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서 하는 음악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FEATURE
  • 2019-11-29

좋아해서 하는 음악

완성도 높은 예술은 머리에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띄운다. 작곡가 양지선은 그런 음악을 만든다.

음악, 미술, 무용 같은 시청각예술에서 느낀 감동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아름다운, 눈을 떼지 못하는 등 화려한 수식어가 있지만 현장에서 받은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지난 11월 5일, 일신홀에서 열린 음악회 <아르케-바로크로부터>가 막을 내린 뒤 박수를 보내며 다시금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좋은 현대음악을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멋들어진 문구를 만들어보려 현대음악 서적을 독파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아르케-바로크로부터>를 기획한 양지선 작곡가를 만나자마자 “현대음악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요?”라고 물은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현대음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음악이에요. 거창하거나 난해한 게 아니죠. 저 같은 경우 듣기만 해도 이해되는 곡을 쓰려 합니다. 겉치장을 위해 음을 꾸미는 게 아닌, 피아노 앞에서 떠오르는 솔직한 마음을 악보에 옮기는 거죠”라며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가장 알맞은 표현법이라고 답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기에 연주회를 설명하는 데 이토록 머뭇거릴까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양지선과 아르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양지선은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한 뒤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학사와 석사, 영국 요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작곡가이자 ‘아르케’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이다. 우선 음악감독 양지선에 대해 알아보자. 그녀가 기획한 아르케는 음악의 근원을 현시점에서 재해석하자는 음악 프로젝트로 처음, 시초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아르케(arche)에서 이름을 따왔다. 마음이 맞는 연주자를 모아 자신과 다른 작곡가의 곡을 올리는 게 주된 내용이다. 지금은 바로크의 불완전한 매력에 푹 빠져 바로크시대 고악기로 현대음악을 연주하지만, ‘민속 악기로부터’ 같은 다른 시리즈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둔다. 그렇게 지금까지 3회를 이어왔다. “바로크와 현대음악의 만남이 신선해 보였는지, 운 좋게도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았어요. 덕분에 처음부터 시스템을 잘 구축할 수 있었죠. 그렇지만 여전히 신경 쓸 게 많아요. 프로그램, 연주자, 공연장, 의상 컨셉은 당연하고요. 연주자 리허설 시간도 제가 협의해야 하죠. 음악감독으로서 손댈 곳이 많아요.”(웃음)




지난 11월 5일에 열린 <아르케-바로크로부터> 세 번째 음악회.

그렇다면 작곡가 양지선은 어떨까? 신곡 ‘Forest.i for Bassoon, Yanggeum and Harpsichord’를 살펴보면 작곡가 양지선을 이해할 수 있다. 소리의 여음과 쉼을 표현한 그간의 곡과 달리 숲속에서 마주하고 느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멜로디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녀 작곡 인생의 큰 전환점인 셈. 혹시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묻자 “문득 제 음악이 너무 관념적인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라고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기존에 없던 새로운 곡을 쓰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지난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의지에 사로잡힌 그녀는 꼭 필요한 재료만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매일매일 명상을 하며 불필요한 음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정말 많이 내려놓고 쓴 곡이에요”라는 표현처럼 ‘Forest.i for Bassoon, Yanggeum and Harpsichord’는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곡과는 사뭇 다른, 그리고 한결 다가가기 쉬운 분위기다. 이전 곡이 두어 번 곱씹어야 해석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두려움은 없었다. “보통 초연을 할 때 실수할까 봐 심장이 뒤틀릴 만큼 긴장하곤 했어요. 한데 이번에는 되레 편안한 마음으로 들었어요. 어떤 분들은 인상주의나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의 이 변화에 굉장히 만족합니다. 음악을 대하는 제 마음이 자유로워졌거든요.”
즐기는 사람은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듯, 양지선은 두 시간에 걸친 대화를 음악 하나로 가득 채웠다. 특히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악기 이름을 나열할 때다. 하프시코드, 바순, 아쟁 그리고 생전 처음 듣는 악기도 여럿이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악기가 무엇이냐 물으니 “없다”라는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그 질문에 답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베이스 클라리넷을 좋아한다고 말하다가도 곡을 쓰다 보면 하프에 더 큰 애정이 생기거든요. 요즘은 플루트에 눈이 가더라고요. 지인들이 저를 바람둥이라고 부를 정도죠. 그래서 이제는 좋아하는 악기가 없다고 해요. 다 좋아해서 하나를 택할 수 없으니까요.” 좋아하는 악기의 수만큼 곡에 쓰고 싶은 악기도 많다. 지난 음악회에서 하프시코드, 바순, 리코더와 국악기를 같이 올렸듯이 그녀는 클래식 악기만 고집하지 않는다. 작곡가로서 악기가 무엇이든 소리만 좋으면 괜찮다는 입장이다. “연주자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돼 좋은 소리를 내는 음악에 집중하고 싶어요. 클래식부터 언더그라운드까지, 곳곳에 훌륭한 연주 실력을 갖춘 분이 많아요. 귀족만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계급사회가 아니잖아요.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세 번째 아르케가 막 끝난 지금, 양지선 작곡가는 벌써 다음 아르케를 기획하고 있다. 어떤 곡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할지, 무슨 악기를 초대할지 등. 휴식기는 없느냐는 물음에 업무가 많아 쉴 틈이 없다고 하소연하지만, 다음 아르케를 말할 때 표정은 어떤 놀이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밝았다. 그렇다. 양지선은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현대음악을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좋아서, 재미있어서 그리고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다. “이번 생에 제가 해야 할 일은 작곡이에요. 성공이나 큰돈을 버는 것과 상관없이 나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일이 음악이라 느껴요. 지금은 주변에서 돈 되는 음악 좀 하라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아요. 제가 이 일을 재미있어하고 열정을 가진 게 보이니까요. 음악을 하는 모두가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저는 주어진 일을 부단히 해나갈 거예요.”
마지막으로 어떤 작곡가가 되고 싶은지 묻자 다시금 담백한 답이 돌아왔다. “어떤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사실 아르케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제 일을 열심히 하려 해요. 아, 곡은 많이 쓰고 싶어요. 30대 때는 100개의 작품이 목표였는데, 앞으로 200개는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 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