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바라보고 수집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기준과 태도 - 노블레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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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6

작품을 바라보고 수집하기 위한 다섯 가지 기준과 태도

토마스 루셰는 독일의 작은 도시 욀데에서 패션 브랜드 ‘쇠르 루셰’를 4대에 걸쳐 이어오고 있다. 사업과 함께 시작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쇠르 루셰 컬렉션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와 동시대 미술을 중심으로 3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한다. 그는 수집할 때 필요한 자세는 예술 작품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과 작품에 관한 지식이라 말한다. 작품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학제적 접근을 주장하기에 그 나름의 다섯 가지 기준도 존재한다. 토마스 루셰가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패션 브랜드 쇠르 루셰의 새로운 컬렉션을 준비하는 공간에 선 토마스 루셰. 패션 사업가와 예술 작품 컬렉터라는 그의 두 가지 모습이 잘 드러나는 장소다.




1 개인 사무실 곳곳에 독일 작가 유르겐 볼프(Jurgen Wolf)의 작은 작품이 놓여 있다. 캐비닛 사이즈의 장점이 돋보이는 순간.
2 캐비닛 사이즈의 작업을 선호하는 쇠르 루셰 컬렉션과 컬렉터의 방향에 부합하는 유르겐 볼프의 작은 회화 작품들.

베를린에서 기차로 약 4시간 거리. 서독의 정취가 묻어나는 욀데(Oelde)는 ‘이곳에 과연 컬렉션이 존재할까?’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 장소인 쇠르 루셰(SØR Rusche) 본사 입구에서 맞닥뜨린 예술 작품 무리는 그런 생각을 단번에 달아나게 했다. 패션 사업을 이끄는 인물답게 클래식하면서도 깔끔한 복장의 토마스 루셰(Thomas Rusche)가 정중한 태도로 반갑게 맞이했다. 새로운 컬렉션 준비로 바쁜 그의 업무 공간은 작은 회화 작업이 바닥, 창틀, 선반 위 곳곳에 놓여 일상과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부러움과 놀라움을 숨길 수 없던 사무실에 앉아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컬렉션 공간이 있다며 소개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적으로 욀데가 굉장히 낯설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독일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데다 베를린에서 한참 멀어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욀데는 어떤 곳인가요? 욀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주에 있는 뮌슈테를란트(Munsterland) 지역에 속한 작은 도시입니다. 이곳은 제 가족의 역사와 가족 기업인 쇠르 루셰 그리고 쇠르 루셰 컬렉션(SØR Rusche Collection)이 모두 존재하는 지역이기도 하죠.

쇠르 루셰 컬렉션은 욀데와 베를린 두 곳에 있습니다. 욀데에 가족의 역사가 있다 하셨는데, 조심스레 추측하자면 욀데에서 컬렉션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욀데에 쇠르 루셰 컬렉션의 역사가 있죠. 저희 컬렉션은 17세기 작품과 동시대 미술이 주를 이룹니다. 17세기 욀데는 독일 영토였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네덜란드 아래 있었습니다. 렘브란트, 루벤스 그리고 반 다이크 등 대가들이 활동했던 네덜란드 황금기의 영향력이 강해 이 지역의 모든 화가와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네덜란드 회화에 속했을 정도죠. 그 당시의 미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는 다르게 종교나 귀족을 위한 대규모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은 대신 일반 시민의 삶을 캔버스에 담았어요. 일상의 회화가 자리하기 시작한 거죠. 크기도 캐비닛에 보관할 만큼 작아졌어요. 이러한 배경으로 쇠르 루셰 컬렉션이 소장한 옛 회화는 대부분 ‘캐비닛 사이즈’입니다. 동시대 미술도 작은 크기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정육점에서 고기가 클수록 비싸지는 것과 달리 미술 작품의 퀄리티를 논할 때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쇠르 루셰 컬렉션은 화이트 큐브 같은 대형 전시 공간이 필요 없어요. 그 대신 일상 속에서 작품과 함께하고 있죠.




3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회화 작가 제바스티엔 메셴모저(Sebastian Meschenmoser)의 회화와 베를린 출신 작가 안드레아스 그랄(Andreas Grahl)의 조각이 쇠르 루셰 사무실에 녹아 들었다.
4 테오라 크루멜 (Theora Krummel)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
5 쇠르 루셰 본사 입구에서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독일 조각가 마르틴 볼케 (Martin Wolke)의 작품.

4대에 걸쳐 컬렉션을 이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역사적 배경과 흐름 속에서 구성됐나요? 컬렉션 역사는 제 증조부부터 시작됩니다. 1855년, 소작농의 아들이던 증조부는 농부가 아닌 마부가 되어 고향에서부터 욀데 철도역까지 우편을 나르셨습니다. 이후 마차로 직물을 거래하는 무역 일을 하셨는데, 각 지역의 부유한 백작들이 돈 대신 오래된 가구나 회화 작품으로 물건값을 지불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희 가문의 패션 산업과 컬렉션이 시작됐습니다. 덕분에 컬렉션에는 옛 가구도 꽤 있죠.

전통 있는 컬렉션이네요!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음에도 정작 본인이 관심 없으면 컬렉션을 이어가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되는데, 개인적으로 컬렉션을 잇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포르쉐 911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웃음)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차를 타고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아버지와 함께한다는 그 자체도 행복했지만, 독일 곳곳에서 열린 패션 행사와 아트 페어를 관람하는 걸 즐겼죠. 아버지가 세상 보는 눈을 열어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작품 감상과 구매를 일찍 경험했을 것 같아요. 열두 살에 19세기 작가 안드레아스 아헨바흐(Andreas Achenbach)의 수채화 작업을 구매한 게 처음일 거예요.

처음 구매한 작업도 수채화고, 쇠르 루셰 컬렉션도 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 17세기 네덜란드 회화가 돋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이 시대 작품을 선호하나요? 욀데에 네덜란드 회화 풍토가 짙었을 때 컬렉팅을 시작한 이유가 큽니다. 물론 저도 옛 회화를 참 좋아하고요. 종교와 귀족에 한정되었던 회화가 울타리를 벗어난 시점인지라 혁신성이 돋보이죠. 특히 네덜란드 회화는 종교적 모티브를 금지한 칼뱅주의를 따랐기에 종교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작품 주문이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작가들은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정물과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죠. 요즘에야 정물화나 풍경화로 나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카테고리 구분이 없었어요. 기존에 없던 장르를 그렸으니, 네덜란드 회화는 더더욱 혁신적이죠.

쇠르 루셰 컬렉션의 특징은 17세기 회화와 동시대 미술, 크게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죠. 18~19세기 작품도 있긴 해요. 하지만 저는 전 세기의 작업을 수집하기란 불가능하고, 모든 사조와 형식, 미술 작품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17세기 회화와 동시대 미술에 집중하고 있죠.

한데, 둘 사이의 시간 차이가 꽤 큰 편인데 어떻게 동시대 미술까지 관심이 뻗어나갔나요? 우선 20세기는 전쟁을 겪었기에 컨디션 좋은 17세기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주변 환경이 동시대 미술로 변하는 만큼 자연스레 컬렉션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죠. 제가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 사업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겠네요.

욀데에는 전통에 걸맞게 옛 회화가, 현대미술의 도시인 베를린에서는 오늘날 작품이 컬렉션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베를린을 또 다른 컬렉션 공간으로 선택한 이유도 컬렉션의 현대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인가요? 특별히 컬렉션을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베를린을 택한 건 우선 제 아이들이 그곳에서 태어나 지내고 있어 자주 방문했고, 작은 시골 도시에 사는 만큼 대도시에도 컬렉션의 터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동시대 미술의 중심지인 베를린은 지금 아트 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관련 인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죠. 다양한 이유가 맞물려서 베를린에도 공간을 마련했고, 현재는 작가와 갤러리스트를 연결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6 독일 드레스덴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미술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슈테펜 폴머(Steffen Vollmer)의 작품.
7 테이블 위에 놓인 쇠르 루셰 체크무늬 와이셔츠와 디자인의 영감이 된 엘렌 하르트만 (Ellen Hartmann)의 회화 작업. 쇠르 루셰 컬렉션에서는 패션과 회화가 서로 영향을 주어 시너지를 일으키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8 사무실 한쪽에 놓여 있는 독일 아헨 출신 작가 발터 쿠츠 (Walter Kutz)의 조각. 물성을 드러내며 공간 분위기를 단번에 압도한다.




9 패션 컬렉션을 기획하는 작업실에 황마 위에 오일 물감을 올린 미탸 피코(Mitja Ficko)의 회화 ‘신을 잃어버린 자(Gott Verlierer)’가 걸려 있다. 패션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작품 재료에서부터 현실 공간까지 뻗어나와 인상적이다.
10 네덜란드 하를럼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브라운슈바이크,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등 독일 유수의 미술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우타 쇼텐(Uta Schotten)의 작품이 욀데에 위치한 쇠르 루셰 개인 컬렉션 공간에 걸려 있다.

그러잖아도 인터뷰를 진행하는 이 공간, 쇠르 루셰 패션 본사 곳곳에 컬렉션 작품이 있는 게 인상적이에요. 예술 작품에 둘러싸여 일상을 보내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작품을 더 가까이, 자주 볼 수 있다는 거요?(웃음) 작품과 같이 사는 건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디지털 문명에서 1000여 장이 넘는 이미지와 무빙 이미지를 경험하며 단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여겨요. 한데, 일상생활에 작품을 두면 무언가를 꾸준히 바라보는 훈련을 자연스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 작품에 둘러싸여 이를 감상하는 행위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시선과 풍경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까요? 또 어떤 대상을 깊이 관찰하면 그 의미를 찾거나 해석하기 위해 뇌도 운동을 합니다. 여기서 컬렉터로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컬렉터는 자신이 수집하는 작업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춰야 해요. 작품이 주는 감정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컬렉터처럼 ‘내가 좋아하는 걸 모은다’를 컬렉팅의 기준으로 말하지 않아요. 저는 제가 수집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입니다.

지식은 컬렉터가 갖춰야 하는 중요한 요소인가요? 그렇죠. 작품에 대한 감정과 느낌만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반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죠. 우리는 인간이기에 원하는 것에 대한 열망과 욕구를 거리를 두고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그 후에도 우리 뇌가 진정으로 작품을 원한다면 그때 작품을 구매해도 늦지 않습니다.




11 욀데에 있는 개인 컬렉션. 클래식 가구와 회화가 한데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는 4대에 걸친 컬렉션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12 또 다른 개인 컬렉션 공간. 현대식 건축물에 고전적 인테리어, 작은 회화 작품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금세 익숙해진다.

당신이 작품을 수집할 때 중요하게 보는 요소가 또 있을까요? 앞서 말한 혁신성을 비롯해 장인정신, 아름다움, 예술적 성향 그리고 담론적 가치까지 총 다섯 가지 기준이 있어요. 비단 예술과 작품을 바라보는 기준이 아니에요. 지금 이끌고 있는 패션 사업에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기준으로 최근 눈여겨보는 작가가 있나요? 독일 작가 엘리캬 크바데(Alicja Kwade)와 이탈리아 출신의 니콜라 사모리(Nicola Samori) 그리고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독일 작가 루프레히트 폰 카우프만(Ruprecht von Kaufmann)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4대에 걸친 쇠르 루셰 컬렉션의 긴 역사에 짧게 감탄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한국에서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사를 반영한 컬렉션을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독일에서는 이런 문화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해 부럽습니다. 전형적인 ‘유럽스러움’ 같아요. 유럽에는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진 가족 산업으로 재정적 토대를 다진 뒤, 작품을 수집하고 컬렉션을 구축하며 가문의 문화로 자리 잡은 곳이 많죠. 사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 있고, 전쟁 과정과 결과에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아닌 다른 유럽 국가에 더 오랫동안 전통을 유지한 컬렉션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지난 20세기의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쇠르 루셰 컬렉션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욀데가 외곽에 있는 도시라는 점이 아닐까요?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지리적 요인이 큰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쇠르 루셰 컬렉션은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디지털 아트에 관심이 많아요. 디지털 아트의 의미를 비롯해 아트와 디지털 세상이 펼칠 내일의 모습을 탐구할 수 있는 작업을 다섯 가지 기준을 구심점 삼아 살펴볼 예정입니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이정훈(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최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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