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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0 FEATURE

낭만적인 과학

  • 2019-12-23

별과 책을 사랑한 남자가 꿈꾸는 미래.

동그란 미소를 짓는 천문학자 이명현.

뼛속까지 ‘문과’형 인간인 탓에 과학과는 높은 담을 쌓고 산 지 오래다. 중학생 시절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가속도의 법칙을 씹어 넘기느라 밤새 고생했고, 고등학생 때는 수학을 공부하기 싫다는 이유로 재능도 없는 예체능계를 기웃대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난 뒤로 과학을 마주한 건 오로지 영화를 통해서였다.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마션>, <콘택트>, <히든 피겨스> 등 인상 깊게 본 작품을 모아놓고 보니 죄다 우주와 관련된 영화다.
우주를 관측하고 연구하며 평생을 보내는 천문학자들에겐 조금 부끄럽지만 나에게 우주란 ‘못난 나 자신이 한낱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상상을 할 때의 우주, 딱 그만큼의 지식으로 존재한다.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캅테인 천문학연구소 연구원,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원, 연세대학교 천문대 책임연구원을 거칠 운명을 지닌 여섯 살 꼬마 이명현에게도 우주는 그 정도의 크기였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여섯 살 때예요. 당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는데, 그게 우주 비행인지 천문학인지도 모르고 그냥 저런 거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기억이 나요.(웃음) 1972년 국내 최초로 한국아마추어천문회가 결성됐는데, 당시 창립 멤버 중에서 저와 동갑내기 친구가 유일한 초등학생이었죠.” 학생관 과학 잡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귀는 최연소 아마추어 천문가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다리던 주말이 되면 어른들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하늘을 관측하고 텐트에서 밤을 지새웠다.
당시 어린 이명현을 매혹시킨 것은 우주만이 아니었다. 드넓은 우주를 바라보며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였다. “당시에는 그 실존주의적 질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어요. 온갖 문학책, 철학책을 다 뒤졌죠. 시도 쓰고, 희곡도 쓰고, 동인회를 결성해 동인지도 내고, 문예부와 교지 편집자로도 열심히 활동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연극을 보고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죠.”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이명현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인간은 세상에 왔다가 공기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라는 것을. 언젠가는 다 죽을 존재라 생각하자 인간에게 연민이 생기고 관대한 성격이 되었다. 사회와 잘 어우러져 무엇인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때다.
천문학은 의학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지만 전 세계 76억 인구 중 국제천문연맹에 등록된 공식 천문학자는 1만3000여 명에 불과하다. 국내만 따지면 200명이 채 되지 않는 숫자. 그중에서도 이명현은 전파천문학자에 속한다. 수학자와 물리학자도 천문을 연구하긴 하지만 천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면 천문학자로 분류된다. 방정식을 활용하거나 이론을 토대로 모델을 만들면 이론천문학자, 도구를 사용해 관측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면 관측천문학자로 불리는데, 그 안에서도 어떤 망원경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파천문학자, 적외선천문학자 등으로 세분화된다. “어떤 한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다양한 일을 함께 겪어야 하는 것처럼 별도 그래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뿐 아니라 자외선, 적외선 등 다양한 파장으로 관찰해야 진정한 별의 모습을 알 수 있거든요.”




삼청동에 위치한 갈다의 외관.

<이명현의 별 헤는 밤>, <스페이스>, <빅 히스토리 1> 등 다수의 저서를 내면서 학계와 출판계 등 제한된 반경에서만 활동하던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8년 과학 책방 ‘갈다’를 오픈하면서다. 장재익, 정재승 등 친분 있는 과학자 120여 명이 주주로 참여해 회사를 세우고, 어릴 적 살던 삼청동 주택을 개조한 뒤 갈릴레이(Galilei)와 다윈(Darwin)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을 붙였다. 그는 책방을 열면서 정기적으로 하던 교육방송과 대학 출강을 그만뒀다. 책 큐레이션을 직접 맡으면서 몇 가지 원칙도 세웠다. 외국의 베스트셀러보단 국내 저자의 책을 우선으로 삼을 것, 외국 서적은 꼭 가독성이 좋은 책 위주로 엄선할 것, 페미니즘과 여성 과학자 섹션을 따로 만들 것.
“과학계에 여성의 진출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소수예요. 동시에 큰 업적을 남긴 여성 과학자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도 한창이고요.” 갈다에는 과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책이 가득하다. 과학책 입문자를 위한 추천 도서부터 전문가로 구성된 신간선정위원회가 주목한 신간, 아이들을 위한 과학 그림책부터 과학 교구, 멋진 포스터 등 굿즈를 모아놓은 센스도 범상치 않다. 고즈넉한 삼청동 골목길 안쪽에 위치해 조용할 것 같지만 과학 관련 강연과 북 토크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제법 시끌벅적하다. 혼자 완독하기 힘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등을 몇 주에 걸쳐 함께 읽거나 여성을 키워드로 과학책을 읽는 워크숍을 통해 독자와 저자가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넓힌다. 그에게 천문학자에서 책방 주인으로,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조금씩 기울고 있는 지금의 삶은 어떨까? “굉장히 번잡스러워졌어요. 이전에는 꼭 만나야 될 사람만 만났는데 지금은 온갖 사람을 다 만나요. 보통 ‘여기 주인 나와’라고 하잖아요.(웃음)”
외계 지성체를 탐색하는 세티(SETI) 연구소 한국 책임자이기도 한 그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칼 세이건 전문가다. 칼 세이건과 관련된 자문과 강연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부인인 앤드루 안이 방한했을 때 사회 겸 통역을 맡은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칼 세이건 아들과 함께 한류 가수의 포스터를 찾아다니는 사이로 발전했다. “2020년 3월 9일에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시즌 3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방영해요. 6년 만에 내는 신작인데, 책도 전 세계에서 동시에 발간할 예정이고요. 얼마 전 미국에 가서 앤드루 안을 만나 인터뷰도 했어요. 연말에는 칼 세이건 전집도 낼 계획이에요. 12월 20일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명현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눈을 통해 바라보는 별의 모습은 별이 뿜어내는 수많은 파장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과 우리는 비록 매우 작고 미미한 존재지만 ‘생각하는 별 먼지’로서 충분히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요즘 교육계에서 원하는 융합형 인재란 바로 이명현 같은 사람이라는 것.

 

에디터 김민지(mj@noblesse.com)
사진 김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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