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st News

SEPTEMBER. 2019 ARTIST&PEOPLE

있는 그대로의 이건용

  • 2019-09-09

작가 이건용은 강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1세대 전위예술가다. 사람 이건용은 누굴 만나도 화두마다 랩처럼 리드미컬하게, 깊숙이 말하는 스토리텔러다. 신작 ‘시방(十方)’과 같이 그의 50년 작품 활동을 망라한 <이건용-이어진 삶>전을 앞두고 그를 만나 지금껏 고민하는 존재에 대해 들었다. 그가 왜 아직은 원로 작가일 수 없는지, 한 시대를 쉼 없이 살아온 생생한 어투 그대로 전한다.

이건용은 스스로 안경을 뒤집어 쓰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리고 1970년대에 선보인 퍼포먼스 ‘손의 논리’처럼 계속 동작을 만들어갔다.

작가에게 직접 듣지 않는 사람
내 ‘신체드로잉’(1976)이란 작품은 캔버스를 그냥 보고 작업하지 않아. 내 키만 한 합판 뒤에 서서 펜을 쥔 채 팔을 앞으로 걸치고 펜이 닿는 길이만큼만 선을 위아래로 그려. 다 그리면 그만큼을 톱으로 자르고, 뒤에서 다시 그리지. 내 팔꿈치까지의 길이만큼 그리고 또 합판을 잘라. 그렇게 하나씩 잘랐다가 하나로 붙이면 내 신체 비율하고 비슷한 드로잉이 생겨요. 2016년 12월 17일 최장환이란 사람이랑 같이 내 키만 한 합판에 경첩을 달아서 손목, 팔, 다리 길이만큼 접을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어. 이제는 힘들게 톱질을 하지 않지.
또 다른 ‘신체드로잉’은 내가 캔버스 앞에 뒤돌아서서 팔을 뻗어 그린 거예요. 이건 자기 기법(method)을 터득하면 누구나 가능해. 그래서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할 때 어린이랑도 같이 했어. 미국 평론가 조앤 기(Joan Kee)도 따라 해봤대. 근데 힘들더래요. 그냥 손이 움직이는 대로 하면 되는데 어떻게 선을 그을까 너무 신경 쓰다 보니 부자연스러워진 거지. 내가 캔버스를 떠나려 하는 건, 내가 받은 주입식 교육을 떠나서 순수하게 평면과 내 신체가 만나는 지점을 찾으려는 거예요. 예술이라고 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거지.
저 그림도 물감과 평면이 만났지만 또 신체가 어우러지지. 우리 몸이라는 게 완벽한 거야. 알아서 균형을 잡잖아. 나도 그리고 보니까 기가 막히게 균형이 잡혀 있더라고. 신체라는 게 굉장해. 바다 물고기도 리더 하나가 방향을 바꾸면 순식간에 흐름이 바뀌지. 신체가 가진 오감이랄까, 대단한 거야. 사진작가도 몸을 돌려가면서 찍어대잖아. 카메라의 눈이 신체를 통해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다 만나. 그래서 나는 내 작품을 ‘논리적인 퍼포먼스’라고 말해왔어요. 내가 언어로 정의했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뭐냐면 “아니, 이 선생님은 언제 이걸 도입하셨어요?”예요. 무슨 도입이야?




1 매체에 처음 공개하는 유명 전시 기획자 마시밀리아노 조니(Massimiliano Gioni)의 즉석 드로잉 ‘Snail to Snail’. 2010년 이건용 작가의 퍼포먼스를 본 후 자신의 손가락을 이용해 냅킨 위에 그려 화답했다.
2 신체항 71-2019, 소나무, 자갈, 적토, 모래, 시멘트, 400×150×150cm, 2019

증거를 수집하지 않고 이론에 기대는 평론가
“건용 씨,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활동 초기에도 내가 어떻게 작품에 접근했다고 얘기하려면 평론가들이 들으려고 하질 않아. 해외 작가는 다 연구해서 작품을 하는 거고 우리는 그걸 다 도입해서 하는 거니까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해외에서 무슨 책이나 이론을 공부했다고만 하는 거지. 그거 큰 잘못이야. 이론은 사실에 근거해서 나와요. 이론을 받아들일 때 사람마다 체험 수준에 따라 오역하는 부분이 있잖아. 그걸 1970년대부터 누구든 기록해왔으면 오역했더라도 지금 나름대로 해석을 더해 한국 예술 역사로 기록됐을 텐데, 아무것도 없잖아. 가령 ‘신체드로잉’만 하더라도 이건용은 아이디어를 어디서 가져오고, 일반적인 이미지 표현과 캔버스에서 왜 벗어났는지 물어서 기록만 잘해뒀으면 우리 한국 현대미술이 축적되고 기록으로 남았을 거야. 2000년대 해외에서 만난 평론가들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없어서 답을 못 했지. 남의 이론을 보고 나서 거기에 맞춰 떠들어대니까 작가와 작품이 처한 상황을 더 몰라요. 나중에 제삼자가 봤을 때 무슨 이야기인 줄 모르게 되지.

기술자로 사는 예술가
지금까지도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예술을 보는 기본 개념은 ‘기술자’야. 예술가를 일종의 특수한 기술자로 보는 거지.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나의 세계관을 갖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사유하고, 그 결과 작품이 나온다고는 생각 안 하는 거야. 미술가도 한 10년쯤 지난 다음에 “너 그때 왜 그렇게 그렸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 왜냐면, 어디 걸어다니다 운 좋게 미술 잡지나 갤러리를 봐. 그중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드니까 ‘요즘 경향이 이런 거구나’ 하고 감각적으로 디자인을 해. 그렇게 내놓으면 평론가가 미술가에게 물어보지도 않아. 왜냐하면 평론가가 알아서 먼저 판단하거든. 예술을 사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미술가도 요즘 스타일에 맞춰 사유하는 거야. 이렇게 한심한 노릇이 어디 있겠어요.
‘달팽이 걸음’(1979)이라는 퍼포먼스가 있어요. 맨발로 쭈그리고 앉아 앞으로 나아가면서 바닥에 선을 계속 긋는데, 동시에 내 몸이 따라가면서 그 선을 지우는 거야. 우리는 그리는 것만 그린다고 생각하는데 지우는 것도 그리는 거야. 설치 작품 중 ‘신체항’도 그래. 원래 자연의 태양 광선을 따라 자란 나무의 자연스러운 생태적 형태를 인정하는 거야.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무와 의논하는 거지. 내가 개입할 만큼만 개입하고 자연의 껍데기는 남겨둬. 강조하기 위해 조각대를 가져다 놓고. 바깥에 있는 거 다 참견하지 말고 내가 발견한 걸 드러내는 것, 그게 조각이라고 생각해. 작가의 행위와 자연이 만나는 거지. 내 작업은 억지스러운 게 없어요. 아이디어는 1960년대부터 갖고 있었는데, 경부고속도로 변에 뽑혀 있는 나무를 보고 바로 퍼온 게 시작이지. 당시 미술계는 조각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에만 온통 매몰되어 있었어. 하지만 나는 만들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췄어. 전시장 안에 못 들어온다고 여기는 걸 갖다 놓음으로써 나는 ‘미술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졌지.




3 신체드로잉 87-A-3(샤먼), 200×200cm, 1987
4 구조조정(잠수된 의자), 600×250cm, 1997

제압하는 시대와 사회
1970년대 유신정권 때 얘긴데,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와서는 이 나무 밑을 다 파헤쳐봐야 한대. 내가 폭파 장치를 해놨을 거라는 거야. 이건 도저히 미술이 아니래. 청와대를 파괴하려고 만들었다는 거지. 그때부터 20년 가까이 정부는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 남산에 끌려가서 무릎을 밟혀 후유증으로 고생했지. 국립현대미술관이 1975년에 내게 공문을 보낸 적도 있어. 당신이 하고 있는 이벤트는 사회에 도움이 안 되니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때는 젊은 치기로 읽고 태워버렸는데, 사료로 기증할 걸 그랬어!
그런 시대를 뚫고 우리가 작가로 살아남은 건 기적이야. 학교에서 퍼포먼스 연구 수업을 같이 했던 친구는 ‘미쳤다’는 평가에 충격을 받아 30년째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공황장애를 얻은 동료 작가들도 있어. 지금 나만 괜찮아요.
내가 무너지지 않고 버틴 이유는… 아무리 끊임없이 질문하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듣고 반응해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어머니는 맨날 “건용이 때문에 죽을 지경이에요”라며 울면서도 “네가 좋으면 그렇게 해라”라고 말씀해주셨어.

새로운 생각, 새로운 전시
고등학교 재학 시절 철학 시간에 심취해서 지금껏 비트겐슈타인을 얘기하고 있잖아. 노자, 장자, 빈학파 이야기, 또 메를로 퐁티와 미국 분석철학가 촘스키 이야기…. 내가 인터뷰마다 어린 시절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자기 생각을 실현하는 걸 장려하고 찬성해주고 불가능한 일을 한 번 하게 만들어준 경험이 중요하단 거예요. 특별한 체험과 자기 인생을 개척하게 하는 거, 그게 창조적인 세계와 작가를 만드는 과정이야. 그래서 교수 시절 서양화 전공 수업 시간에 그림을 안 가르쳤어요. 철학책 읽히고 계속 토론을 시켰지. 졸업 전에 자기 그림 값을 스스로 매기게 한 후 팔아오라고 해. 그게 다 실제 작품에 대한 것들이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구상했는지, 발표하는 장소까지 땀 흘리면서 같이 걸어가면 그 상황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걸 얘기해. 누구는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제자들이 손가락 하나도 못 그린다는 둥 별 얘기가 다 돌았어.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미술을 문제를 촉발하는 대상으로 봤어. 지금도 아이디어는 많고 메모해둔 것도 많아. 이번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오프닝에 평소 신고 다니는 운동화 한 짝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나무 막대기를 끼워서 한 짝은 천장에 붙어 있게 해놨어 (‘이어진 삶 77’).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천장을 바라볼 수 있게 됐지. 이상하게 요즘 젊은 관람객이 늘었어. 팬클럽처럼 전시 맞춰서 오는 그룹도 있고. 개념 미술을 많이 접하고 있는 세대라 그렇겠지. 나는 지금도 하고 싶은 게 많아.

인터뷰를 지켜보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쁜 그림도 잘 그리는데 그런 전시는 한 번도 안 했다고 아쉬워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쉼 없이 문제의식을 말하려는 작가이기에, 또 신체로 표현하는 행위자이기에 평생 군살 없이 유연한 몸을 유지하며 글도 쓴다. 유전자에 유머가 있나 싶을 만큼 웃지 못할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을 유쾌하게 대해왔지만, 그만큼 상대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앉을 만한 생각의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할 것과 할 말이 많은 작가다. 이건용의 사유와 현재를 18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한 <이건용-이어진 삶>전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10월 13일까지 열린다. 한국 미술사에 강렬한 자국을 남긴 한국 현대미술 작가를 조명하는 두 번째 전시로, 그가 말한 철학과 역사적 배경이 실제가 되어 우뚝 서 있다.

이건용
목사 아버지와 간호사 출신의 어머니, 그리고 수많은 책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질문하는 악동으로 자랐다. 배재고 재학 시절, 철학 수업에 흠뻑 빠진 뒤 대학에서 서양화와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1969년 조형학회 ST(Space and Time)를 결성했고,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회 이슈를 다뤘다. 당시 예술에 독자적 언어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퍼포먼스마다 제목을 붙이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을 비롯해 미국 라초프스키 컬렉션, 영국 테이트 모던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1981년부터 재직하던 군산대에서 은퇴한 그는 작가로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김춘호(인물)   사진 제공 부산시립미술관

관련 기사

페이지 처음으로