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어울리는 풍경들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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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6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들

작년 한 해, 강한 인상을 남긴 영화 <윤희에게>와 백건우의 음반 <쇼팽: 녹턴 전곡집> 감상기.

그리움의 변주곡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낸 나는 영국 스코틀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때의 나는 낯을 가린 데다 외국살이가 처음이라 학원과 기숙사만 오갔다. 그렇게 5일쯤 지났을까. 학원에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보다 손바닥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낯선 여자였다. 이름은 A(가명), 고향은 스페인.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잠깐 영국에 왔고 같은 어학원 학생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외향적인 A와 나는 금세 친해졌고, 그녀 덕분에 타지 생활도 빠르게 적응했다. 우리는 저녁까지 시끄럽게 떠들며 매일매일 즐겁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불러 세웠다. 한참을 뜸 들인 뒤 나온 말은 “나 여자 좋아해.” 별로 놀라지 않은 나는 “그래서?”라고 답했고, 그녀는 나의 태도에 되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A가 커밍아웃한 상대는 내가 처음이며, 가족도 모를 정도로 마음 깊이 지켜온 비밀이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왜 내게 말할 결심을 했느냐고 묻자 A는 “그냥” 하며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어떠한 변화도 없이 3개월이 지났고, 자주 연락할 것을 약속하며 각자 나라로 돌아갔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녀와 자연스럽게 교류가 뜸해졌다.
영화 <윤희에게>는 옛 친구가 윤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한다. 편지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윤희의 딸 새봄. 발신자가 엄마의 첫사랑임을 알게 된 새봄은 편지에 적힌 주소, 일본 오타루로 여행을 제안하고 둘은 그곳으로 떠난다. 영화는 오타루에 머물수록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윤희의 모습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풀어낸다. 윤희는 몰래 피워온 담배를 새봄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고 눈 뭉치를 던지며 장난도 친다.
하지만 첫사랑을 만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상대의 집 앞까지 찾아가 뒷모습을 보지만, 인사도 못 하고 돌아와 새봄에게 “여기에 엄마 친구가 살아”라고 말한다. 윤희가 첫사랑을 마주하는 데 주저한 이유는 원하는 사랑을 쟁취할 때 따라오는 시선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같은 사랑일지라도 그 모습과 따르는 책임은 다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사랑 이야기는 타인에게 쉽게 공감을 얻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윤희의 사랑은 후자에 가깝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평생 숨겨야 하고, 그 마음을 들킬까 억눌러야 하는 사랑. 오타루에서의 마지막 날, 새봄의 귀여운 작전으로 윤희는 첫사랑과 만난다. 20년 만의 재회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눈길을 걷는다. 그 후 윤희는 밝은 얼굴로 한국에 돌아간다.
<윤희에게>의 막이 내리자 불현듯 A가 생각났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내게 자신의 가장 큰 비밀을 털어놓고 진실한 마음을 보여준 그녀. 친구든 사랑하는 이든, 누구에게나 가슴 저리는 상대가 있을 것이다. 두 여성의 관계를 담담하게 담아낸 이 영화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 편을 가르는 게 아닌 ‘그리움’과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말한다.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랑은 여러 형태가 있음을, 그 사랑을 통해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길 바랄 뿐이다. A와 헤어진 지 10년이 흘렀지만, 가끔 그녀 꿈을 꾼다. 그녀도 내 생각을 할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던 상대를 말이다. (이효정)




느린 음악, 빠르게 뛰는 추억의 심장
피아니스트 백건우에게 쇼팽의 음악은 특별하다. 2003년, 그는 쇼팽의 고국인 폴란드 지휘자 안토니 비트, 바르샤바 교향악단과 함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2번 음반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그는 당대 최고의 쇼팽 해석자가 됐지만, 이후 브람스나 슈베르트의 앨범을 발매하며 쇼팽과는 점점 멀어졌다. 2017년 가을, 서울 무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선보인 백건우의 시선은 다시 쇼팽을 향했다. 이듬해 8월, 그는 이탈리아 볼차노에서 쇼팽의 음악으로 구성한 리사이틀을 가졌고, 2019년 3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녹턴 21곡 전곡을 담은 두 장짜리 음반을 선보였다.
녹턴은 쇼팽 음악의 시작점이자 정수다. 쇼팽을 알지 못하는 이가 그의 음악에 반할 때에도 대개 녹턴이다. ‘야상곡(夜想曲)’이라고도 불리는 녹턴에 대해 백건우는 “쇼팽 자신의 내면을 자백하는 소품이자 그의 내밀한 감성과 본질이 담긴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쇼팽은 후배에게 “음악은 노래와 같아야 한다”, “피아노로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녹턴에는 그의 이런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노래에는 인간만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 심리가 담긴다. 부르는 사람의 체격, 연령, 숨 쉬는 법, 기질, 성격이 반영되는 음악 역시 노래다. 그래서 같은 노래라 할지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이러한 노래로부터 유래한 ‘녹턴’은 피아니스트에 따라 음악적 표정이 바뀌는 대표적 음악이다. 백건우가 쇼팽과 함께하는 행보에 녹턴을 선택한 이유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쇼팽은 ‘루바토’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루바토란 연주자나 지휘자의 재량과 기분에 따라 의도적으로 템포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연주하는 주법이다. 예를 들어 왼손이 정확한 템포로 연주하면 오른손은 루바토를 적용해 자유롭게 연주하는 식이다. 왼손이 악보와 이성에 입각한다면, 오른손은 감성과 가슴에 의한 것이다. 루바토는 느린 음악일수록 더더욱 제 기능을 발휘한다. 녹턴은 전체적으로 느린 음악이다. 많은 이의 생각과 달리 빠른 음악보다 천천히 흐르는 음악이 연주하기 더 어렵다. 빠른 속도로 건반을 훑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는 소리의 표정이 느린 음악에서는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바토는 속도의 미학으로 그 소리에 옷을 입힌다.
백건우가 녹턴의 음표에 입힌 루바토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백건우적’이다. 여유롭다. 때론 음표 길이가 몇 할로 늘어나기도 한다. 그러한 속도의 흐름을 만드는 것은 대가의 특권이자 피아노에 평생을 바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한 곡을 연주하더라도 작곡가의 작품과 인생을 샅샅이 파악해야 한다는 원칙은 백건우가 젊은 시절부터 지켜온 예술관이자 해석관이다. 그래서 악보는 물론 작곡가의 편지와 일기 등을 살피며 작품을 창작한 계기와 의도, 배경과 환경을 살핀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건반 앞 인류학자’ 같고, 연주는 ‘음악이란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학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 듯하다. 예전에는 백건우의 공연 연주나 음반을 들을 때, 그의 이러한 자세와 지론이 좋았다. 감성적 학자가 쓴 문학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이론의 문장을 훑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 노장 피아니스트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 영화배우이자 아내인 윤정희가 기억을 잃는 병에 걸린 것이다. 노장의 주름진 손은 건반에서 소리의 물방울을 튕겨내는데, 어느 순간 눈물방울이 되어 듣는 이의 눈가를 맴돈다. 수록곡 중 녹턴 2번(1CD 4트랙)을 들을 때 더욱 그렇다. 모든 기억을 잃어도 사랑하는 이의 피아노 소리는 기억이 모두 빠져나간 곳에 흔적처럼 남을 것이다. (송현민)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송현민Ⅰ무대의 막이 내리고 밤이 깊어지면 노트북을 여는 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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