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of Things - 노블레스닷컴

Latest News

    FEATURE
  • 2019-10-02

Memory of Things

올가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한국계 프랑스인 다프네 난 르 세르장의 전시가 열린다.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다프네 난 르 세르장(Daphne Nan Le Sergent)에게는 배난희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하지만 태어나고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남들과 참 달랐고,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의 국적을 참 끈질기게도 되물었다. 불완전한 기억은 함구라는 답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프랑스에서 44년간 쌓아 올린 두터운 기억의 층에는 수많은 흔적이 자리한다. 때때로 심연의 기억이 압력에 의해 뒤틀려 지표면으로 솟아오르기도 한다. 그녀는 그렇게 솟아오른 흔적을 하나씩 주워 담은 뒤 사진과 드로잉을 혼합하거나 병치한 비디오 속에 풀어냈다. 9월 6일부터 11월 10일까지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그녀의 <실버 메모리: 기원에 도달하는 방법>전이 열린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전시장에서는 쉴 새 없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랫말이 흐르고, 다프네 난 르 세르장은 우리를 어떠한 여정으로 이끈다. 은이라는 광물의 궤적을 좇으며 솟아오른 심연의 기억에 관한 여정이다.




1 ‘은 할로겐 입자’에 놓인 아날로그 사진.
2 영상 작품 ‘우리 내면의 인도를 향한 여행’의 한 장면.
3 전시가 열리는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경.

유독 ‘기원’에 대해 논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작년 파리 죄드폼 갤러리를 비롯해 보르도 현대미술관(CAPC), 멕시코 암파로 미술관에서 연 < Geopolitics of Oblivion >전 또한 활자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어릴 적 선사시대와 공룡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웃음)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래도 어릴 적 입양되어 근원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프랑스에서 한국인 입양아로 살아온 세월은 어땠나요. 유년 시절,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화가 났습니다. 나는 프랑스 사람인데 왜 내게만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자료가 별로 없었어요. 이미지로만 느낄 뿐 실질적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죠.

2009년, 34년 만에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전시를 한 연이 닿아 한국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시 ‘경계’를 주제로 작품을 구상 중이었는데, 한국에서 분단과 관련된 작품을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어떤 끈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전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죠. 화장법만 해도 많이 달랐으니까요. 그래도 최대한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작품에 사진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인간은 육체를 사용하는 영혼”이라고 한 플라톤의 말처럼, 우리는 밀랍 또는 흙으로 빚은 어떤 형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생겨난 기억이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죠. 저는 사진을 통해 이를 형상화하고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가 은광의 고갈을 예측하는 뉴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요. 은은 우리 문명에 큰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장식용 귀금속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실제 산업용 수요가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휴대폰, 컴퓨터 등 전자 기기부터 의료 기기, 태양광 산업, 첨단 산업까지 아우릅니다. 무엇보다 은에 속하는 할로겐화은이라는 성분은 아날로그 필름의 주재료입니다. 전문가들은 2029년 이후 은 자원이 고갈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뒤 문득 은의 기원을 따라가보고 싶었습니다.

작업 과정은 어땠나요. 15세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생각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는데, 그곳에 묻혀 있던 광물 중 하나가 은이었어요. 현재 멕시코, 페루 등지에 은이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기도 하고요. 이번 전시는 남미 대륙 옆에 자리한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레지던시를 할 때 작업한 결과물이에요. 그곳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 ‘칼리냐’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은의 기원은 곧 아날로그 사진의 기원과 맞닿아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은광을 찾아 떠났지만 동시에 사진의 기원과 제 자신이 잊고 있던 기억의 심연으로 향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떠난 15세기 정복자의 여행도 제가 아주 어릴 적 한국에서 프랑스로 향한 방향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자리한 작품 ‘은 할로겐 입자’에서 가지런히 놓인 나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요. 이 여정의 시작점입니다. 관람객이 물속에서 사금을 찾는 듯한 상황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래쪽에 놓인 아날로그 사진에서 사금 대신 할로겐화은을 찾는 거예요.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나무는 장애물 역할을 합니다. 미끄러운 강을 거닐 때처럼 아래쪽을 응시하게 만드는 거죠. 여정의 끝에는 은광의 종말을 예언하는 마야의 기록에 다다릅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영상 작품 ‘우리 내면의 인도를 향한 여행’에 참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150개가 넘는 버전을 만들었어요. 원근법을 통해 우리가 가진 기억의 깊이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어떤 기억은 가까운 곳에, 또 어떤 기억은 깊은 곳에 자리한다는 사실을요.

시간이 지나 결국 은이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산업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선 아날로그 사진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먼 훗날 우리 다음 세대는 사진이 실제를 반영한 흔적이라는 정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디지털 사진만 해도 충분히 사실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이후의 일정이 궁금합니다. 오는 11월 주 미얀마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릴 디지털 아트 페스티벌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이어서 인도 뉴델리와 이란 테헤란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고요. 

 

에디터 김민지(mj@noblesse.com)
사진 김춘호(인물)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