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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2

올바른 선 긋기

한국이 문화 선진국으로 부상한 지금, 문화적 전유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그런데 문화적 전유는 무엇인가?

1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스틸 컷.
2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케이티 페리. 한 나라의 전통 의상을 가볍게 소비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고, 그녀는 이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리즈가 진정한 행복과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모든 걸 뒤로한 채 이탈리아, 인도 그리고 발리로 떠나는 내용이다. 리즈 역을 줄리언 로버츠가 맡은 데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덕에 원제 ‘Eat Pray Love’는 하나의 관용구로 굳어질 만큼 여전히 좋은 영화로 회자되고 있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10년 에디터는 잠시 영국에 살았는데, (줄리아 로버츠 덕분인지) 길거리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포스터가 걸려 있을 만큼 영국 사람들도 기대가 큰 영화였다. 마침 플랫메이트가 이탈리아 북부 출신이라 그녀에게 영화관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한데 그녀는 “그 영화는 엉터리야”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극 초반, 리즈는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주인과 ‘목욕물’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호텔 주인이 욕실을 보여주며 “우리는 오직 스토브에서만 물을 데운다”라고 말하자, 리즈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되묻는다. 여기서 호텔 주인은 “스토브로 물을 데워 욕조에 부으면 된다. 서너번 왔다 갔다 하며 물을 채워 넣으면 충분하다”라고 말하며 대뜸 화를 낸다. 플랫 메이트는 이탈리아가 처음 등장하는 이 장면부터 틀렸다고 지적했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데 이탈리아, 그것도 수도 로마를 고대시대에 머물러 있는 나라로 표현한 것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를 언급했다. 리즈와 그녀의 스웨덴 친구가 이탈리아인의 손동작을 따라 하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과장됐으며, 실제 로마는 바쁘게 돌아가는데 이 영화는 이탈리아인을 여유롭다 못해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 대한 이해 없이 지극히 미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라는 게 그녀의 총평이었다.
이처럼 어느 한 나라나 집단의 문화를 이해 없이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임의로 차용하고 일반화하는 행위를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라고 한다. 에디터의 친구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도 문화적 전유의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문화적 전유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단어가 아니기에 그 개념이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 생각보다 흔하다. 곧 다가오는 핼러윈데이가 대표적 예로, 주로 서구권 사람의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중국의 치파오와 일본의 기모노 같은 아시아 전통 의상, 인디언 코스튬을 문화적 전유라 볼 수 있다. ‘단순한 코스튬인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할 수 있지만, 충분한 이해 없이 이벤트를 위해 자신이 속하지 않은 타인의 문화를 가볍게 소비하는 것이 문제다.
문화적 전유로 뭇매를 맞은 스타도 여럿이다. 2013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에서 일본인 분장에 기모노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Unconditionally’를 부른 케이티 페리, 일본식 갸루 메이크업을 한 채 ‘Hello Kitty’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에이브릴 라빈, 자신의 보정 속옷 브랜드 이름을 ‘기모노(Kimono)’라고 지은 킴 카다시안 등. 특히 킴 카다시안의 경우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미국에 특허 관계자를 파견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세 사람은 추후 논란에 대해 사과 입장을 밝혔다).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대다수 문화적 전유는 문화 권력과 얽혀 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은 ‘문화적 전유’를 공식 등재하며 “일반적으로 비(非)서구식 또는 비(非)백인 양식에 대한 서구식 해석으로 이뤄지며, 그 이면에는 착취와 지배의 의미가 담겨 있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시 한번 앞서 말한 예를 살펴보면, 대부분 비서구 문화에 대한 서구식 해석이라는 옥스퍼드의 설명에 부합한다. 각각의 국가를 존중한다면 그 누구라도 보정 속옷 브랜드에 전통 의상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3 디즈니는 <라이온 킹> 실사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하쿠나 마타타’로 곤혹을 겪었다. 스와힐리어 단어에 상표권을 등록한 디즈니의 행위가 문화적 전유라는 이유로 말이다.
4 폴리네시안 문화를 배경으로 제작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 개봉 당시 미국에서 핼러윈데이에 모아나 코스튬을 주의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5 에이브릴 라빈의 뮤직비디오 ‘Hello Kitty’는 ‘문화적 전유다’와 ‘아니다’라는 의견이 대립하는 대표적 예다.

문화적 전유로 도마 위에 오르면 대다수가 해당 문화권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도용한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문화적 전유에 대한 논의를 일찍 시작한 해외에서는 “고든 램지는 중국 음식을 해서는 안 되는가? 그가 창의적인 중국요리를 탄생시킬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라며 문화적 전유로 선을 긋는 건 오히려 문화의 다양성을 해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감을 얻는 것과 문화적 전유를 나누는 기준이 있을까? 사실 마땅한 기준은 없다. 단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전유되는 국가가 불쾌감을 느끼지 않아야 하며 전유가 오가는 두 문화권 사이에서 권력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아이돌 모모랜드가 뮤직비디오 ‘뱀(Baam)’으로 세계 팬들의 질타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각 멤버가 세계 각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진귀한 보물을 찾는 게 뮤직비디오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로코코 시대 복장을 하고 19세기에 지은 에펠탑을 배경으로 앉아있거나 멕시코 전통 의상 솜브레로를 입고 과장되게 나초를 먹는 등 타 문화권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문화적 전유라는 논쟁이 불거졌다. 최근 유튜브 조회 수 1억2000만을 넘긴 이 뮤직비디오의 댓글 창에서는 여전히 ‘해당 국가 국민으로서 기분이 나쁘다’와 ‘그 나라 사람이지만 재미있게 봤다’라는 두 가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오랫동안 단일민족을 유지해온 한국은 다민족 국가보다 문화적 전유에 대해 덜 민감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국제화, 글로벌이라는 말이 구식으로 느껴질 만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된 시대를 살고 있고, K-팝을 시작으로 문화 선진국 반열에 진입했다. 한국 문화는 ‘한국인’만 소비하지 않기에 문화적 전유는 여러모로 염두에 두어야 할 개념이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다’는 말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전엔 가볍게 넘기던 것에 누군가가 불편을 표하면서 지금에야 문제시되는 일이 하나둘 생기는 요즘이다. 누군가의 불편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이들을 예민하다고 치부하기 전에 왜 불편을 느끼는지 들어봐야 하는 게 먼저다. 마찬가지로, 문화적 전유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외적인 것만 차용할 게 아니라 상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인지하면 우리는 더 나은 문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 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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