 건축적 방향으로 삼고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는 집을 그린다. 대표작으로 고령성당, 천주교서울대교구 역사관, 이상의 집 레노베이션 등이 있다.

 

에디터 <노블레스 맨> 피처팀 일러스트 최익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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